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좋은 승부였다.
칼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검술다운 검술을 보았다.
물론 검제라는 별호는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내가 졌네.”
이든의 충격 선언이 있고 나서, 관중석에서는 난리가 났다.
“말도 안 돼!”
“갑자기 항복을 선언하다니 이거 승부 조작 아냐?”
“겨우 몸만 푼 것 같은데 항복이라니!”
관중들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나는 이든에게 별다른 외상을 입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든의 속사정은 말이 아닐 것이다.
피를 토하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
“우리,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하죠? 일단은 치료부터 하고.”
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중들의 아유에도 이든은 묵묵히 무대를 내려갔다.
내 눈에는 그의 걷는 모습이 위태위태해 보이기만 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명성을 획득하였습니다.]
투기장 최고의 거물을 잡았음에도 내 명성은 100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제약이 걸려 있는 설정이니 탑에다가 항의를 할 수도 없고.
좋아 죽으려 하는 한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판돈을 나에게 걸었으니 짭짤한 수익을 얻었을 것이며, 내가 투기장 최고의 흥행 카드로 급부상하였으니 미래에 대한 구상에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안 한스.
이제 우리는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다.
* * *
그날 밤.
이든이 묵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더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중환자였기에 안정을 찾을 시간을 주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살살 하는 건데.
“강골이니 금세 회복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거.”
회복 마법이 걸려 있는 금창약을 사 왔다.
병문안인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으니까.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그런 셈이군요. 그나저나 벌써 호흡도 안정적인 거 같고, 혹시 내공심법으로 상처를 다스린 겁니까?”
“뭐?”
내 말에 바로 호흡이 흐트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무림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내공심법이라는 말에 반응을 할 리가 없다.
“선수끼리 그러지 말고 다 털어놓으시죠. 무슨 이야기 먼저 할까요?”
내가 묵직한 돌직구를 날리자 이든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네, 도대체 정체가 뭔가?”
이걸 말로 해 준다고 이든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난 플레이어고 넌 NPC일 뿐이야. 라고 말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남들과는 다른 검술을 배운 검투사라고 해 두죠. 이든 당신처럼.”
“……재밌는 얘기로군.”
사실 내가 더 재밌다.
칼리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을 상상도 못 했다.
“그럼 이제 그쪽이 제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저에게 대결을 제안한 이유가 뭡니까?”
“네가 가진 검 때문이지. 누군가가 나에게 제보를 해 왔어. 어느 위대한 보검과 똑같이 생긴 것이 투기장에 나타났다고.”
그 말에 나는 엘리시온을 꺼내 이든의 앞에 들이밀었다.
“이거요? 모조품일 거란 생각은 안 해 보셨나 보군요.”
“자네의 검술이 형편없었다면 그렇게 넘겨 버릴 수도 있었을 테지.”
이든의 대답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의 마음을 통해 읽었던 그대로니까.
“이 검. 진품입니다. 이름은 엘리시온이지요.”
나는 빠꾸 없이 과감하게 직진했다.
계속해서 이든의 반응을 보고 싶었으니까.
예상대로 이든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엘리시온을 알고 있어? 그럴 리가 없어! 엘리시온이 쌍둥이 검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는데!
“왜 그러십니까?”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이럴 거면 금창약이 아니라 청심환을 사 왔어야지.”
“내일까지 최고 등급으로 구해 드리죠.”
“그런데 이호영이라는 이름은 자네의 본명인가?”
머리가 많이 복잡하긴 한 모양이다.
내가 클로드 가문의 사람일 가능성까지 열어 두다니.
“본명 맞습니다. 클로드 가문의 숨겨진 자식도 아니고요.”
“역시 클로드 가문과 엘리시온의 관계까지 알고 있었군.”
이든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날 기세였다.
“저의 엘리시온과 똑같은 검을 갖고 있다는 사람. 누굽니까?”
나는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물론 주인은 조셉 녀석일 테지.
중요한 것은 이든과 조셉과의 관계.
그리고 조셉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조셉 클로드. 위대하신 그분은 나의 스승이시지.”
“……스승이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조셉과 이든은 사실 나이 차가 그리 나지 않아 사제 관계일 거라곤 생각도 해 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든은 내 제자의 제자이니 사손.
달리 말해 나는 이 녀석의 사조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귀염둥이 녀석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다.
“그래. 난 행운아였지. 위대하신 분께 검술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그럼 조셉의 사부가 누군지는 혹시 알고 있…… 습니까?”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는 내가 아니다.
비록 이든이 무림의 무공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나와는 근본이 다른 검술.
궁금했다.
어떻게 조셉이 무림의 검술을 배울 수 있었는지를.
“그건 말할 수 없네. 나도 알지 못하는 일이니까. 또한 알고 있었다 한들 말할 수 없었을 거야.”
이 역시 사실.
결국 조셉 녀석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스승.”
“그건 알고 있지만 밝힐 수 없다네.”
“혹시 카일 협곡입니까?”
- 아니! 그걸 어떻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뭐 대충 짐작은 되니까.”
역시 그랬다.
카일 협곡.
그곳에 가면 녀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말없이 떠날까 하다가 결국 한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들렀다.
내가 NPC에게 이렇게 예의를 차리게 될 줄은 몰랐다.
본래 게임을 할 때면 NPC들이 하는 말들은 그냥 스킵 버튼을 누르며 넘겨 버리기 일쑤였는데.
“영영 떠나겠다고? 농담이지?”
한스는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물었다.
그 이후, 한참 동안 진땀을 뺐다.
한스를 납득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니까.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죠.”
“망할 자식!”
잠깐이지만 지내는 동안 한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미안한 마음이었다.
게다가 투기장 최고의 흥행 카드였던 검제를 박살 내고 이렇게 튀어 버리려니 마음은 더욱더 편치 않다.
“잠깐 기다려 봐.”
한스는 나를 잠시 붙잡아 놓은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엔 웬 양피지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뭡니까 그게?”
“탐색 마법이 걸려 있는 칼리아의 지도다.”
“이걸 주신다고요?”
“카일 협곡으로 간다면서. 요긴하게 쓰일 거야.”
[칼리아의 마법 지도를 획득하였습니다.]
4절 도화지 크기의 양피지이지만, 축소/확대 기능을 통해 각 지역의 상세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신비한 기능을 갖고 있는 놀라운 아이템이다.
한스가 이렇게 나오니 떠나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한낱 NPC 주제에 날 감동시키다니.
“고마워요, 한스. 잊지 않을게요.”
“그냥 꺼져 버려. 다시는 오지 말고.”
* * *
13층을 클리어하기 위해 필요한 명성은 200.
현재는 딱 반환점을 돈 상태이다.
[최정혁이 명성 48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놈은 12층을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은 채 독주를 하고 있었다.
벌써 이 녀석의 명성은 167.
적당한 규모의 퀘스트 하나만 더 클리어하게 되면 다음 층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내가 역전을 노리는 타이밍은 14층의 중반부.
그러기 위해선 지금 오민아와의 2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만 한다.
“타지에서 자기 마누라부터 찾을 만도 한데 서운하진 않아?”
“아니요. 어차피 그런 사람이니까요.”
오민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은 이웃 마을의 어느 전당포.
나는 이동하는 내내 한스가 준 마법 지도의 성능을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남은 거리: 401 미터]
[주변에 서식 몬스터: 없음]
[전방에 있는 메덴 여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이동하십시오.]
홀로그램 메시지 창까지 떠 있으니, 사실상 내비게이션이나 다름없었다.
13층을 클리어할 때까지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퀘스트 내용은 너도 아직 모르는 거지?”
“네. 전당포 주인이 동료 한 명을 더 데려오면 퀘스트를 알려 준다고 했으니까요.”
“참 이상한 전당포로군.”
직접 도착해서 외관을 보니 더욱더 이상한 곳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간판 글씨도 거의 다 지워져 있어 이곳이 전당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영업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일이다.
“꿔 준 돈 받으러 왔습니다.”
오민아가 전당포 현관에 대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뭐야 그게?”
“암호예요.”
“뭐? 그런 것도 있어?”
드륵!
갑자기 거미줄 가득한 현관문이 저절로 열렸다.
암호를 식별하는 고위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다.
전당포의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보니 옅은 빛을 내는 호롱불이 켜져 있었고, 그 뒤에는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설마 계속 이 모드로 있었던 거야?’
콘셉트 한번 독특한 노인네다.
“네가 데려온 동료가 이 남자냐?”
“예. 어르신. 호영 씨, 뭐 해요? 인사드리지 않고.”
나는 가볍게 묵례를 하며 이름을 밝혔다.
하지만 노인은 통성명을 할 뜻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는 무슨 속성이냐?”
“마법 말입니까?”
“답답한 놈. 그럼 내가 달리 뭘 물어보겠냐?”
“저는 마법사가 아닌 검투사입니다.”
퀘스트를 받을 때면 항상 거쳐 가게 되는 필수 코스.
어쩌면 또 서러운 전개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네가 검투사라고?”
“네. 제가 마법사가 아닌 것이 혹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노인은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무미건조하던 그의 표정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
“아니. 그렇지 않아. 오히려 재밌는 인연이로군. 내가 맡기려는 의뢰도 전설 속 검투사와 관련된 것이니까.”
“전설이요?”
“그래. 말 그대로 전설. 어쩌면 낭설일지도 모르지. 아직 밝혀진 것이 없으니까. 너는 혹시 소드마스터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이곳 칼리아에서는 전설로만 회자되는 경지.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경지이다.
“너희 둘이서 그 소드마스터의 검흔을 찾아와 보겠느냐?”
[2인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성공 시: 명성 200 획득. 단 기여도에 따라 차등 배분]
“물론입니다.”
“저도요.”
이것은 탑의 13층을 클리어하는 것과 관계없이 내 개인적으로도 흥미가 동하는 일이었다.
칼리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소드마스터.
그런 인물의 검흔을 발견하는 건 분명 나의 검술에도 영감을 줄 것이다.
“단, 헛수고일지도 모른다는 것만 명심해 두어라. 정말로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분명 존재할 것이다.
NPC가 주는 퀘스트에는 난이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것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소드마스터의 검흔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장소는 도대체 어디입니까?”
“카일 협곡! 그 협곡의 어딘가라는 것밖에 나도 모른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내 제자 놈이 있다는 곳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장소.
어쩌면 우연이 아닌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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