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발레론은 현존하는 검종 12지파 중 하나의 리더.
그리고 오늘 뜻하지 않게 새로운 다른 지파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훨씬 더 크고 강한 곳이로군.’
발레론의 마음을 읽어 본 바에 따르면 일단은 그러했다.
사실 라힌 마을로의 원정은 굉장히 수월했던 편.
마교의 발호가 매번 칼리아에 피바람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돌이켜 본다면, 발레론이 이끌던 지파의 세력은 너무 미약했다.
공략집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원정대의 규모도 무리해서 크게 꾸리지 않았다.
‘이번엔 많이 달라지겠군.’
어쨌든 레나에게 이 사실을 전한다면, 분명 새로운 퀘스트가 생성될 것이다.
드래곤볼을 모으듯 12지파의 리더들을 모두 이곳에 모으면 어떨까 하는 망상도 해 보게 된다.
‘그나저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아직인가?’
메인 이벤트가 진행되려면 현재 생존 중인 모든 플레이어가 14층에 도달해야만 한다.
현재 이곳까지 온 플레이어는 단 네 명.
김세용이 네 번째로 14층에 온 지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사이 그 어떤 플레이어의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심지어 손서연 역시 이곳에 오고 있지 못하고 있으니, 도대체 아래층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더욱 궁금할 뿐이었다.
어쨌든 메인 이벤트까지는 시간이 좀 더 남은 듯하니 검종 쪽을 계속 공략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최종 퀘스트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생시키려면, 아직 사전 작업이 좀 더 필요하니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생각보다 성가신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
발레론은 내가 찾을 때마다 귀찮을 정도로 애원했다.
“부디 알려다오! 어떻게 하면 내 검술의 흠결을 고칠 수 있는지를.”
이 녀석이 순순히 포로가 되어 날 따라온 이유는 검술에 대한 향상심.
내가 펼친 수라마혈검에 발레론의 눈이 이미 돌아갔기 때문이다.
똑같이 검의 길을 걷는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공짜로는 안 된다.
“다시 물을게. 정말 본단의 위치는 안 밝힐 거야?”
“밝힐 수 없다.”
“뻔뻔한 놈.”
“검술이나 알려다오.”
징한 놈.
그래도 곁가지 정보 하나는 받았으니, 딱 그만큼은 베풀 생각이다.
“잘 봐. 딱 한 번만 보여 줄 거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빠루를 꺼내 들었다.
“그거 말고 검으로 좀 펼쳐다오.”
“포로 주제에 요구하는 것도 많네.”
“수라마혈검을 그런 연장으로 펼치는 것은 검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신성한 검술이었으면 잘 보존했어야지.”
하지만 결국 녀석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빠루 대신 인벤토리에서 다시 꺼낸 것은 엘리시온.
발레론이 이걸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엘리시온은 검종의 시조라고도 볼 수 있는 조셉 클로드의 애검이니까.
“그…… 그건!”
“왜?”
“그건 마스터의 검 아닌가!”
역시.
클로드 가문의 보검이었던 엘리시온은 이제 검종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마스터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내 거야.”
“아니. 그건 분명 마스터의 검. 엘리시온!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사람 말을 안 믿네.”
나는 발레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수라마혈검을 펼쳐 보였다.
아직은 높은 성취를 이루진 못하였으나, 발레론의 오류를 잡아 주기엔 좋은 교본이 될 거라 믿었다.
발레론은 넋을 놓은 채 나의 검술을 바라보았다.
- 아름답다!
사실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내 사부인 천마의 기준으론 여전히 쓰레기일 테니까.
발레론는 나의 검술을 모두 지켜본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내가 너를 스승으로 모셔도 되겠는가?”
어처구니가 없다.
“잊었어? 너 포로야, 포로.”
“배움에 그런 제약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동안 포로 대접이 너무 융숭했나 보다.
포로가 이렇게 팔자 좋은 소리를 하다니.
“방금 내가 보여 준 거나 잘 기억해서 수련이나 해. 당분간은 여기에 안 올지도 모르니까.”
“잔인하다!”
검에 대한 순수한 열망은 감명 깊을 정도다.
하긴 그런 것도 없었다면, 검종은 지난 오백 년간 명맥을 이어 오지 못했을 것이다.
* * *
레나는 여전히 마법 연구에 한창이었다.
A급 마령석을 대량으로 획득하였으니, 당분간은 실험 삼매경에 빠져 있을 공산이 컸다.
원하는 것이 다 갖춰져 있으니 그녀로선 딱히 용병들에게 바랄 것이 없다는 의미.
결국 퀘스트를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주체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발레론으로부터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퀘스트를 발생시킬 계획이다.
“어, 호영이 왔네?”
“네. 발레론 건으로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요.”
“이제 그놈 슬슬 죽이려고?”
“네?”
“뻔하잖아. 발레론이 마교에 대한 정보를 불었을 리도 없고, 너도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겠지. 그래서 죽이겠다는 거 아니야?”
“정보…… 알아냈는데요.”
“뭐?”
“칼리아에 존재하는 마교는 총 12지파. 그중 하나가 발레론 쪽이었고, 나머지 하나의 위치도 알아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정보 확실해?”
“아마도요? 새롭게 알아낸 곳은 카움 지방에 있는 라덴의 신전. 원정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너 뭐야. 그동안 마교 놈들이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그동안은 제가 없었으니까요.”
내 대답에 레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콘셉트를 좀 과하게 잡았나 싶긴 하다.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어쨌든 통했으면 그만.
결국 레나를 통해 퀘스트가 생성되었다.
“정보가 확실하다면 원정을 떠나도 좋아. 바퀴벌레 같은 마교 놈들은 박멸 대상이니까. 너도 같은 생각이지?”
“……뭐, 그렇죠.”
“검 쓰는 놈들은 전부 다 검으로 목을 따 버려야 해! 역시 같은 생각이지?”
갑자기 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든다.
레나는 마교 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흥분을 하는 게 문제.
“그건 좀 말씀이…….”
“왜? 지나치다고?”
“마탑주님처럼 우아하신 분에게 그런 과격한 발언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 말에 레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우아하다는 멘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알겠어. 조심할게. 어쨌든 이번 원정도 잘 부탁해.”
[라덴의 신전에 존재하는 마교의 잔당을 궤멸시키십시오.]
궤멸.
퀘스트의 성공 조건이 좀 과격하니, 우아하게 바꿔 줄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마탑주님. 이번 발레론 건으로 접근 방식을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이번에 떠나게 될 원정도 결국 마교의 본단이 아닌 일부 꼬리일 뿐. 이 녀석들을 통해 본단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마교의 뿌리를 뽑기 위해선 결국 본단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투자자 형님께서도…….”
“알겠어. 무슨 말인지. 이번에도 포로를 잡아 오겠다는 거 아니야.”
“네.”
[퀘스트의 성공 조건이 추가되었습니다.]
[마교의 잔당을 포로로 잡아 오십시오.]
레나를 한번 길들여 놓으니, 일사천리로 조건 수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형식적이긴 한데, 마탑 연합 쪽에 보고는 해야 해. 호영이 네가 다녀올래?”
“네. 바로 다녀올게요.”
“바로? 급하기도 해라.”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것이라고, 굳이 지체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레나의 연구실을 떠나려는 순간 오랜만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플레이어 채이설이 14층에 도달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서준호가 14층에 도달하였습니다.]
[플레이어 고용우가 14층에 도달하였습니다.]
한꺼번에 세 명이나?
아무래도 이들은 연합 퀘스트를 수행한 모양이다.
아마 이 셋도 내가 레나의 마탑에 있다는 정보를 보았을 테니, 여기로 올 공산이 크다.
“아참, 마탑주님. 마탑에 용병 지원자가 곧 올 거 같은데, 크게 하자 없으면 받아 주세요.”
“또? 혹시 이번에도 T의 추천서를 받은 아이야?”
“네. 그런데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셋입니다.”
본의 아니게 레나의 마탑은 우리 플레이어들의 집결지가 될 예정이었다.
* * *
가가야로. 칼리아 23구역 마탑 연합 의장.
그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 고상한 척을 하지만 그냥 꼰대일 뿐이다.
항상 연합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대의를 내세우지만 결국 본인이 만든 카르텔을 공고히 하기 위함.
자신을 위협할 만한 후발 주자들의 성장은 결코 용납하는 일이 없다고도 들었다.
‘레나가 마탑을 세우고 초반에 고생을 한 것도…….’
뿐만이 아니다.
결과론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마교의 한 지파를 토벌하기 위해 우리 마탑을 추천한 것도 그 숨은 의도가 너무 더러웠다.
‘내가 원정에서 죽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르지.’
레나의 마탑은 나와 최정혁의 활약으로 막 떠오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가가야로의 마탑을 방문하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마교와 관련된 사안이니 형식적인 보고를 위해 만나는 것일 뿐.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서 오게! 온다고 미리 연락을 주었더라면 손님 맞을 준비를 제대로 했을 터인데!”
도무지 적응 안 되는 시추에이션.
혹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제가 의장님을 찾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두 번째 마교 원정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교 토벌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찌 되었든 연합 의장의 승인이 필요하니까.
물론 가가야로도 레나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믿을 수 없군. 그걸 순순히 실토했다고?”
“순순히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마교 놈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막상 원정을 가 봐도 헛물을 켤 수도 있다네.”
“만약 그렇다 해도 그건 저희가 감수해야겠죠.”
“알겠네. 원정대의 모집과 마교 토벌을 승인하도록 하지.”
생각보다 쉽게 승인을 받아 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룰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내 마탑을 친히 방문했는데 벌써 가려고? 앉아서 차 한잔이나 하고 가게.”
가가야로가 내가 바로 일어서려는 것을 만류하였기에 할 수 없이 좀 더 자리를 지켰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가가야로는 그 의도를 드러낸 것은 차 한 잔을 거의 다 마셨을 무렵.
“자네, 레나의 마탑은 만족스러운가?”
“네. 만족합니다.”
“아마 내 마탑에 들어온다면 더 만족하게 될 거라네.”
“그게 무슨.”
“말 그대로라네. 레나의 마탑은 큰 인재를 담아 두기엔 너무 작은 곳이야. 그리고 라힌 마을에서 자네의 활약상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네. 내가 이번 원정에 레나의 마탑을 추천했던 것도 자네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지. 내가 사람 보는 눈은 누구보다도 좋다고 자부하거든.”
가가야로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우리 마탑으로 오게. 지금 받는 급여의 10배를 보장하도록 하지.”
“돈이 많으신가 봅니다? 저 같은 신입 용병에게 그런 제안을 하시다니.”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해두지. 아마도 자네는 그 이상으로 성장할 거 같으니까.”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돈보다는 마탑주의 역량을 보고 움직이는 주의라서 말입니다.”
내 말에 가가야로의 표정은 잠시 일그러지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설마 그 말은 내가 레나보다 못하다는 의미인가?”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명백한 사실이니까.
“제가 아직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군. 사실 레나 마탑주는 아직 마법 연구에 있어서 이렇다 할 성과도 없지 않은가!”
나는 인벤토리에서 레나가 만든 케레스의 쉘터를 꺼냈다.
“있습니다. 지속 시간이 5분인 무적의 결계죠. 최근 레나 마탑주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럼 내가 만든 퍼펙트 스피어로 그 결계를 5분 안에 깰 수 있다면?”
허세인지 근거 부족한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깰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럼 레나의 마탑에서 나오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약속드리죠. 하지만 그 정도 자신감을 가지셨다면, 제가 의장님 몸에 살짝 변화를 주어도 되겠습니까?”
“도대체 뭘 하려고!”
나는 가가야로에게 다가갔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혈도 몇 군데를 살짝 건드려 주었다.
장운동이 아주 활발해지도록.
물론 사부로부터 배운 것이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저에게 좀 재미난 재주가 있어서 말입니다. 퍼펙스 스피어부터 빨리 찾으시죠. 5분 안에 결계에서 탈출하셔야 할 겁니다.”
나는 가가야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오늘 재미난 구경거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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