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구역장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방금 구역장이라 불린 남자.
대장장이 발레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여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구역장님?”
그는 마치 귀머거리인 양 하고 있던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치이이익-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담금질 소리가 대장간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가 펄펄 끓는 기름에서 꺼내 올린 것은 길고 가느다란 날붙이였다.
폭이 좁고 한쪽 면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의심할 여지 없는 검이었다.
발레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성공이군. 내가 이 녀석을 만나기 위해 몇십 자루나 날려 먹었는지 알고 있나?”
그제야 발레론은 본인을 찾아온 남자를 향해 등을 돌렸다.
“제가 온 건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그나저나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군. 자네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걸 보니 말이야.”
“……정말 그게 들리십니까?”
“못 믿겠으면 말고. 어쨌든 급한 일 같으니 무슨 일인지 보고나 해 보게.”
“네. 우리의 위치가 마탑 놈들에게 노출된 것이 확실해진 것 같습니다.”
“근거는?”
“수상한 무리가 이곳 라힌 마을을 찾아 왔습니다. 겉으로는 탐험가로 위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마법사들인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이라…….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들이닥쳤군. 숫자는?”
“대략 서른 명입니다.”
발레론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보고하는 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급히 달려온 것과 사뭇 대조된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를 치러 왔다고 하기엔 너무 적은 숫자로군. 겁쟁이 마법사 놈들치곤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선발대일지도 모릅니다. 배후에는 훨씬 더 많은 병력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걱정 안 되십니까?”
“어차피 조만간 라힌 마을을 뜰 생각이었어. 그동안 한곳에 너무 오래 정착해 있었거든.”
“뜰 때 뜨더라도 감히 우리를 찾은 마법사 녀석들을 가만둘 수는 없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대장간 주변에 바로 기문진을 설치를 시작하게.”
“네, 구역장님.”
보고를 마친 남자는 바로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치이이익-
다시 또 시작된 담금질 작업.
발레론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마탑 놈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들이닥칠지도 모르겠다고.
“때가 가까워 오고 있어. 마스터께서 말씀하신 그 날이.”
발레론은 혼자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대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우리 원정대원은 총 삼십여 명.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숫자도 아니다.
더욱이 떼거리로 마을을 휘젓고 다니고 있으니 마을 주민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어쩌면 그들이 눈치챘을지도 모르겠군.’
라힌 마을은 칼리아의 극지에 있어 탐험가들의 방문이 이상한 일은 아니나, 우리들의 모습이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진짜 탐험가가 아니니까.
“최정혁, 마을을 한 바퀴 쭉 둘러본 소감은?”
녀석의 감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봐도 특이할 거 하나 없는 평범한 마을이야. 한 바퀴 다 둘러봤어도 수상한 점은 없었잖아?”
“그래서 이 먼 곳까지 헛걸음한 것 같다는 의미야?”
“아니. 너무 자연스러우니까 그게 더 수상해.”
“이상한 논리로군.”
“그냥 느낌적 느낌이야. 프로 게이머로서의 감이라고나 할까? 확실히 이곳 라힌 마을엔 뭔가가 있어.”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녀석의 감은 좋은 편인 게 확실하다.
“그럼 하나 더 묻지. 이 마을에 마교의 잔당이 정말 존재한다면 본거지는 어디라고 생각해?”
여기까지 맞히면 정말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뻔하잖아. 대장간밖에 더 있겠어?”
대박.
소름이 돋았다.
“근거는?”
“대장간은 은밀하게 검을 주조해서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니까. 다른 지역과 교역을 담당하는 보부상들도 족쳐 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지.”
놀랍다.
공략집을 들고 있는 나에게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백지상태에서 바로 정답을 추론하다니.
그것도 마을 한 바퀴 둘러본 것만으로.
“나 역시 같은 생각이야. 최정혁.”
“내 의견에 묻어 가려는 건 아니고?”
이런 면은 밥맛이긴 하지만, 일단은 넘어가야겠다.
“호영이 형! 내 의견은 안 물어봐?”
김세용.
미안하긴 하지만 녀석의 생각은 전혀 궁금하지 않다.
보나 마나 영양가 없는 의견일 테니.
“의견 있어?”
“밥부터 먹는 게 어때? 점심때도 다가오는데.”
“밥은 일부터 끝내고 나서.”
“쳇!”
“오래 안 걸릴 거야.”
마을도 한번 둘러봤으니, 이제부터는 속전속결.
녀석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줄 이유는 없다.
* * *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발레론의 대장간.
야산을 등지고 있으며, 그걸 넘어가면 바로 거대한 강으로 이어진다.
은밀한 일을 꾸미기엔 라힌 마을에서 최적의 장소.
대원들은 밖에 잠시 머물게 한 뒤, 나와 최정혁 둘만 안으로 들어갔다.
대장간 안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도 작업이 한창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우리를 맞이한 자.
이 구역의 지도자인 발레론이 아닐까 싶었지만, 결국은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느껴지는 기감이 한 구역의 지도자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해 보였으니까.
“우리는 먼 곳에서 온 탐험가들입니다. 산행에 필요한 연장을 좀 구하러 왔습니다만…….”
남자는 내 말을 듣고는 눈을 부라렸다.
경계심 가득한 저 눈빛.
어쩌면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얼마나 필요하시오?”
“이곳은 처음이라, 주인장께서 추천 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확실해. 마탑 놈들이군.
역시.
혈마의 후예답게 상대의 기감을 느끼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가 이미 발각되어 있다는 건 그에 대한 대비되어 있다는 의미.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창고에 가서 쓸 만한 것들을 찾아올 터이니.”
대장간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바로 뒷문으로 떠났다.
문이 닫히자 최정혁이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방금 전 그 녀석. 눈빛이 좀 수상하지 않았어?”
이 녀석이 신기라도 들렀나, 아까부터 감이 장난이 아니다.
“어. 잘 봤어. 아주 수상했지.”
“일단 여기서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 정말로 그 녀석이 마교의 일당이라면 나머지 놈들을 부르러 갔을지도 모르잖아.”
이 부분은 잘못 짚었다.
하긴, 감이 좋다고 해서 다 맞힐 수 있는 건 아니다.
“녀석은 다시 여기로 오지 않을 거야.”
“왜?”
“도망쳤거든.”
내 말에 최정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너보단 감이 좋으니까.”
아마도 저 뒷문을 여는 순간 우리 눈앞에는 환상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혈마의 기문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혈마의 후예들은 우리가 기문진 속에서 아등바등하는 것을 지켜본 후 우리가 절망에 빠졌을 무렵에야 목줄을 죄러 올 공산이 크다.
“밖에 나가서 대원들 전부 다 불러와. 이제 본 게임이 시작됐어.”
“이호영, 너 지금 좀 이상해. 무슨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처럼…….”
“그럼 네가 먼저 출발하든가. 내가 사람들을 데리고 뒤따라갈 테니.”
기문진 내에서는 결코 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최정혁.
* * *
“뭐지?”
“이거 설마 환영 마법?”
미리 살짝 경고를 주긴 했지만, 대원들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뿌연 안개가 가득했고,
하늘에선 쉴 새 없이 낙뢰가 내리쳤다.
칼리아가 아무리 마법의 대륙이라 해도 무림의 기문진만큼은 절대 흉내 내지 못한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얼마 걸어오지 않았으니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우리 배후의 생문(生門)은 이미 닫혀 있다.
일단 기문진 내에 들어온 순간 일반적인 물리적 상식은 통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침착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것.
정신을 차리고만 있으면 생존의 확률은 훨씬 더 올라간다.
어찌 되었든, 이 기문진 내 어딘가에는 생문(生門)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다들 겁먹지 말고 따라와. 괜히 개인행동을 했다가는 정말로 골로 가는 수가 있어.”
나는 기문진에 당황한 대원들을 다그쳤다.
“호영이 형! 이번에도 믿어도 되는 거 맞아? 형은 그냥 힘법사라면서!”
이런 상황에선 김세용이라 해도 별수 없다.
기문진을 처음 접한다면 능력치와 상관없이 당황하는 것이 당연한 일.
“왜? 내가 힘법사라니까 마냥 무식해 보이기만 하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런 환영 마법은 형도 처음일 테니!”
처음이라니.
이미 13층 카일의 협곡에서 똑같은 기문진을 해제해 본 적이 있으며 심지어 다시 복구도 해 놓았다.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다는 의미.
휘이이이잉!
전방에선 모래폭풍이 휘날린다.
카일의 협곡에서는 본 적 없는 생소한 현상.
그렇다면 저 모래폭풍의 가능성은 단 하나.
구조 신호다.
“최정혁이군.”
큰소리치더니, 녀석이라고 별수는 없다.
모래폭풍이 점점 거세지며 하늘 높이 올라가는 걸 보니 최정혁도 겁을 먹기는 한 모양이다.
녀석으로선 본의 아니게 염동력을 연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위급한 상황에선 능력 이상의 힘이 발휘되니 말이다.
“뭐 하냐. 최정혁.”
최정혁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하늘을 향해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최정혁!”
결국 녀석의 코앞에 빠루를 가져다 대고 나서야 최정혁은 정신을 차렸다.
살짝 움찔.
그리고는 바로 태연 모드였다.
“어. 왔냐?”
어이가 없다.
어 왔냐라니.
“이호영! 네 말이 맞았다는 건 인정해 주지. 결국 이런 걸 만들어 놓고 도망친 거였어.”
역시 쿨한 척 대인배 코스프레하는 것은 이 녀석의 특기다.
그래도 크게 밉지 않다는 건 이 녀석 나름대로의 능력.
“가자. 따라와.”
“어.”
그래도 군말 없이 졸졸 따라오는 걸 보니, 기가 많이 죽은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본인이 앞장섰을 텐데.
나는 전방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겠지만, 혈마의 후예들은 지금 야산 지대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쉽사리 발을 뗄 수 없다.
나의 존재가 신경 쓰일 테니까.
스르르.
스르르르.
우리는 조금씩 기문진을 해제해 나가며 생문 쪽을 향해 나아갔다.
“와아! 안개가 점점 옅어지고 있어!”
“이런 환영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또 그걸 가볍게 깨 버리다니!”
대원들의 사기는 다시 드높아지고 있었다.
최정혁은 그저 태연한 척 무표정을 지으며 내 지시를 따랐다.
“최정혁! 거기 나무 기둥 사이에 있는 것들 좀 치워 봐.”
“어!”
조금은 기대가 된다.
이곳의 지도자 발레론.
분명 평범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마교는 발호 때마다 칼리아 대륙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으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공포의 집단.
하나의 구역을 관리할 정도라면, 과거 내가 만났던 조셉 클루드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파아아악!
내가 휘두른 빠루에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며, 안개는 조금씩 걷혀 가기 시작했다.
파아아악!
[기문진이 해제되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수십의 시선이 느껴진다.
팔짱을 낀 채 우리를 지켜보는 눈동자들.
그중 한가운데.
유난히 튀는 한 인물이 있다.
아마도 녀석이 발레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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