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보는 탑 공략집-117화 (117/292)

117화

마교 원정을 위해 카움 지방으로 떠나기 전 발레론을 찾았다.

특별히 그로부터 대단한 이야기를 들을 거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현자의 상태창이 보내온 공략집이 마음에 좀 걸렸을 뿐이다.

[권장 인원은 최소 800명입니다.]

도대체 왜?

마교 본단도 아닌 고작 지파 원정에 800이면 상당한 숫자. 아무리 카움 지방에 있는 마교의 지파가 강성하다 한들, 조용히 숨어 지내는 세력일 뿐이다.

게다가 현재의 마교 세력은 과거와 비교하면 상당히 위축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칼리아를 피로 물들였던 마교의 전성기와 비교한다면 지극히 미약한 수준일 터.

그럼에도 800이라는 대인원을 권장한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 마탑은 이제 두 번째 마교 원정을 떠날 생각이야. 그전에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어.”

“허풍 부리지 마라! 너희들이 우리 검종의 위치를 발견했을 리가 없다!”

“네가 있던 라힌의 마을도 발견했는데 뭘.”

“……그 ……그건!”

“카움 지방에 있는 라덴의 신전. 그곳이 우리의 다음 타깃이야.”

내 말에 발레론의 눈빛이 요동친다.

다시 녀석의 의심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본단에서 온 인물이 아닐까 하는.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시치미 떼지 말고 솔직히 불어 봐. 라덴의 신전 쪽 규모는 어느 정도 수준이지?”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나? 23구역 마탑 소속의 마법사. 그리고 혹시 내가 검종의 본단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넣어 둬.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아니야.”

- 이젠 정말 모르겠다! 정말 검종과 아무 상관이 없는 놈이라면 너무 위험한 상황이야.

- 하지만 수라마혈검도 그렇고 어떻게 라덴의 신전을 알 수 있는 거지?

신전은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대장간을 통해 무기를 조달했던 라힌의 마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곳은 검종 전체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이니까.

“모른다.”

“진짜 고집불통이네. 그럼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좀 해 보자.”

“쓸데없는 짓이다! 네가 원하는 그 어떤 대답도 내 입을 통해 들을 수는 없을 테니까.”

철벽같은 녀석.

“발레론, 검종에서 너의 위치는 어느 정도지? 혹시 버리는 패인가?”

“뭐?”

“그래도 한 지파의 수장을 맡았을 정도이니 서열이 아주 낮을 거 같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 그건…….”

“역시 많이 낮은 모양이군. 단순히 무기 공급처였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다! 검종 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자가 한 지파의 수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내 질문에 왜 머뭇거렸던 건데?”

“……그건! 나도 정확히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잘 모른다. 라.”

발레론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녀석의 마음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

이로써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

검종은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 단체라는 것.

한 지파의 수장인 발레론조차 검종 전체를 알지 못한다.

내가 본단에서 온 것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사실은 있다.”

“호오. 네가 순순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어?”

“검종의 마스터. 그분은 칼리아 역사상 최고의 검투사시다.”

오만인지, 아니면 식견의 부족인지.

“세상은 넓어.”

“인정한다. 적어도 나는 너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으니까.”

“그럼, 마스터는 나보다도 더 강한가?”

“말했을 텐데. 그분은 역사상 최고의 검투사라고.”

“너희 검종의 시조인 조셉 클로드보다도 더?”

“……그렇다.”

갑자기 피가 끓는다.

‘나보다 검술에 능하다고?’

수라마혈검을 5성 이상 익혀야만 가능한 일.

내 성취가 그쯤 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발레론이 이토록 확신을 하는 걸 보면 그 마스터란 녀석이 강하다는 것은 분명하긴 한데, 허풍이 좀 세긴 하네.

칼리아 역사상 최고의 검투사라니.

* * *

드디어 출정의 날을 하루 앞두게 되었다.

다행히 탑은 아직 손서연에게 그 어떤 페널티도 부과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급 마굴을 비롯하여 두 개의 중급 마굴을 돌며 급하게 퀘스트를 수행했다.

진행률만 놓고 보면 채이설, 서준호, 고용우보다는 높은 수준.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지만, 나로서는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그럼에도 손서연에게 페널티가 부과된다면…… 그땐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레나는 늦은 밤 나를 그녀의 연구실로 호출하였다.

마법 연구에 빠져 있는 레나는 이 시간까지도 잠을 자지 않곤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옷차림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잘 정돈된 머릿결과 드레스는 지금 당장 파티에 가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마탑주님.”

“어. 내일 원정을 가게 되면 한동안은 보지 못하게 될 거 같아서 말이야.”

그건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지만 레나는 오직 나만을 찾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그녀는 내게 다가와 헝클어진 내 옷매무새를 만졌다.

“조심히 잘 다녀와.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마교 놈들도 잘 처리해 주고.”

“역시 마교라면 치를 떠시는군요.”

“말했잖아. 난 검쟁이들이라면 질색이야.”

“……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전 이번에도 포로를 잡아 올 계획입니다. 본단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하니까요.”

“그래. 그것이 네 계획이니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마교 관련은 너에게 전권 위임이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널 부른 이유는 하나가 더 있어.”

“뭔가요?”

“너에게 선물을 주려고.”

“네?”

“우리 마탑이 지금 이 위치에 온 거, 다 네 덕분이잖아. 그러니 너만을 위한 연구도 하나 진행해 줄게.”

난 또 뭔가 했다.

그나저나 나를 위한 연구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어차피 여기서 연구물을 생산해 내더라도 15층이 끝난 후 본캐 쪽으로는 가져갈 수 없을 테니까.

‘잠깐! 혹시 이게 가능하려나?’

말도 안 되지만 시도해 볼 만한 것이 생각났다.

행여 레나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

“그럼, 저를 위해 특별한 인벤토리 하나만 만들어 주시겠어요?”

“인벤토리?”

“네. 그런데 제가 원하는 기능이 조금 난해하긴 합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래?”

“인벤토리에 특별한 효과를 넣어 보고 싶어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더라도 인벤토리만은 보호될 수 있는.”

“다른 차원? 역시 너답게 발상이 독특하구나.”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정이지요. 마굴만 해도 그렇지 않나요? 포털을 통과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리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마굴에 입장한다고 해서 인벤토리 속의 물건이 없어지거나 그러던가?”

“그건 아니지만, 지금의 마굴보다도 더 먼 차원으로의 이동이 가능해진다면 그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죠.”

“……흐음. 난해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아.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는 인벤토리를 만들어 달라는 말이지?”

“네.”

“나로서도 재밌는 도전이 되겠네. 한번 해 볼게. 왠지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정말요?”

레나는 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할 수 있겠다니, 자신감 하나는 대단하다.

레나가 천재적인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너 가가야로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왜요?”

“고급 마굴을 우리 쪽에 쾌척한 것도 모자라, 인근 마탑들이 이번 원정이 협력할 수 있도록 손을 써 놨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내일은 출정식도 한다던데? 23구역의 주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거란 얘기도 있어.”

“네. 제가 요청한 일입니다. 원정대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뭐?”

“마탑주님도 출정식에서 할 멘트 정도는 준비해 주세요.”

“진짜 말도 안 돼! 도대체 그 노인네를 어떻게 길들인 거야!”

“비밀입니다. 단, 마탑주님의 공도 절반 정도는 된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나는 케레스의 쉘터를 꺼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 * *

- 15층이 끝나면, 피의 날이 될 때까지는 이 녀석을 볼 수 없는 건가?

손서연의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하지만 더 이상은 이것과 관련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번 마교 원정에 집중해야 할 때.

나는 800명의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있는 리더이며 지금 우리는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신전의 모습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거대한 석상들과 웅장한 건축물들.

아직 산 정상까지는 좀 더 남았지만 아직까지는 고요하다.

마치 저곳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왜 공략집은 대규모 원정대를 제안했을까?’

길고 긴 원정길 내내 끊임없이 들었던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이제 탑의 전체 메시지를 통해 풀리게 되었다.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마교의 총공세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뭐?”

나를 비롯한 플레이어들 모두는 순간 외마디의 탄식을 내뱉었다.

수백 년간 간헐적으로 이어져 왔던 마교의 발호.

또 한 번 새로운 역사의 신호탄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사실, 메인 이벤트가 생성될 조건은 충족되긴 했다.

손서연을 마지막으로 모든 플레이어가 14층에 도달한 상태이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방금 전 메시지가 우리에게 알리는 바는 분명했다.

마교가 칼리아의 마법사를 상태로 전쟁 준비를 끝마쳤다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는 마교의 한 지파를 치기 위해 원정을 와 있는 중이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마교가 전쟁 준비를 마치자마자 우리가 기습적으로 선제공격을 하는 꼴이니까.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어, 모든 플레이어들은 퀘스트 진행률에 높은 보정치를 받습니다.]

현시점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이미 최정혁은 멀찌감치 따돌려 놓은 상태이다.

“야, 이호영. 넌 이 상황을 알고 있었던 거야?”

최정혁이 물었다.

“메인 이벤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대규모 병력을 주장한 건 바로 너잖아. 그땐 너무 오버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의 비상 상황이라면 800명도 부족해 보여. 신전에 도착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 수가 없잖아!”

그렇다고 이제 와서 원정대를 정비하기 위해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갈 순 없다.

“일단 올라가지?”

고지가 보이는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산행에 박차를 기울였다.

그렇게 다시 산을 오른 지 30여 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산 중턱부터 기문진이 펼쳐져 있으니 서둘러 해제하십시오.]

역시.

이번에도 혈마표 기문진이었다.

스르르르.

더 이상 산 정상 위의 신전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팔방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며 하늘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우리가 걷는 이곳에 불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팔백여 명의 원정대원 그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환영 마법인가?”

“이거, 우리 원정대장이 바로 해제할 수 있는 거라면서?”

라힌 마을 때의 소문이 이미 자자하게 나 있었다.

지금 다들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할 거라 믿는 저 눈빛들.

“형! 이거 빨리 어떻게 좀 해 봐.”

라힌 마을 때의 기문진과는 디테일이 살짝 달랐지만, 기저에 깔려 있는 원리는 동일하다.

해답을 찾아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바로 기문진 해제 작업을 시작했다.

내 지시에 따라 원정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벌써 안개가 사라지고 있어!”

“역시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었던 거야!”

[기문진이 해제되었습니다.]

다들 조금의 위기감도 느끼지 않아서인지, 열렬한 박수는 나오지 않았다.

라힌 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어쨌든 우리 앞을 가로막던 장애가 순식간에 제거되었고, 이제 정말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느낀 순간.

스스스스스!

기문진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를 에워싼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팔백에 달하는 우리 원정대를 포위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인원.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또?

[당신의 원정대를 포위하고 있는 적들은 마교 본단의 혈마대이며 인원은 약 2천입니다.]

[혈마대는 오직 검종 마스터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직속 친위대입니다.]

공략집이 내게 최대한 많은 인원을 권장했던 이유.

‘이제야 알겠어!’

놀랍게도, 마스터가 이곳 라덴의 신전에 와 있었다.

메인 이벤트가 갑작스럽게 바로 시작된 이유.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14층의 대미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 118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