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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20화 (120/292)

120화

사실 내가 엘라를 이길 거라 확신한 건 아니다.

발레론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불세출의 천재 검투사. 나보다도 강하다 했으니 굉장한 실력자라는 것 정도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일대일을 유도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마스터인 그녀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

여차하면 케레스의 쉘터를 쓰면 될 테고.

‘피의 전쟁이라…….’

여기서 우리 원정대가 승리하여 엘라와 혈마대의 목을 벤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이미 검종은 마법사들과의 전쟁 준비를 끝마친 상태.

전쟁이 벌어지면 내가 정성 들여 짜 놓은 14층의 판이 완전히 깨져 버리게 된다.

또한 나는 가장 먼저 15층으로 도달하겠지만, 남은 나의 동료들은 고스란히 전쟁의 대가를 치르게 될 터.

게다가 혈마와 조셉을 생각하면 전쟁만은 막고 싶었다.

전쟁이 끝나면 이곳 칼리아에서는 수라마혈검의 명맥이 완전히 끊겨 버리게 될 테니까.

결과적으로 엘라는 나의 도발에 응했고, 우리 둘만의 일대일 무대는 만들어졌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하나.

‘엘라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 가는 것!’

휘이이이이익!

엘라의 엘리시온은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요동치는 마력의 흐름이 공기를 타고 내 감각을 건드렸다.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

챙!

엘리시온을 들어 그녀의 검을 막아 냈다.

팔 전체가 저려 온다.

수라마혈검 특유의 패도적인 힘이 나를 억눌러 왔다.

똑같은 검술로 승부한다면 숙련도에서는 확실하게 내가 밀린다.

단 일 합을 맞대어 봤을 뿐이지만, 인정할 부분은 깨끗이 인정하는 쪽이 신상에 좋을 터.

다행히도 내겐 꺼내 놓을 카드 하나가 더 있다.

무영추혼검.

아마도 이쪽이 승산이 높을 것이다.

* * *

오십 합.

사실 대단히 많은 합을 겨룬 것은 아니다.

과거 조셉과는 수백 합의 검을 나눠 본 적도 있으며, 무림의 초고수들에게 이 정도는 겨우 워밍업 수준.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피로도는 조셉과의 비무 때보다 훨씬 컸다.

매 합마다 혼신의 힘을 다하며 버텨 내고 있었기 때문.

엘라의 무위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후우.”

나는 연신 가쁜 호흡을 뱉어 냈다.

잠시 숨을 좀 돌릴 필요가 있었다.

“확실히 같은 나이 때의 조셉보다 네가 더 강해.”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발언.

조셉은 수백 년 전의 인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 말은 진실이자 진심이었고, 그러한 점이 엘라의 마음을 묘하게 건드린 모양이다.

“불경스러운! 그분의 존함을 함부로 거론하지 말라!”

마치 내가 신성 모독이라도 했다는 듯한 반응이다.

“미안하지만 조셉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네 녀석이 뭘 안다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것이냐!”

“조셉이라면 내가 잘 알지. 적어도 너희 검종보다는.”

“개수작!”

“조셉 녀석. 출세했네.”

이건 확실했다.

과거에 대한 미화가 더해지고 더해져 환상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조셉이 최후에 어느 경지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 예상 범위 내에 있다면 지금의 엘라보다 조금 강한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방금 내 말에 엘라의 눈빛은 더욱더 싸늘하게 식어 갈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로 반응하지 않았다.

엘리시온이 나를 향해 쏘아져 온다.

챙!

분노에 가득 찬 일격.

그녀의 수라마혈검과 나의 무영추혼검이 다시 맞붙기 시작했다.

혈마와 천마.

나와 그녀는 마치 이 두 거두의 대리자가 된 느낌이었다.

엘라와 검을 맞댈 때마다 두 엘리시온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 수라마혈검에 맞설 수 있는 검술이 존재하다니!

엘라로선 혼란스러울 것이다.

나라는 존재. 무영추혼검. 그리고 엘리시온까지.

게다가 내가 조셉을 거론한 것이 은근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후우.”

나도 지쳤지만, 그녀도 지쳤다.

내게는 간헐적으로 그녀의 마음이 들려왔으니, 유리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만큼은 아니다.

여전히 인정한다.

엘라는 나보다 살짝 더 강하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무려 이백여 합을 더 겨루었다.

아직은 여력이 있지만, 마력이 고갈되는 순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물론 그녀는 나를 산 채로 잡아 고문을 할 생각이니 죽을 염려는 없지만,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갈 생각은 없다.

찰나의 여유를 내어 시선을 돌려 보았다.

우리 원정대 쪽으로.

그리고 혈마대 쪽으로도 한 번.

‘다들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군.’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였다.

검종 모두가 신앙처럼 여기는 마스터. 그녀가 한낱 마법사일 뿐인 나를 검으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멘탈이 정상일 리가 없다.

- 마스터께서는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누가 봐도 그건 아니다.

엘라는 지금 전력을 다해 나를 제압하려 하고 있으니까.

- 저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 그리고 갑자기 바뀐 저 검술은 또 뭐야!

이들은 나에 대한 신비감마저 느끼고 있다.

어찌 되었든 검종의 무리는 검을 숭상하는 집단이니, 난생처음 보는 무영추혼검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마스터에 대한 신앙심을 한 올이라도 흔들어 놓았다는 것.

이만하면 성공이다.

사실 지금 살짝 걱정이 되는 쪽은 우리 원정대였다.

내가 검을 들었다는 것.

이는 사전에 예고된 일도 아니며, 내가 돌발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칼리아에서 검은 엄격히 금지된 무기이며, 검을 연마하는 것은 반역에 준하는 중죄이니 이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관건이었다.

물론 더 이상 나를 마교의 첩자로 오해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나와 검종의 마스터 엘라는 정말로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으니까.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왜 갑자기 우리 원정대장이 검을 들고 설치는 건데!

검종의 마스터가 이곳에 있다는 돌발 상황만 아니었다면, 나도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과감하게 도박을 해 볼 필요가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제 슬슬 작업을 쳐 볼 때가 되었다.

“그거 알아? 지금 네 친위대 말이야, 눈빛이 흔들리고 있어.”

“그게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

“검종의 마스터인 네가 검으로 아직까지 나를 베지 못하고 있잖아. 저들이 상상이나 해 본 일이겠어?”

“이제 곧 끝낼 생각이다!”

“난 아니라고 보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붉어지며, 마력이 폭발한다.

파파파팟!

가공할 만한 검기가 그녀의 엘리시온에서 터져 나온다.

‘화 많이 났네.’

물론 고스란히 다 맞아 줄 생각은 없다.

이 회심의 일격을 다 피하는 것도 무리지만.

스윽!

오른쪽 어깨를 살짝 베이며 핏물이 튀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막은 셈이다.

“……거봐. 내가 안 끝난다고 했잖아.”

우리 둘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비록 내가 승부를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좀 더 여유 있는 입장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마법사의 신분. 그에 반해 엘라는 검종의 마스터.

실제로 그녀의 초조함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여기서 나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검종의 사기는 완전히 꺾여 버릴 테니까.

실제로 우리 둘의 승부가 시작되기 전 전세를 주도하고 있던 쪽은 명백히 우리 원정대였다.

다시 전면전을 재개한다면 승기는 우리가 잡게 될 공산이 크다.

엘라도 그 부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발레론은 살아 있어. 아주 잘 모시고 있지.”

“갑자기 또 무슨 수작이냐?”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나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야. 검투사에 대한 증오도 원한도 없는.”

“증오와 원한? 그건 역사의 피해자인 우리 검투사들이 가져야 할 감정이다!”

“인정.”

“뭐?”

“말했잖아. 난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라고. 그리고 난 마법사와 검투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는 사람이야.”

내 말에 엘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개수작! 네가 어떤 연유로 검술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 놈들은 절대 믿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싸움을 계속 이어 갈 생각이라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난 더 이상 너와 승부를 낼 생각이 없어.”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검종 마스터의 실력에 흥미를 잃었다는 뜻이지. 다시 전면전을 재개할 생각이야. 네 생각에는 어느 쪽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

내 말에 엘라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은 둘째 문제.

지금 머릿속은 혼돈의 카오스일 것이다.

나를 가볍게 제압한 후 기세를 몰아 우리 원정대를 칠 의도였겠지만, 그녀는 지금 내게 발이 묶여 있는 상태.

이런 상황에선 그녀도 결코 검종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너희 검종은 지지리 운도 없었어. 보아하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하필 이 신전을 방문했을 때 우리 원정대를 만나다니 말이야. 그런데 우리 원정대가 좀 강해? 쪽수로는 우리가 밀려도 너희 혈마대를 밀어붙이고 있었잖아?”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세 번째 이야기하는 건데, 나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이제 엘라를 협상 테이블로 올려 볼 시간.

모든 것은 나의 뜻대로 될 것이다.

* * *

라덴의 신전.

그리고 신전의 가장 은밀한 곳이 위치한 대신관의 방, 그곳에는 단 네 명만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 쪽에서는 나와 최정혁.

검종 쪽에서는 마스터 엘라와 대신관 델라우.

이런 그림은 상상해 본 일이 아니다.

애당초 나의 계획은 라덴의 신전을 부수고, 이 신전의 지도자 한 명을 포로로 잡아갈 생각이었다.

아마도 내 앞에 앉아 있는 대신관 델라우가 그 타깃이 되었을 것이다.

“신전 하나는 그럴듯하게 지어 놨네. 정말로 라덴을 모시는 신전 맞아?”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이냐?”

“선수끼리 구라 치지 말자는 얘기지. 대신관은 개뿔.”

나의 비아냥거림에 델라우의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빡 섰다.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들 기세인데, 엘라가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그냥 본론만 해. 우린 협상을 하러 왔을 뿐, 말장난은 사절이다.”

협상은 내가 제안했으나 사실 급한 쪽은 내가 아니라 엘라.

지금 검종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일으키려는 중대한 순간이니, 신중해야만 할 것이다.

“검종의 마스터가 여기 신전에 놀러 왔을 리는 없고, 딱 봐도 전쟁 준비를 하려는 거 같은데. 어때? 내 말이 틀렸어?”

초장부터 정곡을 찔러 봤다.

엘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 정보가 샜을 리가 없는데. 이 녀석은 도대체…….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내 말이 맞나 보네. 그런데 너희가 전쟁을 벌인다 한들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해? 전력 차가 너무 압도적인데.”

엘라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내 눈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쉽게 입을 열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 대꾸를 한다는 건, 전쟁 준비를 시인하는 꼴이니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마교가 예전 마교도 아니고, 전면전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야. 그건 너희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

“그렇다면 게릴라전을 노리는 건가? 뭐, 그게 현명한 방법이란 생각은 들어. 실제로 상당한 피해를 줄 수도 있겠지. 너희들의 총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끌고 온 혈마대만 해도 굉장했으니까. 우리 원정대가 너무 사기적으로 강했을 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다면 넣어 둬.”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이젠 부인하지도 않네. 이유는 간단해. 나는 너희 검투사들의 명맥이 끊이는 걸 원하지 않아.”

“……왜지?”

“나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니까. 오늘 벌써 이 얘기만 네 번째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해 볼까?”

나는 엘리시온을 만지작거리며, 엘라를 바라보았다.

급한 것도 초조한 것도 명백히 엘라.

검술에선 살짝 밀렸지만, 협상 테이블에서만큼은 내가 갑이다.

- 12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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