121화
나의 첫 번째 요구 조건.
우리 원정대가 라덴의 신전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괜찮지? 어차피 너희들이 라덴을 숭배하는 집단도 아니잖아.”
나는 이곳을 흔적도 없는 잿더미로 만들 생각이었다.
사실 신전을 파괴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얻는 실리적인 이득은 없다.
우리 원정대가 마교의 세력 한 곳을 철저하게 밟아 놓았다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하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아주 중요하기도 했다.
공략집에 따르면, 이런 요식 행위 하나가 퀘스트 진행률에 상당한 가중치를 갖는다고 했으니까.
“설마 우리가 그걸 수용할 거라 생각하고 제안하는 것이냐?”
대신관 델라우가 핏대를 세우며 노발대발했다.
“왜? 대신관 놀이를 하다 보니 정말 신앙심이라도 생긴 건가?”
나는 델라우를 보며 도발의 강도를 더했다.
어차피 내 요구 조건은 한발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협상이 결렬됐을 때 잃을 게 많은 쪽은 무조건 검종이니까.
“마스터! 이놈들과 협상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검종을 뭘로 보고!”
하지만 정작 엘라는 말이 없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것이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녀의 입장에서 우리 원정대의 기습은 완벽하게 허를 찔린 꼴.
지금 바로 우리 원정대와 혈마대가 명운을 걸고 전투를 벌인다면 그녀로서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전쟁은 시작도 못 해 보고, 이곳에서 장렬하게 산화하는 게 두려울 것이다.
- 신전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해!
내 제안에 거북함을 느끼지만 델라우만큼 강경하진 않다.
마스터가 갖는 선택의 무게는 결코 가벼울 수가 없는 법.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신전을 파괴할 생각이야.”
“너희 마법사들은 협상을 이런 식으로 하나?”
“어, 대신 그에 합당한 걸 우리 쪽에서도 내주지.”
그리고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될 것이다.
“……합당한 것? 그렇다면 칼리아의 황궁이라도 파괴해 주겠다는 것이냐?”
“아니, 그보다 너희에게 더 좋은 것.”
“뭐?”
엘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궁 파괴는 그녀가 의미 없이 던져 본 말일 뿐. 그것이 가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라니.
“궁금해?”
“만약 장난을 치는 것이라면 재미없을 것이다.”
“소실된 수라마혈검의 원본. 그걸 너희에게 주도록 하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질렀다.
이번엔 엘라와 델라우, 둘 모두의 동공이 요동쳤다.
분명 검종은 혈마와 조셉이 남긴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발레론의 검술을 수차례 지켜본 뒤 내린 결론.
99%는 잘 전승되고 있긴 한데,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부분은 수라마혈검의 연성을 가로막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황당하군.”
“왜? 내가 원본을 가지고 있어서? 아니면 너희에게 원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둘 다. 굳이 숨기진 않겠다. 네 말대로 수라마혈검은 검종 내 세력 다툼으로 수백 년 전 소실된 것이 사실이니까.”
“내가 원본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딱 봐도 그래 보이지 않아?”
나는 검종의 인물이 아님에도 수라마혈검을 익히고 있다는 것.
분명 엘라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근거로 충분하다.
“믿어지지 않지만, 한편으론 믿고 싶은 말이로군.”
“믿고 말고는 네 뜻에 달려 있어. 그럼, 선택해. 신전 파괴, 받아들일 거야?”
내 말에 엘라와 델라우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게 강한 적대감을 보인 델라우마저 흔들리고 있을 정도면, 이미 게임은 끝났다.
엘라의 내적 갈등이 들려온다.
나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점점 우세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곧 내게 백기를 들 것이다.
“좋다. 너를 믿어 보지.”
역시.
검을 숭상하는 집단에 이 이상의 제안은 있을 수 없다.
“그럴 줄 알았어.”
“네가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라는 그 말에 걸어 보기로 했다.”
“그런 믿음 아주 바람직해. 그럼 신전 파괴 건은 이렇게 마무리하도록 하고.”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하겠다고? 우린 아직 수라마혈검의 원본을 보지 못했다!”
“아, 그게 말이야. 내 두 번째 요구 조건과 연결되어 있어서.”
나는 엘라와 델라우를 번갈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그건 또 무엇이냐!”
“신전 파괴보단 훨씬 간단해. 네 옆에 앉아 있는 델라우 말이야. 내가 포로로 좀 잡아가야겠어.”
“뭐!!”
델라우는 짧은 경악성을 질렀다.
“그렇게 놀랄 거 없어. 이미 잡아 놓은 발레론이랑 같이 가둬 놓고 수라마혈검을 내가 직접 가르쳐 볼 생각이니까.”
“마스터! 이건 개수작입니다! 협상은 전면 무효라 선언해 주십시오!”
“쩌리는 잠깐 좀 빠지고! 내 옆에 최정혁을 봐. 한마디 없이 듣고만 있잖아?”
가만히 있던 최정혁이 순간 발끈했다.
뜬금없이 팀킬을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델라우는 지금부터 좀 밟아 놓을 필요가 있다.
어차피 나에게 검술을 배우다 보면 처맞을 일도 많을 테고.
“포로라…….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수라마혈검을 잘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 두지. 물론 때가 되면 발레론과 함께 풀어 줄 거야.”
“마스터! 이런 개수작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지요?”
델라우는 이미 영혼 가출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엘라의 의지다.
“……좋다. 너를 한 번 믿어 보지.”
“마스터!”
“델라우 대신관님. 가서 잘 배워 오세요. 대신관님의 자질이라면, 금세 전수받을 수 있을 겁니다.”
“마스터! 정말로 믿으시는 겁니까?”
“믿고 싶어요. 적어도 이자는 신비로운 존재인 건 분명하니까.”
“잘 선택했어. 역시 마스터답네.”
이 협상은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윈윈이 될 예정이다.
검종과 전면전이 될 예정이었던 이번 14층은 이제부터는 안전지대가 될 것이며, 우리 플레이어들의 희생도 없을 것이다.
이제 엘라는 그동안 준비해 온 전쟁을 잠시 보류하고, 서서히 검종을 재건해 나가면 된다.
나중에 할 이야기지만 나는 검종의 재건을 도울 생각이었다.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는 마르지 않는 황금으로.
‘조셉, 그리고 혈마…….’
이 둘로부터 받은 것이 있으니 이들의 후예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정작 조셉과 혈마는 내 보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협상도 끝났으니 하나만 묻자.”
엘라는 일어서려는 나를 잠시 붙잡았다.
“정말 하나만 물어보려고?”
궁금한 게 하나뿐일 리가 없을 텐데.
“……아니. 사실 물어볼 게 좀 많다.”
엘라가 살짝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녀의 질문들에 전부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 * *
엘라와 혈마대가 떠난 후 신전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약 3주 후.
[14층의 시스템에 중대한 교란이 발생하였습니다.]
라덴의 신전으로 원정을 떠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검종의 마스터가 그곳에 있던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으니까.
엘라와 협상을 벌이고 전쟁을 막은 것은 14층의 인과율을 크게 뒤틀어 놓는 일이었다.
“호영이 형, 방금 메시지 들었지?”
“어, 조용히 하고 더 기다려 봐.”
[시스템을 재설정합니다.]
[14층의 메인 이벤트가 삭제되었습니다.]
[14층 퀘스트의 성향이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엘라의 검종은 당분간 전쟁을 일으킬 뜻을 접었음을.
“형, 그럼 이제 마교 놈들, 아니 검종이랑 싸울 일은 없는 거야?”
“적어도 그것과 관련된 퀘스트는 생성되지 않겠지.”
“시시해지겠네.”
“등 뒤에서 칼침 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쳇, 알겠다고! 꼭 얘길 해도 그렇게 살벌하게.”
물론 먼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마법사들에 대한 검종의 원한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곪아 터지기 직전의 상처를 내가 잠시 봉합해 놓았을 뿐이다.
우리가 떠나고 난 뒤의 미래는…… 뭐, 거기까진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희망의 씨앗을 심어 놓은 것만으로도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그나저나 형 괜찮겠어? 이제 곧 재판이잖아.”
죄목은 검을 소지하였다는 것.
중죄이긴 하나 일단 보석 신청은 받아들여졌다.
원정에서의 내 절대적인 공로가 인정되었고, 보석금이 사상 초유의 거액이기도 했으니까.
여기에 가가야로의 권력이 더해지다 보니, 일신상의 자유는 당분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물론 재판이 이루어지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검을 소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승의 검술을 구사하였고 그것을 본 눈이 너무 많았다.
분명 재판장에서는 그 부분이 거론될 공산이 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라덴의 신전에 있던 엘라가 검종의 마스터라는 것을 그 누구도 모른다는 점.
만약 이 사실까지 밝혀졌다면 아주 곤란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재판 전에 14층을 떠야지.”
“그게 가능하겠어?”
“어, 퀘스트 진행률이 거의 막바지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 잠깐 제자 놈들에게 좀 다녀올게.”
첫째 제자 발레론에 둘째 제자 델라우.
두 놈 다 자질이 엉망이라 내가 직접 가서 손보지 않으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걸릴 기세였다.
“또 가려고? 하여간 이 형도 진짜 특이하다니까. 그놈들 만나서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내가 누구한테 보은할 게 좀 있어서 말이다.”
“그건 또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하여간 비밀만 더럽게 많아요!”
곧 다가올 재판을 생각하면 서두르긴 해야 한다.
물론 발레론과 델라우를 풀어 주는 것은 내가 떠나고 한참 뒤가 되겠지만 말이다.
* * *
“여전히 쓰레기네.”
나는 두 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수라마혈검의 대성(大成)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적당히 이해하는 수준만 바라는 건데 이 두 놈은 정말 둔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아둔하다고 생각했던 조셉이 이제 보니 천재였다.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까지는…….”
“쓰레기 맞아. 그것도 개쓰레기! 내가 이해도 시켜 주고 모범 답안도 직접 보여 주는데, 그걸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어려워?”
“고작 보름이다! 어떻게 보름 만에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인가!”
“나는 했어. 그런데 너희는 왜 못해?”
“……!!!”
“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이 평생 하던 거에서 변주만 살짝 주는 거잖아. 그런데 어려워?”
아마 사부가 나를 바라볼 때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툭하면 쓰레기라는 말을 내뱉었던 사부를 이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시범을 좀 보여다오! 제8장의 4초식이 너무 난해하다!”
애원에 가까운 발레론의 목소리.
델라우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걸 보니, 두 사람이 같은 주제로 함께 고민을 나눈 듯했다.
그래도 마냥 놀고 있지만은 않았던 것.
아쉽다.
내게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잘 봐.”
아둔하긴 해도 검술을 대하는 자세만큼은 진지했다.
두 사람 모두 내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모습이다.
‘머리가 나쁘니 성실하기라도 해야겠지.’
발레론과 델라우.
앞으로도 이 둘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검술뿐만 아니라 사상 교육도 함께하고 있는데, 이 둘은 향후 검종을 칼리아의 양지로 이끌게 될 것이다.
내가 떠나기 전 남길 막대한 양의 금과 가가야로의 권력은 그 초석.
그리고 우리 마탑주 레나도 검종을 돕게 되겠지.
그 순간 레나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문 열어 봐! 드디어 성공했어!”
딱 들어 봐도 헐레벌떡 뛰어온 목소리다.
성공했다니, 도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호들갑인 건지.
우리 마탑주도 참 유난스러운 캐릭터인 것은 분명하다.
- 12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