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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03화 (103/292)

103화

혈마가 절벽에 남긴 수라마혈검의 검흔들은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비급의 모든 초식들은 딱 한 번씩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결코 보기 편리한 방식은 아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 등의 순서대로 정렬되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공략집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사실을 발견하지도 못했겠지.’

혹시 사부라면 가능했을까?

의심의 여지 없이 가능했을 것이다.

사부라면 10성까지 연마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 이 검흔들이 비급의 내용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의 쓸데없는 뇌내 망상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혹시 혈마는 수라마혈검의 완성자에게 무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

공략집의 안내대로 이 검흔들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따라가 보았다.

놀랍게도 무질서 속에 한 가지 규칙성이 발견된다.

각 초식이 끝나는 지점이 한군데에 모인다는 것.

절벽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지며, 그 무늬의 중심이 모든 초식이 끝나는 곳이다.

‘역시 수상해.’

나는 그곳을 올려다보며 다가갔다.

대략 십 장 정도의 높이.

이곳에도 검흔은 있다.

하지만 비급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초식.

검흔이 만들어진 형태도 살짝 달랐다.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면 알아차릴 수 없었을 만큼.

휘이이익!

나는 몸을 날려 절벽에 달라붙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모든 검흔의 중심.

‘무언가 있다!’

움푹 패인 곳에 박혀 있는 탁구공 크기의 투명한 수정체.

내공을 주입하여 이곳에 인위적으로 박아 넣은 것이다.

누가 했는지는 굳이 고민할 것도 없다.

혈마겠지!

이 수정체는 무려 6백 년의 세월 동안 누군가의 손에 닿지 않고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엘리시온을 꺼냈다.

그리고는 마치 고고학자가 된 것처럼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이것을 빼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주변의 암석들을 도려냈다.

타악!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수정체를 빼내었을 때,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기다란 필름 통 모양의 보관함.

보통 무림에선 이 안에 문서들을 담곤 한다.

6백 년 만에 혈마가 타차원에서 남긴 메시지가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 * *

- 친애하는 칼리아인에게.

그대가 만약 이 서찰을 발견하였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기막힌 우연이거나,

혹은 그대의 수라마혈검이 나와 같은 경지이거나.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이 서찰의 내용을 무시해도 좋다.

아니, 바로 찢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그대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허무맹랑한 개소리로 생각할 테니까.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솔직히 이 서찰을 작성하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대가 수라마혈검을 10성까지 연마하였다면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참고하여 주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이전의 서찰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본좌는 무림이라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다.

이는 칼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미지의 대륙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왜곡시키며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의미인데,

만약 이해가 안 되거든 차라리 먼 우주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 그대는 나에게 묻겠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칼리아라는 곳에 <등선>이라는 개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경험한 이것을 등선이라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지금은 결국 등선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어쨌든 궁극의 검술에 도달한 본좌는 어느 날 차원의 문을 열고야 말았다.

그 문을 통해 들어 왔을 때 나는 이곳 칼리아라는 미지의 대륙에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대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수라마혈검을 극의까지 완성한 그대도 이미 초인일 테니까.

한 가지 알려 주고 싶은 일이 있다.

그대가 어떤 차원의 문을 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문을 통과한다고 하여도 신선처럼 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다른 차원의 세계를 한번 경험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을 테지.

하지만 여러 차원의 문 중 특별한 한 곳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바로 탑이라 불리는 곳.

그곳은 모든 차원의 중심이다.

흥미가 동한다고?

하지만 이곳에 방문하는 것은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번 발을 들이는 순간 평생 탑에 구속되는 삶을 살아야만 하니까.

탑은 무저갱의 지옥 같은 곳. 또한 초인이라고 생각했던 본좌가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있었음을 깨달은 곳이기도 하다.

탑과의 맹약 때문에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대가 차원의 문을 열었을 때 하늘에 닿을 듯한 거대 구조물이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탑일 것이며 그땐 아주 신중해야만 할 것이다.

나 역시 그곳에 다녀왔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흥미가 동하는가?

어쩌면 내가 바라는 바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 당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나는 충분히 경고를 했으며, 그럼에도 그대가 탑에 되거든 나를 찾아오길 바란다.

그대의 선배로서 도와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를 만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대가 방금 손에 넣은 수정체.

그것이 탑에서 길을 인도하여 줄 것이다.

‘놀랍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사부뿐만 아니라, 혈마 역시 탑에 다녀왔다니.

심지어 그는 사부보다 약 600년을 앞서 탑에 다녀온 존재.

나는 혈마의 서찰을 읽으며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런데 혈마는 여전히 탑에 있을까?’

이미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제아무리 초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수백 년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

더군다나 혈마는 이 서찰 이후엔 칼리아에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이 수정체를 본캐로 옮기는 건?’

이 역시 아직까지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수련을 하러 왔는데 머리 복잡한 일들이 생겨 버렸다.

그래도 수련을 게을리할 수는 없는 법.

이곳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계획했던 수라마혈검의 중편을 다시 짚어 보려면 빠듯한 시간이다.

나는 다시 공략집을 열람한 후 검흔의 흔적을 따라가며 검을 휘둘렀다.

[지혜의 시간이 매우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혈마의 서찰을 읽고 나서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 느낌이다.

차원의 문을 열어 버린 초인의 생생한 경험을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동기 부여가 된 것 같다.

오늘 수련. 분명 성과가 다른 날보다는 클 것이다.

“사부님! 여기 계셨군요!”

조셉이 나를 찾아왔다.

나와의 대련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나를 찾은 것.

“조셉아.”

“네 사부님.”

“오늘은 6할의 힘을 내보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처음으로 조셉에게 절반 이상의 힘을 쓰도록 허락했다.

어제의 나였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위력.

하지만 나는 오늘도 조셉과 대등한 대결을 펼쳤다.

* * *

카일 협곡 6일 차.

오늘은 처음으로 수라마혈검의 하편을 펼쳤다.

사실 하편의 초식들은 현재 나의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검법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내공이 너무 빈약하기에 흉내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중편의 초식조차 불완전하기도 하고.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이 비급에 나온 내용들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일이었다.

어차피 수련은 본캐로 돌아가 진행할 생각이니까.

다행히 지혜의 시간이 발동되고 있어 암기를 하는 것에 어려운 점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통째로 외워 버리면 됐다.

하편을 덮은 뒤에는 조셉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다.

특별히 조셉을 위해 시간을 할애한 것은 아니었다.

녀석을 가르치는 일은 실제 나의 성취에도 도움이 되었다.

무심코 넘겼던 부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조셉을 가르치며 수라마혈검의 중편 전체를 다시 꼼꼼히 되짚어 볼 수 있었다.

특히 조셉과 문답을 하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조셉은 이미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수라마혈검과 보냈기에 자연스럽게 내가 배우게 되었다.

“사부님! 이제야 이해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녀석은 그걸 전혀 인식 못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해가 되었거든 직접 펼쳐 보도록 하여라. 직접 해보고도 여전히 의문이 생기지 않을 때야 비로소 본인의 것이 되는 것이다.”

“네, 사부님.”

지난 며칠간 조셉 역시 작지 않은 성취를 거두었다.

비록 내가 한 일이 많지는 않으나, 제자의 발전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부님! 오늘 대련은 제힘의…….”

“8할을 사용해 보도록 하여라.”

“8할 말씀이십니까?”

조셉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이는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 온 규칙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하루 만에 2할을 증가시켰던 적은 없었으니까.

“왜 싫으냐?”

“아닙니다!”

싫을 리가 없었다.

조셉은 본인의 전력을 다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동안 그럴 만한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도 큰 도전이다.

“들어오너라.”

“예. 사부님.”

오늘도 나는 조셉과 대등한 대결을 펼쳤다.

* * *

카일 협곡 7일 차.

시간은 흘러 결국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내가 원한다면 이곳에서 더 머무는 것이 가능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없다.

지혜의 시간 특성도 오늘이 지나면 종료가 될 테니까.

이미 13층을 클리어하고 다음 층으로 넘어간 플레이어는 둘이었다.

최정혁, 그리고 오민아.

아마 다음 순서는 내가 될 것이다.

‘그나저나 다들 무사할까?’

각자가 개인플레이를 하고 있기에 서로의 안위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아직 12층에 머물고 있는 플레이어도 상당수.

결국 15층까지의 게임 미션을 마치고 탑의 로비에 돌아가야만 동료들의 생사 여부를 전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조셉아.”

“네. 사부님.”

결국 조셉에게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놀랍게도 녀석은 가까운 시일 내로 내가 떠난다는 것을 짐작했다고 한다.

“왠지 그럴 거 같았습니다. 사부님과의 대련에서 제가 10할의 전력을 다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가 작별일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둔하기만 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날카로운 구석도 있었다.

“그래. 바로 그날이 오늘이다.”

“오늘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또한 오기만을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전력을 다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 되겠구나.”

“네. 사부님.”

이미 조셉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오늘은 아무런 속임 없이 내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행여 이 녀석에게 처절하게 패한다 할지라도.

“조셉아, 멋진 승부를 한번 펼쳐 보자꾸나.”

“네. 사부님.”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조셉의 앞에서 엘리시온을 꺼내 들었다.

- 10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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