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보는 탑 공략집-114화 (114/292)

114화

“호영이 형! 안개가 전부 걷히고 있어!”

김세용이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비단 안개뿐만이 아니다.

우리를 현혹하고 있던 천지의 온갖 환영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 간다.

이곳에 펼쳐져 있던 기문진이 완전하게 해제된 것이다.

- ……저놈. 누구지?

멀리서 발레론이 의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혹이나 당황 등의 감정은 전혀 아니었다.

기문진 없이 맞붙어도 우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어쨌든 나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이 혈마의 술법은 기문진의 문외한이 결코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풀리더라도 이렇게 허망한 방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저놈, 마치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일사천리로 기문진을 뚫어 버렸어!

발레론의 복잡한 마음이 내게 전해졌다.

그리고는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 그렇다면 가장 큰 가능성은…….

- 어쩌면 우리 쪽 사람일지도!

이건 의외의 소득.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챙!

챙!

챙!

챙!

기문진을 완전히 빠져나온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십 개의 검이 동시에 뽑혀 나왔다.

칼리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검의 소유는 수백 년간 금지되어 온 것이니까.

우리 원정대원들 역시 이에 대응하며, 마법 캐스팅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빠루를 들고 우리 원정대의 가장 앞으로 나아갔다.

“호영이 형! 이런 상황에서 저놈들을 포로로 잡는 것이 가능할까?”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은 두 가지.

몰살시키거나, 포로로 잡거나.

포로는 한 명이면 족하다.

이 구역을 관리하고 있으며 마교의 수뇌부와도 직통으로 연결되는 인물.

두말할 것 없이 발레론이다.

“일단 나한테 맡겨.”

발레론과 단둘이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지금으로선 그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 우선.

나는 저들을 향해 외쳤다.

“우선 리더끼리 이야기 좀 하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먹힐 제안이 아니다.

저들 검투사들에게 있어서 우리 마법사들은 수백 년의 원수.

공격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우릴 찍어 죽일 기세로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날 바라보는 발레론의 눈빛은 좀 다르다.

‘무턱대고 싸우기엔 꺼림칙하겠지!’

내 예상대로였다.

발레론은 주위를 무르고는 뚜벅뚜벅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 장검.

단독으로 거침없이 내려오다니 놀라운 자신감이다.

이제는 내가 발레론을 마중 나가 해결하는 일만 남았다.

“야, 이호영. 그런데 니가 리더야?”

최정혁이 날 잡아 세웠다.

상황이 이러해도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 이 상황에서 니가 나가려고?”

“아니. 가는 건 대화를 제안한 놈이 가야지.”

“결국, 내가 리더라는 발언이 불편하다는 건가?”

“빙고.”

하여간 이놈도 정상은 아니다.

“알겠어. 그럼 니가 대장 해. 됐지?”

“어!”

최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쿨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지금 이 녀석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

- 어떻게든 만회해야 해!

나는 발레론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 둘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져 갔고, 모두가 숨을 죽이며 우리를 지켜보았다.

어느덧 그와의 거리는 대략 열 걸음.

서로의 묵시적 합의하에 마지노선이 만들어지며 우리는 멈춰 섰다.

“혹시 너는 우리 검종의 인물인 것이냐?”

이들은 스스로를 검종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런 건 몰라. 난 마탑에서 왔으니까.”

“혹시 주변의 듣는 귀를 의식하는 건가?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 쪽 사람들은 걱정할 것 없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양인데, 난 마탑에서 왔어. 너희 검종에서 마탑에 심어 놓은 세작이 아니란 뜻이지.”

내 말에 발레론의 표정이 굳어 간다.

“다시 묻겠다. 그럼 리더끼리 이야기하자고 제안한 이유는?”

- 이 녀석, 무슨 생각이지? 분명 본단에서 왔을 터인데!

여전히 발레론은 내가 검종 쪽 사람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나 이 상황을 잘 이용할 필요가 있다.

녀석이 계속해서 의문을 품는다면 내게 유리한 상황도 만들어질 테니까.

“그 이유는 말이야, 이걸 하려고.”

나는 레나가 최근 발명한 [케레스의 쉘터]를 꺼냈다.

본래는 궁극의 방어 아이템.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용도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파악!

나는 지체 없이 캡슐을 내 손에서 터뜨렸다.

순간 나와 발레론을 감싸는 반투명한 결계가 형성되었다.

이제 완벽한 우리 둘만의 공간이 된 것.

화들짝 놀란 검종의 무리들은 바로 결계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것은 우리 원정대 역시 마찬가지.

사전에 예고된 일이 아니었기에 당황한 것은 양쪽 모두였다.

“이게 무슨 짓이지?”

“모두가 보는 데서 깔끔하게 단판 승부를 가리자고.”

“너와 나 단둘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밖에서는 결계를 해제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검종의 검투사들이 결계 위에 검기를 폭발시키고 있는 것.

물론 무의미한 짓이다.

이 결계는 레나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희대의 역작이니까.

“그럼, 바로 시작할까?”

나는 빠루를 치켜들었다.

“이상한 녀석이군. 마탑에서 왔다면서 마법으로 상대를 하지 않고.”

- 역시 본단에서 온 녀석이 확실하다.

물론 대결이 시작되면 녀석의 확신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수라마혈검을 준비했다.

기대가 된다.

지난 오백 년간 혈마의 수라마혈검은 어떤 식으로 보존되었는지.

이제 곧 그 베일을 한 꺼풀 벗겨 낼 수 있을 것이다.

* * *

레나의 마탑.

건물 앞에는 짐을 가득 실은 화물 마차 스무 대가 정렬했다.

레나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이 드디어 도착한 순간이니까.

“물건부터 확인해 보시죠. 마탑주님.”

마차를 호송해 온 책임자가 레나를 짐칸으로 안내했다.

총총거리며 뒤따르는 그녀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

레나는 뿌연 먼지가 일렁이는 짐칸으로 뛰어올랐다.

지금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은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다.

관건은 지금 배송된 상품의 품질이 그녀가 기대한 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

그녀는 짐칸에 실린 광석들을 하나하나 들춰 보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대략 한 시간.

그녀가 꼼꼼하게 상품 점검을 모두 마치는 데 소요된 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좀 깐깐한 성격이라.”

“아닙니다. 마탑주님. 이제 점검은 다 끝나신 것입니까?”

“네. 전부 최고 등급의 A급 마령석이 맞네요. 합의된 대로 전량 거래할게요. 마탑 안으로 옮겨 주세요.”

레나가 드레스를 탁탁 털자 매캐한 먼지들이 풀풀 털려 나간다.

그러기에 왜 이런 날 옷을 차려입고 나와서.

나는 레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겠네요? 마탑주님.”

“어, 나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나는 레나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 주었다.

거액의 2차 투자금으로 레나는 본인이 오랜 세월 꿈으로만 그려 왔던 숙원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 것.

레나의 실력은 이미 확인되었으니, 분명 상당한 성과를 내놓을 것이다.

“분명, 마탑주님은 잘 해낼 겁니다.”

앞으로도 내가 원하는 퀘스트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말이다.

“호영이 네가 마탑에 오고 나서 많은 게 바뀌었어.”

“더 많은 게 바뀔 겁니다.”

“……소오름!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나 완전히 믿어 버렸잖아!”

그러면서 레나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심장은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나는 레나를 살짝 떼어 놓으며 말했다.

“저, 잠깐 발레론에게 가 볼게요.”

“오늘도?”

“입을 안 여니까 별수 있나요? 매일 가서 고문이라도 해야지.”

“내가 말했잖아. 마교 놈들은 지독하다고.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야. 괜히 힘 빼지 말고 확 죽여.”

레나는 마교 이야기만 나오면 성격이 돌변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뭐야! 네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니깐 또 믿어 버릴 거 같잖아!”

“믿으세요.”

레나는 이제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다.

라힌 마을로 떠났던 지난 원정.

그것은 이미 칼리아의 전설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슬슬 발레론이 입을 열어 주면 좋겠는데.

* * *

발레론은 레나의 마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건물에 유폐해 놓았다.

사실 말이 유폐이지, 포로라고 하기엔 이 녀석은 꽤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삼시 세끼 모두 특식을 넣어 주었으며, 꽤 널찍한 공간에 움직임의 자유도 부여해 주었다.

지금도 아마 팔자 좋게 수련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끼익-

나는 마법으로 봉쇄된 지하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발레론은 검술 연습에 한창이었다.

솨솨 솨아악!

솨아아악!

그가 휘두른 검은 연무장의 내벽에 수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동안 얼마나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지금 발레론이 펼치고 있는 검술은 삼 주 전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발전했다.

지난 오백 년간 수라마혈검이 전승되는 과정 속에 소실된 구결이 있었고, 나는 발레론에게 그 부분을 짚어 주었다.

물론 전부 다 알려 준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애간장을 녹일 필요가 있으니까.

“틀렸어. 발레론.”

그의 검술은 유려하긴 하나 몇 가지 오류가 있었다.

크게 거슬릴 정도의 버벅거림은 없지만, 티끌 수준의 결함도 결국은 결함이다.

“제발 말해다오!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를!”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하는 게 우선이야. 기브 앤 테이크 몰라? 넌 지금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잖아.”

“하지만 네가 묻는 것은 내가 절대 답을 해 줄 수 없는 것들이다.”

필요 이상으로 고지식한 놈.

정말 강적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발레론이 마음속으로라도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주는 것.

하지만 이놈에게선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 이 녀석은 정말로 본단에서 온 것이 아닌가?

- 그렇다면 어떻게 수라마혈검을 이토록 자세하게…….

마음속 생각은, 내게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이 고작.

“그래서 오늘도 입을 꾹 다무시겠다?”

“어쩔 수 없다.”

물론 시간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언젠간 이놈도 생각이란 걸 할 테고,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을 날이 있을 것이다.

내게 남는 것은 시간이니 말이다.

오늘은 좀 진득하게 기다려 봐야겠다.

“이봐 발레론, 이럴 줄 알았으면 너 말고도 전부 다 여기로 잡아 올 걸 그랬어. 내가 괜히 보내 줬나? 그건 어떻게 생각해?”

“그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우리 검종은 결코 배신을 하는 법이 없으니까.”

- 지금쯤 다들 본단에 잘 도착했을지 모르겠군. 부디 이 상황을 잘 전달해야 할 텐데!

- 그게 아니면, 우리 구역과 가장 가까운 곳인…….

어?

오늘, 이렇게 쉽게?

드디어 기다리던 정보 하나가 접수되는 순간이었다.

- 115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