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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00화 (100/292)

100화

조셉이 날 무림인으로 오해할 만한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단 한 번도 깨져 본 적 없는 기문진의 결계가 나로 인해 처음으로 해제된 것.

그리고 나의 외모가 칼리아인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

결정적으로 조셉 자신이 무림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무림인을 영접하기를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무림인이라고 믿고 싶은 거겠지.’

나의 등장은 그러한 조셉의 갈증을 단번에 해소시켜 주었다.

“……이런 날이 정말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고개 좀 들어. 너무 그러니까 내가 민망하잖아.”

마치 사이비 교주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하긴 조셉 녀석에게 무림인이라는 환상은 일종의 종교였을지도 모른다.

조금 아둔하긴 해도 검에 대한 녀석의 열망은 뜨거웠고, 6백 년 전의 무림인이 남긴 흔적은 칼리아의 검투사에겐 신세계였을 테니까.

‘갑자기 좀 미안하긴 하네.’

조셉의 순정을 이용한 듯한 기분.

뭐, 그래도 내가 무림에서 왔다는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무림에 체류한 적도 있으며, 천마신교에서 무공을 익히기도 한 것은 사실이기에.

“제가 기다려 온 혈마님이 정말 맞으십니까?”

“뭐?”

6백 년 전, 이곳에 온 무림인의 별호가 아무래도 혈마인 모양이다.

천마는 들어 봤어도 혈마는 모른다.

내가 무림에 대한 식견이 넓은 것도 아니고, 혈마라는 자는 수백 년 전의 인물이니.

“무림에서 온 건 맞지만 혈마는 아니야.”

“……아! 그러십니까?”

아쉬운 탄식과 실망한 기색.

하지만 나에 대한 동경만은 여전했다.

“그리고 혈마는 오래전에 죽었다.”

나는 진실을 말해 주었다.

종교적 수준으로 혈마를 동경하고 있는 녀석에게 이 정도는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 위대하신 분이 어쩌다가!”

“무림인이라고 해서 불사의 존재는 아니야. 6백 년 전의 인물이니 죽은 게 당연하지.”

“……그렇군요.”

내 말에 조셉은 큰 충격을 받았다.

기연을 남긴 존재가 그토록 먼 과거의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신앙과도 같던 그 존재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 것이다.

녀석은 정말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너는 어쩌다가 이곳을 발견하게 된 것이냐?”

“저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 어려서부터 검술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엔 자연스럽게 몬스터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죠.”

“그래서?”

“하루는 이곳 카일 협곡 근처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를 만나 절벽 아래로 추락을 하게 되어…….”

“결국, 여기에 떨어졌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대단한 기연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지 않은 것도 모자라, 기문진의 결계를 절묘하게 뚫었으며, 혈마가 안배해 놓은 이 장소에 오게 된 것.

“서찰 같은 것이 있었겠군. 네가 혈마라는 별호를 알고 있는 걸 보니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혹시라도 이곳에 인연이 닿는 자를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절벽에 새겨진 검흔만을 통해 심득을 얻는 것은 천재들의 영역.

이 아둔한 녀석이 그걸 해낼 리가 없다.

“그, 서찰은 아직도 남아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위대하신 분께서 남긴 것이니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지요!”

“한번 보자.”

궁금했다.

내 사부와 동등한 경지에 오른 혈마라는 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그…… 그게.”

“왜? 곤란한 것이냐?”

“그것은 위대하신 혈마님께서 칼리아인을 위해 남기신 것이라.”

“내가 무림인이라 안 된다는 거로군.”

내 말에 조셉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인 양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사해(四海)는 동도(同徒)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림에선 모든 이들이 하나의 형제라는 뜻이다. 비록 시대가 다르긴 하나 혈마와 나도 형제나 다름없다는 뜻이지. 그러니 그 서찰은 내가 보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정말입니까?”

“그래. 무림인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조셉은 말도 안 되는 내 말에 납득을 해 버렸다.

혈마가 아무런 조건 없이 칼리아인을 위해 검술을 전수해 준 것은 사실이니까.

잠시 후, 조셉은 혈마가 남긴 서찰을 가지고 왔다.

신줏단지 모시듯 비단에 고이고이 싸여 있는 게, 가보로 남길 것 같은 모습이다.

“여기 있습니다.”

[소드마스터가 남긴 서찰을 발견하였습니다.]

[히든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지혜의 시간’을 부여합니다.]

[일주일간 모든 학문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오오!’

이 보상이 어떤 의미일지 대충 짐작이 된다.

아마도 13층을 클리어할 무렵의 나의 검술 수준에는 비약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일단은 이것 먼저.’

나는 혈마가 남긴 서찰을 펼쳐 들었다.

양피지에 적혀 있는 조악한 글씨체.

칼리아어가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체류한 기간이 길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서둘러 서찰을 읽어 나갔다.

- 친애하는 칼리아인에게

부디, 이 서찰을 발견하는 자가 검의 길을 추구하는 자이길 바라며 몇 글자 남기노라.

본좌는 무림이라는 곳에서 왔으며, 그곳에서 세상 사람들은 본좌를 혈마라 불렀다.

(중략) 우연히 온 이곳 칼리아에서 본좌는 통탄을 금치 못하였다. 검객이 천대를 받으며, 마법이라는 사술이 횡행하는 일은 무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며…… (중략) ……하지만 이방인일 뿐인 본좌가 칼리아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되어, 이곳에 은밀하게 본좌의 비전 절기를 안배하여 놓으려 한다.

‘대단하다!’

혈마가 서찰로 남긴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는 정말로 고금 제일을 논할 만한 초절정의 고수.

사부와 달리 중년 이후에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였기에 역사에 이름이 남지는 않았지만, 검술의 경지가 뒤처지기 때문은 결코 아닐 것이다.

정파, 사파, 마교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은거 고수 혈마.

그는 이곳에 본인의 무학 일부를 남겨 놓았으며, 칼리아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주석을 달아 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수련자의 내공이 부족하여 검술을 발휘하는 데에 무리가 없도록 만년설삼과 공청석유까지 아낌없이 내주었다.

“조셉아.”

“네!”

“혹시 다 먹었느냐?”

내겐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혈마가 남긴 영약은 천금만금을 가지고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니까.

조셉은 내가 물어본 것을 바로 이해했다.

“……네. 다 먹었습니다.”

망할.

서찰의 내용대로라면 그 양이 상당했을 텐데.

“설마 혼자서 다 먹은 것이냐?”

“네. 검술의 벽이 느껴질 때마다 조금씩 먹다 보니 그만…….”

“미련한 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검술의 벽이 느껴지는 이류를 내공의 부족에서 찾다니.

게다가 영약은 동일한 것을 섭취할 때마다 효율성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혈마가 남긴 서찰에도 그 부분을 언급하여 놓았음에도, 이 미련한 녀석이 아까운 영약을 모조리 본인의 배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검술의 발전이 더뎌 답답함에 그만……. 혹시 제가 큰 죄를 범한 것입니까?”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아니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부캐로 영약을 흡수해 봤자 다시 본캐로 돌아가는 순간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리니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혈마가 남긴 검술을 익히는 것.’

본캐로 돌아가더라도 내 머릿속에 각인된 깨달음은 남는다.

이것은 나를 훨씬 더 높은 곳으로 도약시켜 줄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일주일간은 <지혜의 시간>이 적용되니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조셉아.”

“네.”

“다 가져와. 혈마가 남긴 것.”

역시 움찔한다.

물론 조셉 녀석이 혈마의 기연을 독식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이놈은 이든이라는 제자를 두기도 했으니까.

“아까 내가 한 말 잊었어? 무림에서는 뭐다?”

“동도는 사해. 말입니까?”

“어. 안 잊었네. 가져와.”

시간이 없다.

제아무리 [지혜의 시간]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단 일주일간 혈마의 무공을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니까.

* * *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해제한 기문진을 다시 복구하는 일이었다.

일주일간 웬만해선 다른 방해꾼이 나타나진 않겠지만, 기문진은 흥미로운 스킬이었기에 직접 실습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내가 떠난 뒤에도 조셉에게 은신처를 남겨 주고 싶기도 했고.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 어려운 걸 바로!”

혈마가 남긴 기문진에 관한 서적을 보면서 실시간으로 만들어 냈기에 조셉의 감탄은 끊이지 않았다.

“이게 어려워? 그냥 이해하고 적용하면 되는 거잖아.”

지혜의 시간은 내 생각보다 효과가 놀라웠다.

어쩌면 현자의 상태창과 중첩으로 시너지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끄럽지만 검술과 달리 기문진만큼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수백 번을 봤는데도 말입니다.”

전혀 놀랍지 않다.

조셉이 이해했다면 더 놀랄 일.

“혈마가 해 놓은 거랑 똑같은 거니까, 출입문은 바로 찾을 수 있겠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해제 없이 바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부숴 버린 걸 복구해 놓은 건데.”

우리가 있는 곳을 은신처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검술을 익힐 차례.

비급을 읽어 보는 것에 앞서 혈마의 검술이 실제로 어떻게 재현되는지가 궁금했다.

검술명 수라마혈검.

‘녀석이 펼치는 것을 보면 대충 감이 오겠지.’

조셉은 나의 훌륭한 실사판 교보재가 될 것이다.

“조셉아. 한번 해 봐.”

이곳을 발견한 이래로 무려 27년을 갈고닦은 조셉의 경지도 궁금했다.

“네. 알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위대한 검투사로 부르는 조셉 클로드.

녀석의 검이 내 눈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엘리시온!’

나와 같은 검을 들고 있었지만, 검술이 달라지니 검의 느낌도 확 달라졌다.

무영추혼검을 펼칠 때의 엘리시온이 마에스트로라면, 수라마혈검을 펼치는 지금은 폭주 기관차의 느낌이다.

심지어 검에서는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투기장에서 나와 대결을 펼친 이든과는 차원이 다른 검술.

나보다도 높은 경지인 것 또한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의 아둔한 이미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이다.

‘느낌이 묘하군.’

한때는 나의 제자였던 녀석이 나를 압도하는 상황.

당연히 청출어람의 느낌이 아니다.

녀석이 지금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내가 전혀 모르는 검술이니까.

잠시 후, 검술을 마친 조셉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치 심사 위원의 점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긴장한 기색이었다.

“잘했어.”

“부끄럽습니다.”

“그게 수라마혈검의 몇 성 정도를 익힌 것이지?”

“삼(三)성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27년간 갈고닦아 삼성이라.

나와 내 사부의 기준에서는 역시 아둔한 것이 틀림없었다.

“벽에 막힌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보통 이러한 벽들은 삼성에서 찾아오기 마련.

“너에게 제안 하나 할게.”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나를 사부라 부르도록 해라.”

“네?”

“사부라 부르라고. 막힌 걸 뚫어 줄 테니까.”

한번 사부는 영원한 사부.

비록 나보다 높은 경지의 녀석이지만 가르쳐 볼 생각이다.

내겐 지혜의 시간이 있으니까.

- 10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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