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투기장에서의 마지막 퀘스트.
지금까지는 내 계획대로 돼 가고 있었다.
이것마저 클리어한다면 내 명성은 100에 도달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오민아가 물어 온 2인용 퀘스트를 바로 진행하게 되면 최정혁과 벌어진 격차를 단숨에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한스의 표정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정말로 하겠다고?”
“네.”
“난, 상대가 누구인지 아직 말도 안 했어.”
“거물이라면서요. 그럼 된 거죠. 잔챙이는 이제 제 쪽에서 거절입니다.”
현재 내 명성은 48.
따라서 52포인트 이상을 주는 상대가 아니라면 내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거 진짜 못 말리는 녀석이네.”
“그래서 제 상대가 누굽니까?”
“검제 이든.”
이름은 들어 봤다.
투기장에서 이든은 전설급으로 취급받는 인물이니까.
그런데 검제라는 별호는 인정해 주기 힘들 것 같다.
이곳 칼리아에서는 그런 별호로 불릴 만한 인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내 제자 놈조차도.
“이든은 투기장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정말 저랑 붙는 겁니까?”
“그래. 심지어 그쪽에서 먼저 널 지목했어.”
“재밌네요.”
“위협이 될 만한 싹을 미리 밟아 놓으려는 게 아닐까 싶은데.”
왠지 그건 아닐 것 같다.
소문만 놓고 보면 그가 이 투기장에서의 위치에 그리 집착하는 모습은 아닌 거 같으니까.
“어쨌든 받아들일게요.”
“난 네가 좀 더 신중히 생각했으면 하는데. 상대가 워낙 강해서 지더라도 네 평판에 흠이 되지는 않겠지만, 상품성이 떨어지는 건 막을 수가 없거든. 어찌 되었든 네 공식 전적은 2승 1패가 되는 것이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무조건 붙습니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대결에서 이든을 꺾으십시오.]
[성공 시: 명성 79 증가]
투기장에서 얻을 수 있는 명성 제한은 100.
52의 명성만 필요한 내게 오버 스펙임은 분명하지만, 피하고 싶진 않았다.
흥미가 동한다.
칼리아에서 검제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다면 어느 정도의 수준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에휴! 알겠어. 어찌 되었든 네 판단이니까. 시합은 사흘 후야.”
“네. 궁금한 게 있는데 그쪽에서 절 지목한 이유는 뭐랍니까?”
“내가 알겠냐?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든가.”
더 이상 날 말리지는 않았지만 한스는 많이 실망한 기색이었다.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건 내게 삐친 심경을 시위하는 것만 같았다.
그로서는 나를 천천히 더 키워 보고 싶었을 터.
한스에겐 미안하지만, 이번이 나의 은퇴 무대가 될 것이다.
“난 당신이 이길 거라 생각해요.”
오민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역시 제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요. 당신, 부디 승승장구하길 바랄게요. 내 남편을 위해서.”
참 특이한 부부다.
극심한 강박증에 시달리는 남편이나, 그런 남편을 첫 내기에서부터 박살 내라고 도와주는 아내나.
* * *
사흘 뒤.
시합을 10분 앞두고서 한스가 날 찾아왔다.
“판돈 누구한테 걸었습니까?”
“몰라! 묻지도 마!”
이든과의 시합 이야기만 나오면 한스는 이 모드였다.
생각보다 많이 삐친 모양이다.
그래도 판돈을 나에게 건 걸 보면 돈 벌 운은 있는 모양이지만.
“시합을 앞두고 심란할 거 같긴 한데, 너한테 보고할 내용이 하나 있어.”
“중요한 건가 보죠?”
“어. 네 돈을 많이 꼬라박았다는 이야기니까.”
“혹시 조셉 클로드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어. 네가 말한 대로 카일 협곡 쪽으로 사람들을 투입했는데, 전원 실종 상태래. 연락망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나 뭐라나.”
“이런 종류의 사고가 흔히 있는 일이랍니까?”
“처음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카일 협곡 쪽에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시간 내서 내가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어쨌든, 수고하셨어요.”
이럴 때 잠잠한 공략집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든이 지금 막 도착했다고 하더군. 하여간 그놈도 여간 또라이가 아니야. 어떻게 매번 시합 시간에 이렇게 딱 맞춰서 오는 건지.”
“그것도 능력이죠.”
“암튼, 질 때 지더라도 험한 꼴로는 지지마.”
나를 위한 건지 아니면 내 상품 가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
“아참. 배당률은 어떻게 됐죠?”
“뭘 기대하는 거냐? 당연히 네가 언더독이지. 검제가 1.34배야.”
“스턴을 그렇게 박살 내 놓고도 여전히 무시 받는 입장이군요.”
지난 두 시합을 압도적으로 이겼음에도 여전히 검제 앞에서는 언더독.
칼리아 도박사들의 안목이 이렇게 형편없다.
지구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그냥 이건 참고로 알아 둬. 통계를 보니까 검제 배당률이 이렇게 높게 나온 건 41개월 만이더군.”
* * *
검제 이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검제의 검술 스타일은 칼리아의 다른 검투사들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한다.
“규격화되어 있는 거 같으면서도 변화무쌍한 느낌이랄까?”
이것이 검제 이든을 본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그런데 사실 이 표현에는 별 특별할 것이 없었다.
무림의 검술은 보통 이런 식이니까.
무림에서 무사들이 처음 검을 배울 때에는 정형화된 초식을 수없이 반복한다.
똑같은 동작이 언제 어느 순간에나 반사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같은 초식을 수천, 수만 번 연습하는데, 무사들은 이 경지에 이르고 나서야 조금씩 변초를 익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변초 역시 처음에는 어느 정도 규칙성을 갖지만 말이다.
변초에 익숙해지고 초식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무사는 ‘고수’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고수 위에도 훨씬 더 높은 여러 경지들이 존재하지만 칼리아에서는 사실 ‘고수’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상대했던 앙헬, 스턴을 포함해 다른 검투사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의 검술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직선적이었다.
예측이 가능했고, 빈틈이 많았으며, 너무 단순했다.
이곳 칼리아에서는 그저 힘이 세고, 스피드가 빠르며, 회피력이 좋고, 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정도로도 충분히 강자 취급을 받았다.
너무 일차원적인 수준이다.
‘결국 검제는 그런 수준에서는 벗어났다는 것이겠지.’
칼리아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림처럼 절정의 무공서가 존재하지 않으며, 축적된 노하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법에만 몰두하는 대륙이니까.
나는 무대 위에 먼저 올라가 검제의 입장을 기다렸다.
나를 향한 관중들의 환호가 들려온다.
지난 두 번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외침이었다.
나는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며 엘리시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가볍게 호선을 그리며 인사를 올렸다.
내가 본래 쇼맨십을 발휘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은퇴 무대인 만큼 이 정도의 서비스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중들은 더욱더 열렬한 환호로 내게 응대했다.
그러는 사이 검제 이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대 위를 올라와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동안 그가 무척 궁금했기에 눈빛을 교환해 주었다.
“걸음걸이가 꽤 안정적이네요?”
이든이 무대 위를 걸어오는 내내 그의 발에 주목했다.
그냥 평범한 발걸음이 아니었다.
내가 익힌 무림의 보법들과 비슷한 느낌이니까.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군.”
- 역시 수상한 놈이다. 그분의 검과 똑같은 것도 그렇고.
처음으로 내게 들려온 검제의 마음.
심상치 않은 낌새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날 수상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분’이라고 지칭한 것은 분명 내 제자 놈일 터.
“직접 절 상대로 지목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유가 뭡니까?”
“소문이 워낙 떠들썩했으니까.”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 말입니다.”
나는 이든을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녀석이 언제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널 지목한 이유가 궁금해?
“워낙 고고하게 구는 분이라 들어서 말입니다.”
“알려 주지. 네가 날 이긴다면.”
“그 이유, 꼭 들어 보죠.”
나는 엘리시온을 들어 이든을 향해 겨누었다.
관중들의 환호는 더욱더 커져만 갔다.
이든이 41개월 만에 가장 높은 배당률을 기록했다더니, 나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고 있는 것이 체감될 정도로 느껴졌다.
레프리의 시작 신호가 있고 나서도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역량을 재고 있는 것이다.
지난 두 번의 대결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과정.
검제 역시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내 쪽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참지 못하고 선공을 펼치다가 카운터를 맞는 것이 클리셰.
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엘리시온!’
마정석을 머금으며, 무려 보물급의 아이템이 되었으니 내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나는 무명보를 밟으며 이든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휘익!
내 보법에 맞춰 이든의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이든의 걸음은 무림의 스타일과 상당히 닮아 있다.
‘정말로 무림의 무공일까?’
검을 섞어 보면 어느 정도 해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나는 이든을 향해 가볍게 엘리시온을 뻗었다.
타악!
검과 검이 부딪히며 마력의 덩어리도 함께 폭발했다.
밀리는 쪽은 역시 이든이다.
보물급 무구의 위력을 실험해 볼 좋은 상대를 만났다.
- 역시 그분의 검과 같은 느낌이다!
검제 녀석은 또 놀랄 만한 이야기를 했다.
제자 놈의 엘리시온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검을 섞어 보았다는 의미니까.
도대체 둘은 무슨 관계이기에.
어쨌든 첫 합을 겨루어 봤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영추혼검을 펼칠 시간.
이든이 어떻게 응수를 할지 기대된다.
타악!
타아악!
공세를 취한 쪽은 나였고, 이든은 내 두 번의 검을 막아 냈다.
내가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이든도 마찬가지일 터.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점이 있었다.
‘확실히 무림 쪽 냄새가 나.’
검에 내공을 주입하는 방식도 그렇고, 검술을 펼칠 때의 움직임도 칼리아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는 공격의 강도를 점점 높여 나갔다.
이든도 거기에 응수하며 정확히 나와 같은 수준을 유지했다.
- 이놈, 아직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어!
시끌벅적하기만 했던 관중석은 어느새 고요해졌다.
지금까지 눈으로 본 적 없는 검술의 경지에 넋을 잃은 것이다.
“검제라는 별호, 누가 붙인 겁니까?”
“모른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관중들은 우리의 사소한 대화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적막을 유지했다.
“이제 끝냅시다.”
“시합을?”
“아니요. 그 검제라는 별호.”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기막혀했을 일이다.
적어도 검제라는 말을 들으려면 천마신교의 장로급 수준은 되어야 한다.
물론 내 사부가 절대 허용하지는 않겠지만.
“시합도 이제 끝내 볼까 하는데.”
이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나는 호흡을 한 번 고른 후 엘리시온에 마력을 주입했다.
이제 곧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든과 내 제자 놈의 관계.
그리고 나를 대결 상대로 지목한 이유를 말이다.
- 9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