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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98화 (98/292)

98화

카일 협곡을 향하는 세 갈래의 길.

나는 그중에서 몬스터가 가장 많이 서식하는 쪽을 택했다.

이유는 별 게 아니다.

오민아의 실력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었으니까.

슝!

슝!

오민아의 마법 속성은 바람이다.

그녀가 쏘아 내는 윈드 애로우에 코볼트는 가슴이 뚫리며 그대로 절명했다.

파괴력도 놀랍지만, 정확히 심장 쪽을 노리는 오민아의 컨트롤이 예술이었다.

12층과 13층을 거치면서 이미 어엿한 마법사가 된 것이다.

“네 남편도 알아?”

“뭐를요? 제가 더 강하다는 거요?”

“어.”

“당연히 모르죠.”

“지금 하는 걸 보면 진즉 14층으로 갔을 실력인데, 페이스 조절을 하는 것도 귀찮겠어?”

“비밀이에요. 말했듯이 그 사람은 아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못 견딜 거예요.”

“베지터를 능가한 트랭크스의 심정이겠군.”

“네?”

“암튼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남편을 많이 좋아하나 봐? 탑 이전에는 그냥 동료 사이였다면서.”

내 말에 오민아는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최정혁을 향한 그녀의 마음. 뭔가 좀 애매하다.

동정에 기반한 애정이라고나 할까? 애정이라고 하기엔 좀 약한 거 같기도 하고.

이럴 때는 <마음>이라는 마법 속성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은 타인의 감정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려왔으니까.

어쨌든, 정작 최정혁에게 비밀로 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호영 씨는 게임 미션에서조차 레벨이 낮네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라고 멀쩡할 리 없잖아?”

“뭐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도 있죠.”

“그건 그렇지.”

사실 나는 레벨업에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마법사이면서도 공격 마법 스킬이 없었기에 부캐 육성에 대한 유혹이 크지 않았고, 저레벨로 회귀하는 효과는 여기서도 여전했기에 스탯이 딸릴 일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마력은 기연을 얻은 이후엔 그 어떤 플레이어와 비교해도 압도할 정도였다.

“당신은 참 특이한 사람이에요.”

“너희 부부만큼은 아니야. 탑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도 그렇고.”

“그거야 뭐 세상에 종말이 찾아왔으니까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처녀 귀신이 되고 싶진 않았어요.”

“역시 특이해. 그런데 프로 게이머일 때엔 너희 부부 중 누가 더 잘나갔지?”

자연스러운 호기심이었다.

탑에서 두 사람의 직업은 모두 프로 게이머.

현재 더 잘나가는 쪽은 명백히 오민아인데, 탑 이전에도 과연 그러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당신이 제 남편의 팬이었다는 건 아마 거짓이겠군요.”

“왜?”

“비교적 마이너한 게임이라 사람들이 잘 모르긴 하지만, 제가 랭킹 1위였으니까요.”

탑 이전의 우열 관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

재밌는 결론이긴 했다.

“랭킹 1위? 네가 그 정도 능력자였을 줄이야! 어쨌든 최정혁의 팬이었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야. 내가 게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그래도 잘하시네요. 게임.”

“프로 게이머가 하는 칭찬이니 확실하겠군.”

엄밀하게 말하자면, 잘한다기보다는 잘 아는 쪽이지만 말이다.

* * *

[카일 협곡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동 내내 한스가 준 마법 지도는 꽤나 유용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완벽한 내비게이션 기능을 해 줬음은 물론이고, 주변에 서식 중인 몬스터나 지형지물에 대한 정보까지 완벽하게 제공해 주었기에, 별다른 위험 없이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카일 협곡 내에서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마법 지도 말이에요. 저한테 넘길 생각 없어요?”

“탐나?”

“당연하죠. 그 지도에 걸려 있는 옵션 자체가 너무 사기적이잖아요!”

“얼마 줄 건데?”

“제가 칼리아에서 모은 골드 전부요. 꽤 됩니다. 당신이 놀랄 만큼.”

오민아는 인벤토리에서 본인이 가진 골드바를 꺼내 놓았다.

하나, 둘, 셋, 넷…….

어떻게 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재력인 건 확실하다.

저 정도 골드바라면 칼리아의 노른자 땅 위에 건물도 올릴 수 있을 정도니까.

“넣어 둬. 가소로우니까.”

하지만 지금 오민아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있었다.

내가 마음만 달리 먹었으면 칼리아의 금광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야,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이 칼리아란 곳에서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쓸 만한 아이템을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

“역시 당신도 눈치채고 있었군요?”

“어. 등급 높은 아이템은 NPC들과의 인연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지.”

“인연이라, 당신이 들고 있는 엘리시온도 마찬가지겠군요.”

“그래. 기묘한 인연이었지.”

그리고 이 엘리시온으로 인해 다시 한번 그 인연이 이어질 것이다.

조셉 클로드.

나의 제자인 동시에 나를 기억하지 못할 칼리아 세계관 최고의 검투사.

그러고 보면 내 운명도 참 기구하다.

사부에 이어 내 제자마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니.

“그나저나 이 카일 협곡의 어디에서 검흔을 찾을 수 있을까요? 왠지 바위나 절벽에 새겨져 있을 거 같은데.”

우리 앞에 펼쳐진 카일 협곡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광활한 광경.

맨눈으로 검흔을 일일이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자로 쭉 뻗어져 있는 길만 해도 수 킬로미터는 되어 보였으니까.

군데군데 나 있는 작은 갈래 길까지 포함하면 노가다로 찾는 것은 더 말이 되지 않는다.

“일단 걸어가면서 부딪혀 봐야겠지.”

“무대뽀로요?”

“몇 군데 찍어서 가 보려고 하는데 어때?”

나는 한스가 준 마법 지도를 다시 펼쳤다.

카일 협곡 쪽에 손가락 두 개를 얹었다가 벌리니 선택 영역이 확대된다.

마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 같다.

“저는 봐도 잘 모르겠는데요?”

오민아는 마법 지도의 기능에 감탄만 할 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라고 별수 있겠는가.

느낌이 가는 곳을 찍는 수밖에.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막힌 타이밍에 공략집이 내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당신이 짐작하는 대로, 검흔의 주인은 무림인입니다. 당신의 사부처럼 그는 등선을 앞두고 차원의 벽을 뚫었으며, 바로 이곳 칼리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는 현시점에서 약 6백 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무림에서 적수가 없던 그는 이곳 칼리아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우쳐 주는 거대한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마법의 종주를 만나 무림인은 양패구상의 승부를 벌인 뒤 이곳 카일 협곡에 은신하게 되는데…….]

무림인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사실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아직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등선을 앞두고 차원의 벽을 뚫었다면 내 사부와 비슷한 경지.

스스로를 고금제일인이라 자신 있게 말한 사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부의 라이벌이 있기는 했네!’

비록 시대가 다른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전설 속의 소드마스터가 결국 무림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내 사부와 비슷한 경지에 있는 무림인이 양패구상할 정도의 존재가 칼리아에 있다?

이곳이 아무리 마법의 대륙이라 하더라도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6백 년 전이면 머나먼 과거이긴 해도 신화 속의 상고 시대까지는 아니니까.

“호영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별거 아니야. 지도에서 어디를 찍어야 할지를 고민 중이었어.”

“그래서 결론은 나왔어요?”

“어. 바로 여기!”

나는 마법 지도에 손가락으로 터치를 했다.

공략집이 알려 준 곳.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분명 이곳에 무림인이 남긴 검흔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제자 놈도.

“가까운 데부터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기는 한데 내 감이 좀 좋은 편이라. 일단 가 보지?”

“생각보다 막무가내시네요.”

[목적지가 설정되었습니다.]

[주변에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법 지도의 내비게이션이 바로 실행되었다.

“아! 이거 진짜 탐나요!”

오민아는 연신 나의 마법 지도를 탐내며 투덜댔다.

* * *

한스를 통해 이곳 카일 협곡에 먼저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

목적은 조셉 클로드 찾기.

그리고 그들은 실종되었다.

아무런 몬스터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게 왜 2인용 퀘스트였을까요?”

“너무 쉬워서야 아니면 너무 어려워서야?”

“당연히 너무 어려워서죠. 이 드넓은 협곡에서 소드마스터의 검흔을 찾는다는 게 두 사람으로 할 일은 아니잖아요?”

오민아의 말이 맞았다.

마법 지도에 공략집까지 더해져 지금 이 퀘스트가 내게만 쉽게 느껴질 뿐, 결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밸런스가 정말 개판인 셈이다.

‘그게 아니면 무언가 대단한 기연이 안배되어 있거나.’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묵묵히 두 시간을 걸어갔을 때 마법 지도는 우리에게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길을 잃었습니다.]

“왜죠? 지도가 고장 난 것일까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확실히 이상했다.

지금까지 마법 지도가 보여 준 성능을 생각한다면 길을 잃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분명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길 안내를 다시 시작합니다.]

목적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태에서 길을 잃으니 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이십여 분을 더 걸었을 무렵,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길을 잃었습니다.]

“정말 고장 난 거 같은데요? 길을 또 잃었다고 하잖아요.”

“그런 게 아니야. 목적지 부근에 우리를 현혹하는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어.”

“그게 뭐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기문진.

무림에서 주로 쓰는 보안 장치의 일종이다.

허락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 놓는 환상의 결계.

천마신교에 몸담고 있을 때 본 적이 있었다.

신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 전체에 기문진이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한스가 보낸 사람들이 이곳에서 실종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길을 헤매다 지쳐 죽었을 것이다.

“이곳에 기문진이 설치되어 있는 거 같아.”

“말도 안 돼요! 그거 무림에나 있는 거잖아요.”

“혹시 또 알아? 전설의 소드마스터가 무림인일지.”

“너무 막 던지시는데요?”

“이 탑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해! 아참, 그런데 너는 10층에서 무림에 갔을 때 어느 시대가 배경이었지?”

“저는 21대 무림맹주가 정파를 다스리던 시기였어요. 왜요?”

“그냥.”

“호영 씨 오늘따라 너무 싱거우셔요.”

나보다는 많이 앞선 시대의 무림.

하지만 이곳에 검흔을 남긴 소드마스터는 훨씬 더 이전 시대의 사람이니 오민아로부터 특별히 얻을 정보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내 예상대로 기문진이 확실했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고 있었으니까.

갈수록 자욱해져 가는 안개도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왠지 내가 깰 수 있을 거 같은데?’

무림에 있을 적에 내가 기문진을 해제해 본 것은 단 두 차례였다.

매호평을 암살하기 위해 십만대산을 떠났을 때.

그리고 암살을 마친 후 다시 십만대산으로 돌아왔을 때.

비록 내가 기문진에 대해 많이 배운 것은 아니지만, 소드마스터보다는 6백 년 뒤의 발전된 학문을 공부했다.

무공이라면 모를까, 기문진 쪽으로는 내가 앞서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뭘 하시려고요?”

“기다려 봐. 재밌는 걸 보여 줄게.”

공략집이 아직도 감감무소식인 걸 보면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 9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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