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내 두 번째 상대는 스턴.
혹시 몰라서 내가 싸울 이 녀석에 대해 약간의 조사는 해 두었다.
검투사치고는 드물게 쌍검을 쓰는 스타일에 쾌검이라고 불릴 정도로 스피드에 능한 타입이라고 한다.
잔인한 싸움 방식은 이미 한스에게도 들었던 것이고.
명성이 37이나 걸린 걸 보면 지난번에 상대했던 앙헬보다는 훨씬 위급의 고수임은 분명했다.
무대에 먼저 올라선 것은 역시 나였다.
아직은 내가 도전자인 입장이니까.
“신참! 재수 없는 스턴 자식의 모가지를 베어 버려!”
“야! 난 오늘 너한테 남은 판돈 다 걸었어!”
나를 보는 관중들의 시선이 데뷔전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심지어 나에게 베팅을 한 사람들도 적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와 스턴의 배당률이 공개되었는데, 나에게 돈을 건 사람은 승리 시 5.45배의 돈을 받게 된다.
1.74배의 스턴과 비한다면 여전히 내가 언더독의 입장이지만, 데뷔전 때의 말도 안 되는 배당률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변화인 것이다.
“신참 녀석에게 돈을 건 정신 나간 놈들도 있나 보군.”
“이래서 한탕주의가 무서운 거야. 한번 맛 들이면 계속 찾게 되거든!”
“이런 배당률이 나왔으니 스턴이 꽤나 자존심 상하겠어!”
“스턴이 이 바닥에서 구른 가락이 있는데, 신참이랑 붙는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나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평가는 여전히 물음표.
앙헬을 너무 빨리 제압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대부분 운이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스턴이라는 거물과 바로 붙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한스 때문이었다.
엄청난 재물로 한스의 호감을 사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
이래서 돈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스턴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관중들의 함성은 더욱더 커졌다.
함성의 크기는 판돈에 좌우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이 대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모양이다.
“야, 꼬맹이!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혹시 알아?”
나더러 꼬맹이라니.
내가 32년 전 칼리아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엄마 젖이나 먹고 있었을 녀석이. 심지어 나는 모든 검투사들이 우러러보는 조셉 클로드의 스승이다.
어쨌든 녀석은 무대에 올라오자마자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미안, 내가 다른 사람 기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 새끼 봐라? 그럼 내가 직접 알려 줄게. 나 지금 기분이 몹시 더러워! 왜인지는 알지?”
한마디로 나랑 붙는 것이 쪽팔린 것이다.
본인처럼 이 바닥에서 잔뼈 굵은 베테랑이 새파란 신참이랑 붙는 것은 너무 이례적인 일이니까.
게다가 공개된 배당률도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고 말이다.
- 네놈의 양팔을 다 잘라 주지.
스턴이 품은 분노의 화살은 오롯이 나를 향했다.
참 좋지 않은 버릇이다.
배당률이 결정되는 것은 전적으로 도박사들에게 달린 일인데.
그나저나 한스는 누구에게 걸었는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고개를 돌려 관중 속에 섞여 있는 한스 발견하니, 그의 마음이 들려온다.
- 내가 미쳤지! 저 괴물 같은 스턴을 놔두고!
근심 한가득 담긴 얼굴.
역시 이번에도 나를 찍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데뷔전 때만큼의 배당률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수익은 짭짭하겠지.
시선을 돌리다 관중석 속에서 예상 못한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민아?’
나를 찾아왔었다고 하더니만, 정말로 오민아였다.
옆에 최정혁이 없는 것을 보니 아직 부부 상봉은 하지 못한 모양.
희한한 일이다.
그녀가 굳이 나를 찾아올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야! 신참!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스턴이 나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대꾸하지는 않았다.
기싸움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 대등할 때나 하는 거니까.
녀석은 양손에 든 검을 빙빙 돌리며 시작 신호를 기다렸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의 표정이다.
“너, 죽었어!”
휘잉! 휘잉!
시작이 선언되고 나서도 스턴은 양손의 검을 돌리는 여유를 부렸다.
심지어 유유히 나를 향해 걸어온다.
- 이 재수 없는 자식을 어떻게 요리해 줄까!
실력에 맞지 않는 여유를 부리는 걸 보니 조금 아니꼬운 기분이 들었다.
무림의 고수들은 저런 여유 가운데에서도 일말의 빈틈조차 노출하지 않지만, 지금 스턴은 빈틈 그 자체였다.
앙헬 때와 비교해서도 거의 차이를 못 느낄 정도.
소드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내 제자 놈의 경지에도 살짝 의구심이 생기려고 한다.
여기 칼리아의 검술 수준은 무림과 비교하면 낮아도 너무 낮으니까.
투욱!
나는 엘리시온을 뻗어 스턴의 왼쪽 손등을 검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쌍검을 빙빙 돌리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지 않고 거슬렸기 때문이다.
“아아악!”
스턴은 비명을 지르며 왼손으로 돌리고 있던 검을 놓치고 말았다.
놈의 손등에선 선혈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관중석도 난리가 났다.
상상도 못한 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너에게 쌍검은 비추천이야. 스턴.”
보법을 밟는 형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저 녀석이 쌍검을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활용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애송이 새끼가!”
스턴은 바로 흥분을 하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다른 검을 휘둘러 왔다.
선빵에 충격을 받았을 만도 한데, 전사의 심장을 가진 것은 인정해 줄 만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심하게 얕보이고 있거나.
투욱!
녀석의 검을 피하며 이번에 내가 공격한 곳은 팔꿈치였다.
별다른 이유가 아니다.
팔꿈치는 관절의 움직임 때문에 갑옷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곳이니까.
“아아아악!”
물론 힘은 많이 뺐다.
지금은 고통스럽겠지만 며칠 지나면 상처는 금세 아물 것이다.
검 끝으로 살짝 찔렀을 뿐이다.
나는 연이어 검을 찔러 들어갔다.
좌우 밸런스를 맞춰 주기 위해 오른쪽 팔꿈치도 살짝 만져 주었다.
검을 놓칠지 안 놓칠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아아아악!”
비명은 더욱더 커졌지만, 스턴은 악착같이 검을 붙들고 있었다.
이 부분은 칭찬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너 이 새끼!!”
심지어 녀석의 전의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눈에 가득 찬 독기는 살벌하기까지 했다.
‘아참!’
잊을 뻔했다.
기왕 좌우 밸런스를 맞춰 주기로 했으니, 오른쪽 손등도 한번 건드려 주어야 할 것이다.
“뒈져 버려어어엇!”
분명 팔꿈치의 고통이 있을 텐데, 녀석은 전혀 아랑곳 않고 나를 덮쳐 왔다.
나는 자세를 낮춘 후 스턴의 가랑이 사이를 미끄러지며 빠져나왔다.
물론 손등의 칼침은 잊지 않았다.
투욱!
이번 공격에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결국 스턴은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모두 다 잃고야 말았다.
그리고 나의 검은 이미 녀석의 목 줄기에 얹어 놓은 상황.
레프리는 바로 시합 종료를 선언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스턴에게 검을 집어 들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레프리의 판단까지는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관중들은 영혼 가출한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 네 번의 공격이었지만 힘의 차이는 분명히 느끼게 해 주었다.
관중들에게도, 스턴에게도.
* * *
시합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오민아였다.
한스가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날 맞아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등장은 의외였다.
“니가 왜 여기서 나와?”
“관리인에게 돈 좀 찔러 주니까 바로 여기로 안내해 줬어요.”
역시 한스.
그나저나 오민아와 이렇게 독대하는 건 상당히 어색한 일이었다.
탑에서도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마침, 근처에서 퀘스트를 하고 있었는데 당신 소문이 들려오더라고요. 웬 신입 검투사가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했다는.”
“우연이라는 거군.”
“네. 반가운 우연이었죠.”
내가 기억하는 오민아의 나이는 스물셋.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훨씬 더 성숙해 보인다.
“날 두 번이나 찾아왔다는 건 확실한 용건이 있다는 거겠지?”
“네.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얼마 전 2인용 퀘스트를 받았는데, 당신이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우린 거의 초면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부탁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침 이호영 당신이 근처에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남편을 놔두고 나에게 부탁한다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이지 않나? 나라면 바로 13층 어딘가에 있을 남편부터 찾을 텐데.”
“그게, 말하자면 좀 복잡하긴 한데 설명을 듣기 원하시나요?”
“당연한 이야기를.”
분명 이야기의 중간중간 오민아가 내는 마음의 소리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듣는 것은 더 중요하고 확실한 경우가 많다.
<마음>이라는 마법 속성이 갈수록 마음에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 당신이 제 남편을 꺾어 주길 바라고 있어요. 두 사람 내기 걸었다면서요?”
“이상한 이야기로 시작하는군.”
“네. 이상하게 들리겠죠. 하지만 이건 제 남편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에요.”
“왜지?”
“그 사람, 겉으로는 쾌활해 보여도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거든요. 강박증적으로 승부에 집착하는 게 문제예요. 더 큰 문제는 한 번 이긴 상대에게 지는 걸 못 견뎌 하는 성향이 있기도 하죠. 탑 이전에 프로 게이머를 할 때에도 결국 그런 강박증적인 성격 때문에 번번이 게임을 망치기도 했었어요. 재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사람인데.”
“처음부터 내가 네 남편보다 우위에 서라는 이야기인가?”
“네. 언젠가 남편이 당신에게 추월당하면 분명 못 견뎌 할 테니까요. 아직은 정혁이가 이 탑에서 순항을 하고 있지만 언젠간 힘들어지는 순간이 올 거예요. 제 직감으론 당신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봐요.”
“나를 왜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지? 난 저레벨 플레이어일 뿐인데.”
“프로 게이머 특유의 감이라고 해 두죠.”
놀랍게도 지금까지 오민아가 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다.
그녀가 입으로 내는 소리와 마음의 소리는 모두 일치했다.
“2인용 퀘스트를 나에게 제안한 건 결국 나를 1등으로 올려 주겠다는 이야기로군.”
“당신을 1등으로 올리겠다고까지는 이야기 안 했는데요? 잊으셨나 본데, 현재 제가 당신보다 순위가 높답니다. 1등은 당연히 제가…….”
“아니, 그렇지 않아. 지금까지 너는 의도적으로 남편에게 져 주고 있었으니까.”
“네?”
오민아는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탑에서 최정혁보다 앞서는 건 오민아라는 걸.
그녀는 남편의 자존심과 멘탈을 위해 일부러 페이스를 늦추고 있는 것이다.
“시치미 뗄 거 없어. 원한다면 비밀 유지는 계속해 줄게.”
내 말에 오민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부탁드리죠.”
“그리고 제안했던 2인용 퀘스트. 받아들일게.”
거절할 이유는 없다.
상대는 대박 퀘스트를 물어 왔고, 내게 어떤 적의도 품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정중하기까지 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 지금 당장은 아니야. 이곳 투기장에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오늘 스턴을 가볍게 제압했으니, 진짜 대어를 낚을 명분은 갖춰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한스가 대기실 문을 열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대애애박!”
“뭡니까?”
“너한테 오퍼가 들어왔어! 진짜 거물이랑 싸워야 되는데 해볼 생각 있어?”
물론이다.
이제 투기장을 뜰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 96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