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레나의 마탑 쪽에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누군가 했는데 붉은사막 마탑주 게르헨이었다.
말로는 기회라고 표현했지만, 그 의도는 뻔하다.
“신생 마탑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의장님. 신생이기에 성장의 기회를 주어야지요. 보아하니 여기 새로 온 용병도 보통은 아닌 것 같고.”
게르헨이 우리 쪽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저 여우 같은 노인네.
신고식에서 당한 것을 이런 식으로 돌려주다니.
회의장 여기저기에서 마음의 목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한다.
- 천잰데?!
게르헨의 발언은 도화선이 되었다.
침묵하던 마탑주들이 그와 같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
“동의합니다!”
“저도 신생일수록 더 기회를 주는 게 옳다고 봅니다!”
여론은 순식간에 조성되었다.
혹시라도 레나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다른 마탑주들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기는 일이니까.
조셉 클로드의 후예이자 혈마의 후예인 이들이 수백 년간 명맥을 이어 왔다면, 그들의 전력은 보통일 리가 없다.
‘매번 피바람이라고 했었지.’
칼리아의 역사서는 500년간 이어진 마교의 발호를 항상 그렇게 묘사해 왔다.
그들은 아마 악으로 깡으로 똘똘 뭉쳐 있을 것이다.
수백 년간 마법사들로부터 받아온 핍박과 탄압은 내부적으로 그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의견들이 그러시다면, 이쯤에서 레나 마탑주의 의견을 들어 보지 않을 수 없을 거 같습니다만.”
의장인 가가야로가 처음으로 레나에게 발언권을 주는 순간이었다.
레나는 평소의 버릇대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침묵.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 따윈 개의치 않았다.
“이보세요! 레나 마탑주?”
가가야로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저 귀 안 먹었어요.”
그제야 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저런 고얀!
지금 가가야로의 표정이 볼만했다.
화난 것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데 콧구멍에서는 마치 심술이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마탑 하나는 잘 골랐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된다.
“다시 한번 묻겠소. 레나 마탑주 당신의 생각은?”
“……개자식!”
“뭐? 뭐라고 했소?”
레나의 말에 나조차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가야로를 비롯한 다른 마탑주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지금 개자식이라고 했소?”
“네. 개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마교 놈들 말입니다. 때려죽여야 할 놈들이지요.”
레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물론 중의적인 표현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마탑주들은 다들 한 대 얻어맞은 표정.
나는 그제야 한숨 돌리고 잡고 있던 각을 풀었다.
‘우리 마탑주. 보통은 아니네.’
가가야로는 헛기침을 하며 재차 레나에게 물었다.
“마교에 대한 적개심은 잘 들었고,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요?”
사실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신생 마탑에 단독으로 이런 임무를 부여한다는 것은 결국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일.
레나가 거절한다면, 이들은 또 다른 대안을 찾아낼 것이다.
보아하니 이 겁쟁이들이 위험을 떠안을 거 같지는 않으니까.
레나는 지금 고민이었다.
마교에 대한 레나의 적개심은 분명한 사실.
우리 마탑의 전력이 일정 수준만 되었더라면 그녀는 참전을 바로 결정했을 것이다.
- 보유 용병이 너무 적은 게 문제야. 원정대원을 모집을 한다고 해도…….
-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어!
결국 뜻을 정한 레나.
그녀가 마냥 기분파인 것만은 아니다.
냉철한 판단이며, 마탑주라면 응당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괜히 혈기 넘치게 참전을 결정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테니까.
물론 내가 없었다면 말이다.
이제는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저희 마탑주께서는 참전하신답니다! 그렇죠. 마탑주님?”
결국 내가 벌떡 일어났다.
레나는 나를 보며 영혼 가출한 표정을 짓는다.
- 이 새끼가…… 미쳤나?
뜬금포를 넘어 무례한 행동.
내 신분은 어디까지나 용병이다.
마탑주님들 말씀하시는 데 낄 수 있는 군번은 아니라는 의미.
하지만, 이런 나의 행동을 문제 삼는 마탑주는 아무도 없었다.
“역시 레나의 마탑에서는 그렇게 나올 줄 알았소!”
“아주 패기 넘치는 용병을 두셨군그래!”
오히려 사람들은 나를 두둔하고 나섰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레나는 그저 헛웃음만 지었다.
“자! 이제 그럼 레나 마탑주의 공식 선언만이 남았소.”
가가야로의 표정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일보 직전의 느낌이다.
* * *
“좋냐? 나 빼고 혼자만 다녀오니까?”
최정혁.
삐친 척을 가장한 저 쿨한 말투.
하지만 쿨한 말투조차 연출이다.
실제로 삐친 것이 맞다.
“어, 출세한 기분도 들고 좋던데?”
“야, 쓸데없이 몰입 좀 하지 마. 어쨌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 봐.”
최정혁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은 레나였다.
“우리 막내가 사고를 좀 쳤어.”
“사고요?”
그나저나 나를 막내라고 표현하다니.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최정혁은 말할 것도 없고, 레나도 민증을 까 보면 나보다 동생일지도 모르는데.
“호영이, 니가 직접 얘기해 봐.”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
나는 최정혁에게 연합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최정혁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간다.
이놈이라면 분명 그럴 줄 알았다.
“사고 친 거 맞네. 기특한 자식.”
최정혁의 반응에 레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 내가 진짜 못 산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레나에겐 미안하지만 우린 퀘스트를 깨러 온 플레이어들.
용병 생활로 돈을 벌려는 것도, 출세를 위해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라힌 마을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마교의 잔당을 토벌하십시오.]
‘결국 틀린 정보는 아니었군.’
공략집에 따르면, 마교와의 조우는 14층의 대미.
이렇게 이른 시점에 등장할 퀘스트는 아니다.
‘그렇다면, 라힌 마을의 잔당은 마교의 극히 일부라는 의미겠지.’
어쨌든 이번 퀘스트를 놓고 나와 최정혁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다.
나는 마교로 취급받는 검투사들을 구하기 위해서, 최정혁은 어려운 난제를 해결하며 다시 나를 넘어서기 위해서 이 퀘스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저 퀘스트의 문장을 조금 부드럽게 바꿔 놓을 필요가 있었다.
14층에서 내가 받게 될 퀘스트는 전적으로 레나에게 달린 일.
이제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아직 출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차차 고민을 좀 해 봐야겠다.
“그런데 이호영. 너 어떻게 된 거야? 회의에만 다녀온 거 아니었어?”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지는 알고 있다.
나의 퀘스트 진행률이 회의 중에 올라간 걸 의아해하는 것이다.
“내가 회의장에서 빠루를 쓸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미친!!”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 씨X! 부러워!
역시 부러워할 줄 알았다.
이 구역의 진짜 미친놈은 최정혁. 판만 깔아 주면 제대로 미친 짓을 할 놈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걸 들고 설칠 일이 뭐가 있다고!”
이미 넌 졌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 * *
[플레이어 김세용이 14층에 도착하였습니다.]
김세용의 소식이 들려온 것은 회의에 다녀온 열흘 뒤의 일이었다.
순서로는 나 다음인 네 번째.
녀석도 페이스가 생각보다 빨랐다.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지금쯤 구름 위에서 마탑 고르기에 들어갔겠군.’
이변이 없는 한 녀석은 레나의 마탑을 선택할 것이다.
마탑 선택 시엔 타 플레이어의 현재 소속을 볼 수 있으니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바로 알게 되었을 터.
아마 다른 선택지는 고려하지도 않을 것이다.
“최정혁, 너도 방금 메시지 봤지?”
“어. 니 똘마니가 지금 막 14층에 왔다는.”
“신입 받을 준비나 해.”
김세용은 언제 어디서나 유용한 자원.
마교 원정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믿을 만한 인재 하나가 더욱더 아쉽기만 했는데, 마침 녀석의 소식이 반가웠다.
“그런데 그 건달 같은 녀석이 정말로 여기로 올까?”
“어. 올 거야. 아마 10초 안으로.”
“허세하고는! 열 센다?”
“왔네.”
바로 우리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김세용.
“헐! 쟤 뭐냐? 이렇게 단번에 마탑 선택을 끝냈다고?”
“단순한 놈이니까.”
구슬 속에 비친 김세용은 마탑에 들어와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마탑주보다 나를 먼저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나가 먼저 녀석을 맞이했다.
그녀는 김세용이 가져온 T의 추천서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당신도 이호영과 같은 곳에서 온 건가요?”
그런데 레나의 말투가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뭐, 그렇소! 아주 각별한 사이지.”
“각별한 사이요? 구체적으로 어떤…….”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는 그런 사이?”
녀석이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지금이라도 뛰쳐나가 정정해 주고 싶은 걸 참았다.
“오오! 그렇단 말이죠? 그럼 혹시 당신이…….”
- 우리 마탑의 투자자?
레나가 오해를 해도 제대로 했다.
김세용이 어딜 봐서 부자 티가 난다고.
나보다 한참 형님처럼 보이는 것은 인정.
“혹시 뭐요?”
“아니에요. 그럼 일단 계약서부터 작성할까요?”
- 확실해! 투자를 해 놓고 너무 궁금해서 우리 마탑을 찾은 거야.
테스트는 생략에 심지어 계속해서 존댓말.
“그런데 여기 호영이 형은 안 보이네?”
“네? 형이라고요?”
레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다.
- 푸훕! 아! 웃으면 안 되는데! 그냥 속는 척 넘어가야 하나?
“그렇소! 형.”
- 이 얼굴에, 이 말투로 형이라니 진짜 무리수네.
레나의 확신은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내가 봐도 김세용이 동생인 게 믿기질 않는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레나가 이렇게 오해를 해 준다면 아주 편리한 설정이 될 것이다.
그녀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상의 투자자뿐이니까.
“나, 여기 있어.”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김세용이 격하게 달려들었다.
“혀어엉!!”
꽤 오랜만의 재회였다.
12층에서 헤어진 이후 처음이니까.
“잘 왔다. 세용아.”
“형이 있는 곳인데 당연히 와야지!”
“오그라드는 멘트는 사절이고.”
“크크크!”
바로 옆에서, 레나는 우리의 재회를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세상에 이런 발연기를!
그러면서 나와 김세용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뭐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거요?”
물론 김세용은 전혀 모르고 있다.
“아니에요. 오랜만에 재회하는 거 같으니 오붓한 시간 가지세요. 저는 이만 피해 드릴 테니까.”
레나는 입을 가리며 총총 연구실로 들어가 버렸다.
“형, 저 여자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이 마탑 잘 고른 거 맞아?”
“어. 잘 고른 거 맞아. 그리고 너, 아주 중요한 역할 하나만 해 줘야겠다.”
“중요한 역할? 그거 내 전문이잖아! 도대체 뭔데!”
“좀 기다려 봐. 괜히 나대다가 실수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퀘스트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레나는 완벽하게 오해를 하고 있으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터.
세용이 녀석의 등장, 타이밍이 아주 좋다.
- 11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