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사…… 살려 줘어어어억!”
결계 안에서는 가가야로의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쉘터가 이미 발동된 이상 나로서도 별 방도가 없다.
내가 펼칠 수 있는 무영추혼검의 모든 정수를 담아도 이 결계는 절대 못 깬다.
천마신교의 장로급 정도의 고수가 오면 모를까.
“죄송합니다. 전 의장님이 발명하셨다는 퍼펙트 스피어를 믿었습니다만…….”
“제…… 제발 이 결계 좀 어떻게 좀 해 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다. 다만, 뒤처리 준비를 위해 마탑의 시종을 불러 드릴 수는 있습니다.”
“안 돼!! 부르지 마! 절대 안 돼!”
가가야로는 절규하며 외쳤다.
그가 지금껏 쌓아 놓은 이미지가 있으니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
그는 이미 온몸에서 식은땀을 쏟고 있었다.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생리의 법칙을 거역하고 있지만 결국은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의장님. 이제 길어야 1분 30초 정도면 모든 일은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내려놓으시죠.”
“이! 이이이!”
“비밀은 유지해 드리겠습니다. 의장님께서 향후 저희 마탑에 잘 협조해 주신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가가야로는 나를 바라보며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사실 나라고 이 상황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이 경이적인 결계는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모든 냄새를 차단해 주겠지만, 내 비위까지 어찌해 주진 못하니까.
내게도 트라우마가 될 수 있으니 이제 슬슬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의장님.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 ……와 ……줘!”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
“말씀드린 대로 결계는 절대 못 깹니다. 그럼 혹시 뒤처리를 도와달라는 의미십니까?”
가가야로는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말을 쥐어짜 낼 여력도 거의 없을 것이다.
“야…… 약ㅅ……!”
“약속은 지켜 드리죠. 앞으로 협조만 잘해 주시면 됩니다.”
내 말을 들은 가가야로는 이제 모든 걸 체념한 듯이 눈을 감았다.
이제 곧 거사가 거행될 예정.
오늘 아주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
내가 비밀을 지키는 한 우리의 관계는 돈독하게 유지될 것이다.
* * *
다시 돌아온 레나의 마탑.
그곳엔 기대했던 얼굴들이 모두 있었다.
채이설, 서준호, 그리고 고용우까지.
내가 이 마탑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 역시 나에게로 온 것이다.
셋은 나를 만나자마자 가볍게 포옹을 해 왔다.
“다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아래층 소식이 궁금했는데 별일 없었나요?”
내 질문에 셋의 표정은 일시에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한 모양이다.
하나 같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용우야, 네가 한번 얘기해 볼래?”
이런 역할로는 고용우가 제격이다.
“……지은 누나가 죽었어요.”
녀석이 결국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역시나 우려했던 비보.
1층부터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동료 하나를 떠나보낸 것이다.
“서지은 씨가? 어떻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오두호의 일행이 우리를 공격해 왔어요. 지은 누나는 그때 놈들의 공격을 받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내가 오두호를 죽인 후, 그들의 세력은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층부터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지주가 사라지며, 그들은 실의에 빠졌고 절망했으며 괴로워했다.
오두호 없이는 항상 수동적이었던 그들이 이렇게 돌발행동을 했다는 건 뭔가 석연치 않다.
“그럼 오두호의 일행은?”
하지만 이어진 용우의 대답은 조금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오두호 일행은 갑자기 나타난 손서연에게 모두 죽었어요.”
“손서연이?”
“네. 그리고 손서연은 어디론가 다시 사라져 버렸어요.”
살성 손서연.
사실 따지고 보면 전혀 의외의 일은 아니다.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면 줄곧 PK를 해 왔으니까.
비록 이번에 선공을 한 건 오두호의 일행이지만, 그 반대가 되었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공략집은 내 의문의 일부분을 즉시 해결해 주었다.
[탑은 나태해진 플레이어들을 징벌하고자 13층에서 페널티를 적용하였습니다. 13층의 하위권 플레이어들에게 발생한 것은 데스 미션 퀘스트입니다. PK가 바로 생존 조건이었으며 적용받은 플레이어는…….]
‘역시 이런 일이 있었군!’
오두호 없는 오두호의 일행이 뜬금없이 PK를 시도한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었다.
[또한 데스 미션 퀘스트는 14층에서도 똑같이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유력한 대상은 손서연입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손서연이 데스 미션의 적용을 받는다면, 14층에는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 테니까.
심지어 손서연은 아직 14층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 것인지.
‘분명, 손서연이 자발적으로 페이스를 늦추고 있는 것일 텐데.’
살성 손서연이 실력이 부족한 이유로 뒤처졌을 리는 없다.
가장 시급한 것은 그녀가 빨리 14층으로 올라와 실적을 쌓게 만드는 것.
분명 탑은 나태해진 플레이어를 징벌한다고 했으니, 그녀의 진행도를 높이면 데스 미션의 발생을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레나의 마탑을 선택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플레이어 손서연이 14층에 도달하였습니다.]
“어?”
“손서연도 이제 13층을 끝냈나 보네요!”
타이밍 한번 절묘하다.
오랜만에 손서연 생각을 좀 해 봤더니, 이렇게 바로 13층을 클리어해 버릴 줄이야.
모두들 똑같은 메시지를 들었기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연 손서연도 이곳으로 올까요?”
“우리랑 딱히 친한 사람은 아니니까, 저는 왠지 다른 곳으로 갈 거 같아요.”
손서연은 그동안 혼자 다니는 것을 선호했으니, 다른 곳을 선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 동료들도 내심 그쪽을 바라고 있는 듯하고.
“호영이 형! 혹시라도 그년이 여기에 올지도 모르니까 마탑주한테 미리 부탁해 놓을까? 절대 받아 주지 말라고.”
“아니. 난 손서연이 보고 싶어. 아주 많이.”
“……형, 드디어 미쳤구나!”
지금의 부캐로는 텔레파시 스킬을 쓸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부디 레나의 마탑이 만남의 광장이 되어 주길 바랄 뿐이다.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마교 원정을 떠날 대원 모집 공고를 어제 막 했는데, 하루 만에 지원자가 대거 몰려들었다.
“호영이 형. 이게 말이 돼?”
말이 된다.
가가야로가 인근 마탑 전체에 협조 서신을 보냈으니까.
그것도 그냥 서신이 아니다.
이번 원정에 협조하지 않는 마탑에는 향후 불이익을 주겠다는 엄포를 놓은 것.
23구역에서 가가야로의 영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다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소속 용병을 적극적으로 차출해 주었다.
“세용아, 지원자가 너무 많은데 면접이라도 볼까?”
“나야 좋지.”
이 녀석은 면접관이 될 생각에 들떠 내 농담을 찐으로 받아들였다.
“너, 그런데 무슨 기준으로 뽑을 생각이냐?”
“어……. 그냥 관상으로?”
하여간 막무가내인 녀석.
사실, 이번 원정에서 원정대의 숫자는 많을수록 좋다.
라힌 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상대해야 하니까.
재력은 충분하니 용병 급여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형! 정말 다 데려가려고?”
“어, 사실 아직도 부족해.”
“부족하다고? 벌써 라힌 마을 때 인원은 훨씬 넘겼어. 다들 마탑 소속 용병이라 질적으로도 훨씬 낫고.”
“마, 내가 부족하다면 부족한 거야.”
이것은 비단 내 생각만이 아니다.
어제 도착한 공략집은 애당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를 제안했다.
[권장 인원은 800명 이상입니다.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십시오.]
그야말로 폭력적인 숫자.
공략집이 이유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분명 그럴 만하니 내게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받아 줘야겠군.’
오늘 같은 페이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안 될 거 같으면 가가야로 쪽을 한번 쥐어짜면 될 일이고.
그나저나 중요한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마교 원정 전까지의 비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13층에서 게으름을 피운 손서연을 데리고 갈 곳이 있다.
* * *
붉은 마녀의 숲.
칼리아의 23구역에 최근 발생한 상급 마굴.
이 소식에 인근의 모든 마탑들은 난리가 났었다.
“상급이 나왔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입장권은 우리가 따내야 해!”
칼리아 전역에 널린 게 마굴이라지만, 상급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급의 발생 확률은 1000개당 1개꼴이니까.
게다가 23구역은 상급 마굴의 불모지로, 이번 등장이 무려 23년 만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급 마굴에서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희귀한 아이템이 나오는 것이 보통.
“어차피 친 가가야로 쪽에서 입장권을 받아 갈 텐데, 그럼 대충 각이 좁혀지지 않나?”
하지만 결과는 사람들의 예측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자, 손서연.”
“뜬금없이 어딜 가자는 것이냐?”
“붉은 마녀를 잡으러.”
입장권을 따낸 것은 우리 레나의 마탑이었다.
가가야로를 찾아가 살짝 보챘더니, 그다음 날 바로 입찰이 결정되었다.
역시 인맥이란 좋은 것이다.
“설마, 너랑 나 단둘이서 가겠다는 것이냐?”
“어.”
손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다른 사람들은?”
“휴식. 다른 사람들은 너랑은 달라. 다들 14층까지 오느라 고생을 했거든.”
“나는 거저 왔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거저 왔는지는 모르지만 꼴찌로 온 것은 분명하니까.”
무엇보다도 손서연은 지금 탑에게 찍혀 있는 상태라는 것.
일단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살성의 능력을 가지고도 저조한 성적을 보이고 있으니, 조만간 그녀에게 페널티가 부과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페널티가 PK를 유발할 것이라는 점이다.
“너에게 끌려가는 모양새는 싫다.”
“그럼 니가 날 끌고 가든가.”
“그런 말장난은 됐고, 마굴에 들어가서는 내 마음대로 할 생각이다.”
“좋을 대로.”
그런데 손서연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좀 다르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눈빛은 그대로인데, 빠릿빠릿한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
13층을 꼴찌로 통과한 것도 그렇고,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다.
“요새 탑이 어렵냐?”
“뭐?”
“뭔가 버거워 보여서.”
“웃기지 마라.”
“그럼 증명해 보이든가. 이번 마굴에서.”
일단 도발을 해 놓았다.
그녀가 마굴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13층에서 오두호의 일행을 혼자 처리한 걸 보면 손서연의 능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사실 건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녀의 마법 속성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뇌전이니까.
게다가 살성은 탑의 총애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을 한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녀 역시 비약적으로 강해졌을 터.
그리고 이것은 마굴에서 바로 증명되었다.
콰콰쾅!
붉은 마녀의 숲에 벼락이 떨어지며, 불길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우리를 공격해 오던 식물형 몬스터들은 손서연의 뇌전 마법에 맥을 추지 못하였다.
예상한 바지만, 못 본 사이에 훨씬 더 강해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이런 능력으로 왜 꼴찌로 온 거냐?”
모두의 의문이었다.
손서연이 대답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할 게 좀 많았다.”
“생각? 뭔데?”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운이 좋다면 그녀의 마음을 읽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희들에겐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말하지 않겠다.”
그럴 줄 알았다.
우리는 서로를 동료로 인식하는 사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바로 들려온 그녀의 마음.
- 15층이 끝나면, 피의 날이 될 때까지는 이 녀석을 볼 수 없는 건가?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
이 녀석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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