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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99화 (99/292)

99화

[기문진이 해제되고 있습니다.]

[진행률: 5%]

일단 생문(生門)을 찾았으니, 가장 어려운 고비는 넘긴 셈.

이제 주변을 현혹하는 기운들만 몰아내면 된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흙, 돌, 나뭇가지, 지푸라기 등과 같은 보잘것없는 자연 지물들이 오묘하게 배치되어 환영(幻影)의 기운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니까.

우리 주위를 자욱하게 감싸고 있는 이 안개 역시 허상이다.

[진행률이 20%에 도달하여, 안개가 걷힙니다.]

뿌연 안개가 걷히고 협곡 안에는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선명해지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정말 이게 기문진이었다고요?”

“어. 이제부터는 너도 좀 거들어. 돌멩이들 좀 치우고.”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저는 당연히 환영 마법일 거라 생각했는데.”

“편견이야.”

“무림인만 기문진을 알고 있을 거라는 편견이요?”

“아니. 칼리아에는 칼리아인만 있을 거라는 편견. 이 기문진은 분명 메이드 인 무림이야.”

“황당한 주장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하시는군요.”

“우리만 봐도 칼리아인이 아님에도 여기에 존재하잖아?”

나는 오민아의 물음에 대꾸하며 하나하나 기문진을 해제하여 나갔다.

[진행률이 50%에 도달하여, 미로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내 지시에 따라 일을 거들기 시작하니, 진척도가 점점 더 빨라진다.

“당신 말대로라면 이 기문진을 설치한 자는 결계 너머에 있으며, 출신은 무림에서…….”

“아니, 무림인이 아직 이 안에 있다는 보장은 없지. 언제 만들어진 결계인지 알 수 없으니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의 일.

현재 결계 너머에 있는 녀석은 아마도 조셉 클루드일 것이다.

“그나저나 기문진은 언제 배운 거예요? 10층 무림 미션에서?”

“어, 제대로 배웠다기보다는 두어 번 직접 해 볼 기회가 있었던 거지만.”

“두어 번 해 본 거로 습득을 해 버리다니,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나도 나 자신이 놀랍다.

따지고 보면 비단 기문진을 습득한 것뿐만이 아니다.

내게 가장 기본이 되는 검술만 해도 그렇다.

검술에 대해 한없이 깐깐한 사부가 내 자질을 인정하여 후계자로 삼았을 정도니까.

‘현자의 상태창 때문이겠지.’

매번 그렇게 생각해 왔다.

30년 가까이를 평범하게 살아온 나를 비범하게 바꾸어 준 것.

이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진행률이 100%에 도달하였습니다.]

[기문진이 완전 해제되었습니다.]

“와우! 진짜 대단해요!”

오민아는 어린아이처럼 박수를 쳤다.

“그럼 다시 마법 지도를 좀 볼까?”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이젠 더 이상 버벅댈 이유가 없다.

마법 지도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편안하게 이끌어 준 것처럼 최종 목적지까지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길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300미터입니다.]

생각보다 가깝다.

과연 내 제자 놈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 * *

조셉 클로드.

캘리 클로드의 막내아들이며, 칼리아의 위대한 검투사이자 소드마스터에 근접했다고 여겨지는 인물.

그리고 한때는 나의 우직했던 제자.

바로 그 녀석이었다.

그런데 참 의외의 모습으로 재회하게 되었다.

나보다 스무 살 이상은 늙어 보이는 얼굴, 더 의외인 것은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였음에도 녀석은 곯아떨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심지어 코까지 드르렁대고 있다.

‘믿기지가 않는군.’

보통 이 정도의 고수라면, 잠을 자고 있는 상태에서도 기감이 개방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

하지만 세상 태평한 모습으로 자고 있는 제자 놈을 보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누구도 해제한 적이 없는 기문진 결계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사람이 있어요! 저 사람이 이 기문진을 만든 무림인?”

“그럴 리가 없잖아? 그의 제자쯤 되겠지.”

공략집에 따르면 그 소드마스터 무림인은 6백 년 전의 인물.

사부가 그랬듯이 그는 아주 오래전에 차원의 벽을 통해 무림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근거는요?”

“생긴 것을 봐. 칼리아 사람이잖아.”

“그럼 당신은 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데요?”

“조셉 클로드. 들어는 봤지?”

“물론이죠. 사람들이 위대한 검투사로 부르며 칭송하니까요. 그런데 정말 확실한가요?”

“어. 확실해. 나한테 나름 믿을 만한 소스가 있었거든. 밝힐 수는 없지만.”

“그런데 위대한 검투사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지금 자고 있는 모습만 보면 노숙자가 따로 없으니까.

조셉은 우리가 떠드는 소리에도 여전히 깨지 않은 채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내 제자였던 시절에도 영민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더 둔해 보인다.

현재의 검술 수준은 나보다 높겠지만.

“운이 좋네요. 잠에서 깨기 전에 몰래 퀘스트를 완료해야겠죠?”

“어, 일단은 자게 내버려 두고, 우린 우리의 할 일을 해야겠지.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소드마스터가 남긴 검흔이 있을 테니까.”

조셉을 깨워서 물어본다면 더 빨리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내 스스로 주변을 탐색해 보고 싶었다.

사부와 비슷한 경지의 무림인이 남긴 흔적을 찾는 것.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다.

나와 오민아는 풀숲 사이를 헤치고 절벽 쪽으로 향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검흔이 남는 곳은 단단한 암석 외에는 없을 것이다.

“호영 씨! 여기요!”

“어. 나도 찾았어.”

역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조셉의 근처에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검흔을 발견하였습니다.]

[마법 양피지에 자동으로 형상이 기록됩니다.]

[진행률: 4%]

절벽의 암석 곳곳에는 검으로 난도질 된 흔적들이 보였다.

마치 물렁물렁한 두부에 그어 놓은 것처럼 예리한 직선들.

놀라웠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낸 흔적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는 넋을 놓고 소드마스터가 남긴 흔적들을 바라만 보았다.

‘사부와는 스타일이 달라.’

검흔을 보는 것만으로도 호쾌하면서도 패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만약 사부가 검흔을 남겼더라면 좀 더 유려하고 부드러웠을 것이다.

‘어쨌든 놀라운 경지가 느껴지는군.’

내 제자 놈이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서 기연을 얻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

6백 년 전의 무림인이 남겨 놓은 무언가가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분명 검흔만으로는 심득을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내가 조셉을 가르쳐 봐서 알지만, 녀석은 성실하긴 하지만 둔한 구석이 있다.

아마도 칼리아인의 눈높이에 맞게 작성된 비급 같은 것이 존재했을 확률이 높다.

내공을 증진시켜 줄 영약도 있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녀석 특유의 우직함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은 칭찬해 줄 만하다.

‘궁금한 것은 차차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은 퀘스트 먼저 해야겠지.’

나는 서둘러 절벽 곳곳에 숨겨진 검흔들을 발굴해 나갔다.

흔적을 하나하나 발견해 나갈 때마다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행률: 58%]

그러면서 중간중간 힐끗 조셉을 보는데, 녀석은 여전히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참 대단한 녀석이다.

* * *

[진행률: 100%]

[검흔의 형상을 모두 기록하였습니다.]

넓은 영역에 걸쳐 소드마스터가 남긴 흔적이 있었기에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끝이 났다.

이제 이 퀘스트의 의뢰인을 만나 마법 양피지를 건네기만 한다면, 13층은 바로 종료될 것이다.

“불가능해 보인 퀘스트였는데 이걸 끝내네요.”

오민아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불가능한 게 어딨어. 다 가능하니까 퀘스트 생성이 되는 거지.”

“아니요. 당신과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중간에 포기했을 거예요.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요.”

“나를 파트너로 삼은 거?”

“아뇨. 당신의 잠재력을 미리 캐치해 낸 것이요. 제 남편은 절대 당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예요. 지금 잠깐 앞서고 있을 뿐, 언젠간 당신이 따라잡고야 말겠죠.”

오민아는 최정혁이 들었으면 서운할 이야기를 잘도 하고 있었다.

“네가 의도한 결과를 만들어 줄게.”

사실 나는 아직도 오민아의 의도를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나에게 이득이 될 거란 판단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나에겐 최고의 결과가 펼쳐졌고.

“이제 슬슬 저 녀석 좀 깨워 볼까?”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아직 자고 있으니 그냥 몰래 빠져나가는 쪽이 더…….”

“원한다면 먼저 가도 좋아. 퀘스트는 다 완료했으니까. 난 이 녀석과 좀 볼일이 있어서.”

오민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결론을 내렸다.

“좋아요.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자연스러울 거 같네요. 고마웠어요. 그리고 조심하세요.”

“어, 잡지 않을게.”

그녀가 이쯤에서 빠져 준다면 나로선 고마운 일.

제자 놈과는 할 이야기가 많다.

“막상 이렇게 나오시니까 서운한데요?”

“조심해서 가.”

이제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와 해후할 시간이다.

* * *

나는 발을 툭툭 차서 조셉을 깨웠다.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숙면을 위해 감각을 완전히 차단해 놓은 모양이다.

아무리 기문진을 믿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무방비일 줄이야.

만약 나쁜 의도를 품은 침입자가 있었더라면 아무리 검술의 고수라 해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뭐야!”

잠시 후, 조셉이 벌떡 일어났다.

감각이 돌아오고 나서 순간적으로 보여 준 녀석의 민첩성은 놀라웠지만,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이런 녀석이 세상이 칭송하는 위대한 검투사라니.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문진이 멀쩡한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기문진? 그거 내가 열었어. 그리고 반가워.”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누구…… 신지?”

“잘 생각해 봐. 내가 누구일지.”

조셉은 존대를 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왔다.

아무리 늙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왠지 모르게 어리기만 느껴진다.

- 고수다!

나를 향한 짧은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수라니, 물론 그것은 오해다.

나보다는 오히려 네 녀석이 훨씬 더 고수니까.

기문진을 해제하고 귀신처럼 등장해 버린 이 상황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당신은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녀석에게서 정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 장난을 쳐 본 것이었다.

어차피 사제 관계는 다른 평행 차원에서 맺은 것일 뿐이니까.

- 나와 인연이 있다고? 분명 처음 보는 자인데!

조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둔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예전의 모습이 떠오른다.

“혹시 무림에서 오셨습니까?”

지나치게 발휘된 상상력.

하지만 그렇게 믿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

내 짧은 한마디에 조셉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당장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감격스러운 표정도 가관이다.

- 10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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