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내 결론은 단순했다.
돈벌레의 환심을 사기 위해선, 결국 돈을 좀 써야 한다는 것.
그래서 한스가 보는 앞에서 직접 베팅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다음 경기에서는 누구한테 걸면 좋을까요?”
“글쎄. 이런 데 처음 와 보는 거라면 아무래도 정배당 쪽에 거는 것이 좋겠지. 나는 루시드를 추천하겠네.”
어차피 한스 입장에선 누가 이기든 크게 상관이 없다.
주최 측의 입장에선 손님들로부터 수수료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좋습니다. 루시드 쪽에 10,000골드 걸죠.”
“뭐?”
“왜요? 혹시 안 될 거 있습니까?”
나는 한스의 눈앞에서 직접 조그마한 골드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투기장에 하루에 판돈을 얼마나 굴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일 베팅으로 이 정도 수준은 흔치 않을 것이다.
10,000골드면 칼리아 변방에서는 집 한 채 값이니까.
“자네, 서신 전달하는 심부름꾼 아니었나?”
“아, 이건 운동 삼아 하는 거라서요. 견문도 좀 넓힐 겸.”
“그…… 그런가…… 요?”
심지어 말끝에는 ‘요’자가 붙었다.
비록 행색은 볼품없지만, 이제는 지체 높은 귀족가의 자제 정도로 보일 것이다.
- 호구를 물었다!
한스 녀석의 환호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에 대한 NPC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일단은 성공이다.
“말씀 편하게 하시죠? 제가 나이도 훨씬 어린데.”
“아무리 그래도 귀한 가문의 자제분이신 거 같…….”
“그냥 편하게 하세요. 그래야 저도 편하고 베팅도 자유롭게 하죠.”
- 진짜 호구다!
“흐흠! 정 그렇다면, 말은 편하게 하도록 하지.”
하지만 말투는 상당히 정중하게 변해 있었다.
한스 녀석은 정말로 내가 호구라는 판단이 들었는지, 내 주위에서 떠나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나로선 나쁘지 않았다.
한스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재의 칼리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셉 클로드 말입니다. 검술로 이름을 날린 건 언제부터입니까? 듣자 하니 어린 시절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던데.”
“결정적인 계기는 도리아산의 괴물을 처치한 것이었지. 어린 시절 얘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조셉 녀석.
왠지 이놈이 나의 자리를 차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조셉 클로드는 여전히 루겐 지방에 살고 있습니까? 클로드 가문이 대대로 그쪽 지역의 영지를 다스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네, 최근 동향에 대해선 완전 깜깜한가 보군. 최근 조셉 클로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수행 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심지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스토리였다.
13층을 클리어하기 전에 한 번은 조셉을 만나 볼 생각이었는데, 그게 사실상 어렵게 되어 버렸다.
어쨌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가 베팅을 한 루시드라는 검투사는 무난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져도 크게 상관은 없었겠지만, 돈을 따는 게 싫지는 않았다.
“역시, 한스 씨 말을 듣길 잘했네요. 앉은 자리에서 1200골드를 넘게 벌었어요.”
“나는 그냥 추천만 해 줬을 뿐이지, 과감하게 베팅을 한 자네가 더 대단한 거라네. 거기서 10,000골드를 털어 넣을 줄이야.”
[당신에 대한 NPC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호감도가 왜 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 경기까지는 무대 정리를 위해 30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 타이밍에 사고를 벌여 볼 작정이었다.
“다음 경기는 루첸과 앙헬의 대결이죠?”
“그래. 둘 다 신인이라 인지도는 낮지만, 나는 나름 유망주로 보고 있는 검투사들이지. 사실 이번 시합은 예측이 되지 않아서 추천을 해 줄 수가 없군.”
“시합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저도 고민을 해 봐야겠군요. 두 사람이 몸 푸는 것 좀 보면서.”
물론 이번 시합을 두고 내가 베팅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직접 시합에 나설 생각이니까.
* * *
“저…… 저기! 한스 지배인님!”
종업원 하나가 한스 앞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정말 난감한 표정.
한스가 무섭긴 무섭나 보다.
“갑자기 뭐야?”
“그…… 그게! 큰일 났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고!”
“루첸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뭐?”
비상 상황이었다.
다음 시합까지는 5분도 남지 않았으니까.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 뭐 하는 새낀데 선수들 관리를 그따위로 하는 거야!”
한스의 고함에 종업원은 죽을죄를 진 것처럼 고개를 조아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종업원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꾸민 일이니까.
루첸을 사라지게 만드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나는 그에게 은밀하게 쪽지를 전달했다.
조셉 클로드가 루첸을 보고 싶어 한다는 내용으로.
내 제자 놈은 모든 검투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이 황당한 쪽지 하나가 루첸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결정타는 바로 내 외모였다.
무림에서 부교주로부터 받은 인피면구로 조셉의 어린 시절로 변장하였더니, 루첸은 자연스럽게 나를 조셉 주니어로 생각한 것이다.
루첸은 앞뒤 재지 않고 쪽지 속의 장소로 뛰쳐나갔다.
녀석의 순수한 동경심을 이용한 건 좀 미안하지만, 일단 나도 좀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죄송합니다. 지배인님.”
“너! 지금 여기서 시합을 취소했다가는 손해가 얼마인 줄 알아? 관중들 난리 나는 건 또 어떻고!”
이쯤에서 종업원 구제도 해 줄 겸 내가 살짝 끼어들어야겠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시합 말입니다. 가끔씩 대타가 나오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시합 시간을 5분 남겨 놓고 어디서 선수를 데려오냐, 이 말이지!”
“있습니다. 적당한 선수.”
“그런 선수가 있을 리…… 설마…….”
“네. 접니다.”
미리 떡밥을 던져 두길 잘했다.
상황도 달라졌다.
한스는 이제 날 더 이상 심부름꾼으로 보지 않으니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더 쉬워진 것이다.
“정말 검술을 배운 거야? 다칠 수도, 아니 심지어 죽을 수도 있어!”
나는 바로 인벤토리에서 엘리시온을 꺼냈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그럴싸한 명검이다.
“이걸로 대답이 되겠습니까?”
“……확실히 좋은 검으로 보이긴 하네만.”
“클로드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검술로는 나름 역사 있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맡겨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 말에 한스의 깊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합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하나, 손해를 생각하니 고민인 것이다.
약관대로라면 모든 베팅 관중들에게 수수로 다섯 배를 물어 주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고민할 거 뭐 있습니까? 대타 공지하고, 다시 베팅 받으시죠?”
여전히 고민 중인 한스.
잠시 정적이 흘렀고, 한스의 대답보다 메시지가 먼저 전송되었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투기장에서 앙헬을 꺾으십시오.]
[성공 시: 명성 10 증가]
그렇다면 한스의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자네의 자신감에 베팅을 한번 해 보지.”
“감사합니다.”
“단 조건 하나와 부탁 하나가 있네.”
“조건 먼저 들어 보죠?”
“자네가 패하는 경우엔, 별도의 파이트 머니는 챙겨 주지 않을 생각이네.”
“받아들이죠.”
어차피 내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역시 쿨하군.”
“그럼 부탁 하나는 뭡니까?”
“제발 한 방에 나가떨어지진 말아 주게. 그렇게 되면 내가 손님들 볼 면목이 없거든.”
“약속하죠.”
나는 한스를 향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었다.
그로서도 나를 출전시키는 게 도박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때론 도박이 대박을 물어다 주기도 한다.
바로 오늘 밤처럼 말이다.
* * *
“뭐야! 루첸 대신 출전한다는 게 저놈이야?”
“아무런 전적도 없는 놈을 여기 출전시켜도 되는 거야”
관중들은 내 모습을 보며 아우성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사실 난 검투사와는 거리가 멀다.
피부는 기생오라비처럼 하얗고, 체구도 여리여리한 편이니까.
게다가 난 철저히 무명이니 관중들이 맥 빠져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베팅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거의 대부분이 루첸에게 돈을 걸어 버린 것이다.
잠시 후 공지된 배당률은 앙헬이 이겼을 경우가 1.001
수수료를 감안하면 양헬이 이겨도 본전치기인 셈이다.
사람들은 환불을 요청했다.
“멍청한 주최 측 같으니라고! 이런 시합은 취소해 버리라고!”
“꼼수 쓰지 말고 돈이나 돌려줘!!”
예상보다 살벌한 여론에 한스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 현실 인식을 해 버린 것.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그가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제발, 한 방에 지진 말아 줘!
정말로 내가 1초 컷을 당해 버린다면 여론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변할 터.
한스는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앙헬과 이호영의 제4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약간의 잡음은 있었지만, 예정대로 경기는 진행되었다.
무대 위에 먼저 올라간 것은 나였다.
관중들의 야유 소리가 들려온다.
신인에 대한 아량은 눈곱만큼도 없는 살벌한 곳이다.
휘익!
심지어 먹다 남은 닭 뼈다귀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술 취한 진상들은 지구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나는 엘리시온을 휘둘러 공중에서 닭 뼈다귀를 분쇄했다.
“헐! 저놈 봐라?”
“저 자식 방금 뭘 한 거지?”
이 모습에 관중들은 처음으로 내게 약간의 흥미를 보였지만 딱 그뿐이었다.
결투는 쇼맨십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뒤이어 올라온 앙헬은 관중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한 거. 4등분이었나?”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앙헬 녀석. 눈썰미는 형편없다.
“16등분. 눈이 검을 따라오지 못했나 보군.”
“미친놈.”
앙헬이 비웃음을 날렸다.
내 말을 허세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 좀 억울한데?
“앙헬! 빨리 끝내 버려!”
“질질 끌면 재미없는 거 알지?”
당연히 관중들의 응원은 일방적이었다.
판돈이 앙헬 쪽으로만 쏠렸으니까.
지금 유일하게 나의 선전을 기원하는 것은 한스뿐이다.
시작 신호와 함께 바로 대결은 시작되었다.
앙헬은 바로 전진 스텝을 밟으며 검을 뻗어 왔다.
힘이 바짝 들어간 걸 보니 일격에 끝내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빈틈이…….’
너무 많다.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고민될 정도로.
역시 칼리아의 검술 수준은 무림과 비교한다면 어린애 수준이다.
나는 무명보를 밟으며 녀석의 일검을 살짝 흘려보냈다.
마냥 피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난 녀석의 왼발을 살짝 걸었고, 무게 중심을 잃은 녀석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콰당!
나는 한스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딩신에 대한 NPC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이로써 그의 간절한 소원 하나는 들어준 셈이다.
한 방에 나가떨어지진 않았으니까.
- 94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