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약 400년 전, 마법의 대륙 칼리아에서 벌어진 참사 <붉은 4월>
칼리아 사람들은 아직도 그 당시의 사건을 ‘인류 최악의 한 달’로 기억하고 있었다.
‘검투사들의 반란?’
기록에 따르면, 붉은 4월을 일으킨 것은 칼리아 검투사들의 비밀 결사 단체.
그들은 ‘위대한 검투사’ 조셉 클루드의 후예임을 자처하였고, 칼리아 황실은 그들을 <마교>로 규정하였다고 한다.
‘살인, 강도, 강간…… 그것도 모자라 황실 전복 계획까지?’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약 43만 명.
마교를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전사한 마법사들의 수 7,599명.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검투사들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었을까?’
붉은 4월이 벌어진 시점은 13층의 칼리아로부터 약 100년 뒤.
내가 경험한 당시 검투사들의 입지는 좁디좁았다.
마법사와 비교한다면 처참할 정도로.
‘무려 100년 만에 검투사의 세력이 강성해졌다는 건데.’
비록 조셉 클루드가 불세출의 검투사라고는 하지만, 내 제자 녀석이 검투사의 세(勢)를 폭발적으로 키울 만큼 후예를 양성했을 거 같지는 않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해서 공략집이 준 정보들을 읽어 나갔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후대의 칼리아인들이 조셉 클루드를 <마교>의 시조로 보고 있다는 것.
심지어 칼리아 황실 전복은 조셉의 유지라고도 전해졌다.
‘그 아둔하기만 한 녀석이?’
말도 안 된다.
이건 무언가 잘못된 역사.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나는 6백 년 전의 칼리아에 존재했으며 조셉 클루드의 스승이니까.
그리고 공략집의 막줄을 읽고 나서야,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당신이 읽은 내용은 ‘승자’에 의해 날조된 역사입니다.]
여기서의 승자라면, 칼리아 황실 혹은 마법사들.
공략집은 또한 내게 한 가지 경고를 보내었다.
[14층에서 플레이어들이 받게 될 최종 퀘스트는 ‘마교 잔존 세력의 섬멸’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칼리아의 마탑주들은 이를 위해 연합 세력을 구축하고 있으며 조만간 움직일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 시점은 현재 생존 중인 모든 플레이어들이 14층으로 진입하는 때가 될 것이며, 이 퀘스트는 플레이어들에게 상당히 위험할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들.
내가 해야 할 일들이 갑자기 늘어난 느낌이다.
“야! 이호영!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레나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기에 더는 무시할 순 없었다.
“잠깐 생각을 좀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너 방금 한 얘기는 도대체 뭐지? 조셉 클루드의 일화를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레나는 마치 사상 검증을 할 기세로 날 몰아세웠다.
일단은 한발 물러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아, 다른 게 아니라 붉은 4월 당시에 희생당한 마법사들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렇게 대충 둘러댔다.
그리고 그제야 레나의 말투가 누그러진다.
“난 또! 깜짝 놀랐잖아! 말을 괜히 헷갈리게 해 가지고선.”
“하하. 그런가요?”
난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완전 스파이가 된 기분이다.
만약 내가 조셉 클루드의 스승이었다고 커밍아웃이라도 한다면, 마을 한복판에 목이 잘린 채로 효수될지도 모르겠다.
“소문에 마교의 잔존 세력들이 다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 그 때려죽일 검투사 놈들!”
참으로 놀라운 시대였다.
칼리아에선 <붉은 4월> 이후에 일정 길이 이상의 검劍의 제조 및 소지를 금지할 정도라 하니, 그야말로 검투사들에겐 길고 긴 암흑기가 이어지고 있는 셈.
“마탑주님은 검투사를 아주 증오하시나 봅니다?”
“당연하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놈들인데! 호영이 너도 검투사는 때려죽일 놈들이라 생각하지?”
“……뭐. 그렇죠.”
인벤토리에서 함부로 엘리시온을 꺼내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거 같다.
‘그나저나 최종 퀘스트가 마교 잔존 세력의 섬멸이라면…….’
조셉의 후예들을 내 손으로 정리해야 하는 꼴.
그럴 수는 없지.
다행히, 이 마탑의 지분을 가져오고 운영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으니 천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내가 수행해야 할 퀘스트의 생성은 전적으로 레나에게 달린 일이니까.
* * *
레나의 마탑에 들어온 지 사흘째지만 아직 최정혁을 만나지는 못했다.
녀석은 무슨 영문인지, 퀘스트를 다 끝내고 나서도 아직 마탑으로 복귀하지 않았던 것.
오늘에서야 레나를 만나러 온다는 연락이 있어 나도 마탑에서 죽치고 녀석을 기다렸다.
“그런데 너, 최정혁이랑 아는 사이라고?”
“네. 동문수학한 사이예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린 모두 탑 출신이니까.
“동문수학이라. 도대체 너희는 어느 아카데미를 나왔지? 그 녀석도 비밀이라고 하던데.”
“물론 저도 비밀입니다.”
“참나! 물어본 내가 바보지!”
레나는 다시 손거울을 들고 본인의 머리를 치장하기 시작했다.
입탑하고 나서 레나를 며칠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몸단장을 하는 데 보내는 듯했다.
그렇다고 어디 외출하는 것도 아니면서.
덜컹.
갑자기 마법 연구실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염동력?’
그렇다면 이 소리의 주인공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안녕! 정혁!”
레나는 복귀한 정혁을 살갑게 맞이했다.
나를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
하지만 최정혁의 시선은 레나가 아닌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호영? 오랜만이네.”
“어.”
정보창에는 플레이어의 마탑 소속이 표시되어 있기에, 최정혁도 이미 내가 레나의 마탑에 들어온 걸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최정혁이 조금 더 빨리 복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녀석은 늦게 등장한 것이다.
- 이 녀석. 페이스가 갑자기 너무 빠르다. 분명 13층에서는 한참 벌어졌었는데!
최정혁은 애써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녀석의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민아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더욱더 그런 느낌.
“이호영, 잊지 않았지? 우리 내기.”
“초조한가 보네?”
“초조는 개뿔!”
15층을 먼저 클리어하는 쪽을 형으로 대접하기.
사실 난 이 녀석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 이 내기는 이겨 봤자 본전치기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 내기를 수용한 데에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동기 부여가 될 거 같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질 리도 없으니까.
“야! 너희 둘! 내가 모르는 얘기는 하지 마! 하려거든 나한테 좀 알려 주든가!”
레나는 살짝 삐친 모양이다.
한껏 치장한 자신을 놔두고 남자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상할 만도 하다.
하지만 레나를 좀 더 소외시켜야 할 것 같다.
“여기 와서 마누라는 만나 봤어?”
“아니,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 어차피 당분간 안 볼 생각이야.”
“왜?”
“너와의 내기가 더 중요하니까.”
“편하게 생각해. 어차피 넌 져도 잃을 게 없잖아?”
“져도 괜찮은 승부는 없어. 그리고 난 너를 형으로 부를 마음. 눈곱만큼도 없거든.”
- 이놈의 여유 부리는 태도는 역시 마음에 안 들어. 마치 날 내려다보는 느낌.
역시.
승부에 대한 이 녀석의 집착은 확실히 과한 구석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약이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정혁에겐 치명적인 독.
오민아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성향이 프로 게이머 시절의 최정혁을 지독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오민아 덕에 큰 기연을 만나기도 했으니, 남편 녀석을 좀 확실하게 눌러 줘야겠다.
나에게 지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물론 내가 오민아를 만난 건 녀석에게 비밀이다.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 * *
레나는 살짝 뾰로통한 상태였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마탑주인 자신이 대화에서 소외된 것이 그 이유.
“그런데 최정혁! 너 유부남이었어?”
“네, 지금은 사정상 떨어져 지내긴 하지만요.”
“그런 건 바로바로 말해 줘야지! 혹시라도 내가 너한테 반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레나도 확실히 보통 캐릭터는 아니다.
그러고 보면 탑에 오고 나서 정상인 캐릭터 자체를 몇 만나 보질 못한 거 같다.
싸가지가 없거나, 나사가 하나 빠져 있거나, 미쳤거나…….
“호영이 너는?”
“네?”
“결혼했냐고.”
“모쏠입니다만.”
“그 얼굴에? 너도 정상 캐릭터는 아니네.”
레나에게 이런 식으로 카운터를 맞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분위기를 환기시킨 것은 최정혁.
“마탑주님. 이제 약속대로 큰 건수 하나 주셔야죠?”
“어, 이제는 네가 확실하게 능력을 증명했으니까 거기로 가 볼 때도 됐지.”
“<죽은 자들의 숲>이라고 했던가요?”
“응, 현시점에서 우리 마탑이 접근할 수 있는 최상위의 마굴이지. 그래 봤자 등급이 중급이긴 하지만.”
“거기서 뭘 구해 오면 될까요?”
“사(死)자의 원혼 4개만 구해와. 인센티브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줄 테니까.”
최정혁이 나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녀석의 정보창에는 퀘스트 생성 알림창이 떴을 것이다.
퀘스트를 선점하여 나를 훨씬 앞질러 갈 생각에 기분이 좋은가 본데, 네가 원하는 대로 물러나 줄 생각은 없다.
최정혁도 이젠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레나의 마탑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를.
“마탑주님. 저도 최정혁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호영이 네가?”
“왜요? 혹시 제 능력이 부족해 보이십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중급 마굴은…….”
당연히 최정혁은 내 말에 발끈했다.
본인의 밥상에 내가 숟가락을 올리는 것으로 보일 테니까.
“나 혼자 간다. 괜히 끼어들지 마!”
“최정혁, 너도 중급 마굴은 처음일 텐데 위험하지 않겠어?”
“내 걱정하는 척,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이건 마탑주님이 확실하게 못 박아 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약속이니까요.”
대충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지는 짐작은 된다.
“어! 그렇긴 하지. 이 마굴은 정혁이가 혼자 다녀오는 것으로 해야 할 거 같아.”
레나의 말에 최정혁이 다시 한번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아직 안 끝났다.
“마탑주님? 저 좀 잠깐 보시죠?”
“어?”
나는 레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투자자 형님은 제가 이 마탑에서 큰 역할을 맡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2차 투자 얘기 잊지 않으셨죠?”
내 말에 바로 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곤란한 표정.
하지만 그녀로선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는 엄청난 양의 금붙이들이 아른거릴 테니까.
- 2차 투자는 10배라고 했던가?
최정혁도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한 모양이다.
“마탑주님! 마탑주님?”
“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둘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마탑주에겐 소속 용병의 안전이 최우선이고, 정혁이 너는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하니까 말이야.”
“아니! 그런 게 어딨습니까? 우리가 약속한 게 있는데!”
“둘이 가면 안 된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는데?”
“말도 안 돼요!”
“말이 왜 안 돼?”
[2인용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숲’에서 사자의 원혼 4개를 가져오십시오.]
레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 10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