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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92화 (92/292)

92화

나는 주저 없이 엘리시온을 꺼내 들었다.

다행이다.

12층의 마지막을 검으로 장식할 수 있게 되어서.

“야! 너 설마 그 검으로 날 공격하려고?”

“어.”

“푸핫! 그게 가능한지 백만 년을 해 봐라!”

덴바 녀석은 날 비웃었다.

- 미친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저런 날붙이로!

마치 날 야만인 보는 듯한 저 눈빛.

로브의 결계를 깰 수 있는 고위 마법이라면 모를까, 검에 당할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원 포인트!’

공략집에 의하면, 저 로브를 뚫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곳에 모든 마력을 폭발시키는 것.

도리아산에서 천년오엽초를 복용하였으니, 마력 자체는 부족하지 않다.

문제는 나의 실행 능력이다.

“선공은 양보해 주지.”

덴바는 자신만만했다.

김세용의 마법도, 주먹도 통하지 않았으니 나를 상대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가 사양 같은 건 할 줄 몰라서.”

이런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나는 엘리시온을 꼭 쥐고는 녀석을 향해 무명보를 밟아 나갔다.

덴바 녀석은 여전히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심지어 날 비웃는 표정으로.

- 감히 내 아픈 곳을 건드려? 좌절을 선사해 주지.

내게 선공을 양보한 이유. 저 녀석은 나로 하여금 무기력감을 느끼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 이후 날 잘근잘근 밟아 버릴 생각이겠지.

하지만 절대 네 녀석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엘리시온의 날 끝에 마력을 모았다.

‘사부!’

무영추혼검을 펼칠 때면 사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만으로도 검술의 영감이 떠오르니까.

내겐 일종의 마스터키인 셈이다.

파아아아아!

나는 덴바의 얼굴을 향해 엘리시온을 찔러 넣었다.

곧바로 엄청난 저항력의 결계가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힘.

동시에 나는 모든 마력을 폭발시켰다.

천마의 후예가 악마도 아닌 고작 로브 따위에 질 순 없다.

파아아아아!

만약 이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음 일은 김세용에게 모두 맡겨야 할 것이다.

- 크크크. 어떠냐? 이것이 바로 악의 근원 나의 주군께서 하사하신…….

- ……씨바아아아!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명성이 100에 도달하였습니다.]

[12층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정산되지 않은 보상이 있습니다. 13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물론 아니다.

받을 건 받고 가야지.

김세용과는 이쯤에서 헤어져야겠다.

* * *

이번 12층에서는 꽤 많은 것을 얻었다.

[마음]이라는 유일무이한 스킬.

명검 엘리시온.

마력을 대폭 늘려 준 천년오엽초.

대량의 금.

그리고 보상으로 얻은 마정석까지.

갑자기 광산에서 김세용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형! 여기서 얻은 걸 정말로 본캐로 가져갈 수는 없는 걸까?

오피셜은 없었지만, 나는 일단 No라고 결론을 내려 둔 상태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마법 속성은 가져갈 수 있다고 했으며, 그 외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으니까.

마음을 비워 둔 상태지만 얻은 것이 많으니 미련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뭐,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이젠 보상도 정산받았으니 자동으로 차원 이동이 이루어질 것이다.

[13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나는 최정혁, 오민아, 김세용에 이어서 네 번째 순서였다.

1등이 익숙하긴 하지만, 12층 처음 시작할 때의 막막함을 생각한다면 이것도 상당한 페이스.

[13층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마법의 대륙 칼리아입니다.]

어?

[다음 층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명성 200이 필요합니다.]

뭔가 이상했다.

탑이 오류를 일으켰을 리도 없는데, 12층과 똑같은 배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심지어 메시지도 이곳이 칼리아 대륙임을 확인시켜 주었으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12층 때처럼 똑같이 시작의 마을!’

마을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집회소 역시 그대로였다.

일단 들어가서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겠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퀘스트도 받아야 하니까.

‘이상한데?’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기시감과 위화감을 동시에 느꼈다.

놀랍게도 12층 때와 똑같은 NPC들이 이곳에 있었으며,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들의 나이가 30년은 늙어 보인다는 점이다.

“저 기억 안 나십니까? 이호영입니다.”

“미안, 내가 듣보잡들까지는 일일이 기억을 못 해서.”

말도 안 된다.

여기서 내가 쌓은 명성이 있는데 듣보잡이라니.

“정말로 기억 안 나십니까? 도리아산의 괴물을 죽였던 이호영입니다.”

“미친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제가 요겐하임 광산의 흑마법사를 처리한 것도 정말 기억 안 나십니까?”

“이거 아주 참신한 또라이로구만! 뭐? 누가 누굴 죽여?”

역시 뭔가 달랐다.

이곳은 내가 알던 칼리아가 아니다.

NPC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만 들어 봐도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걸 알 수 있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억울하지만 빠르게 인정해야만 한다.

“이런 싱거운 놈을 봤나!”

NPC들과 대화를 좀 더 나눠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12층 칼리아의 32년 후의 미래라는 것을.

물론 32년 전,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종의 평행 세계니까.

문득 궁금해졌다.

12층에선 내가 죽였던 도리아산의 괴물과 흑마법사 덴바.

13층에서는 누가 죽였었는지를.

“그거,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냐?”

“아, 그게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각각 누구였습니까?”

“각각이라니? 21년 전에 혼자서 한 일인데.”

역시 다른 역사를 가진 세상이었다.

시기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공통점은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둘을 처리했다는 것.

“그래서 그게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야! 위대한 검투사, 조셉 클로드 경이지!”

이건 가장 충격적인 뉴스였다.

조셉 클로드.

내가 거둔 제자 놈이 위대한 검투사라니.

‘그 미련곰탱이 같은 놈이?’

내가 가르쳐 봐서 아는데, 이놈은 사실 위대하게 성장할 정도로 자질이 뛰어난 녀석은 아니었다.

혹시 동명이인인가 싶어 확인해 봤지만, 내 제자 놈이 맞았다.

캘리 클로드의 막내아들 조셉 클로드.

“그런데, 조셉 클로드 경의 검술이 그렇게 뛰어납니까?”

내 말에 NPC의 미간이 좁혀졌다.

-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아니면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아! 제가 꽤 오랫동안 속세를 등지고 살아서 말입니다.”

이상한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내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NPC는 개의치 않고 대답해 주었다.

“조셉 클로드 경은 칼리아 대륙의 이단아라고도 볼 수 있지. 마법의 시대에 살면서도 검술 외길을 걸으며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앞두고 있으니까.”

“소드마스터요?”

칼리아 세계관에서는 전설 속의 경지였다.

12층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무맹랑한 허구쯤으로 여겼던.

“그래! 조셉 클로드 경이라면, 정말로 소드마스터가 될지도 모르지.”

믿기지 않는다.

사부가 묘사했던 이세계의 소드마스터는 무림으로 치면 무림맹주급의 경지.

그걸 내 제자가 눈앞에 두고 있다니, 그사이 도대체 무슨 기연을 만났기에.

만나 봐야겠다.

날 알아보지 못할 테지만, 한 번은 만날 기회를 만들어 볼 것이다.

그 전에 일단은 퀘스트 먼저.

* * *

초반은 12층의 판박이였다.

집회소의 NPC들은 나에게 의뢰를 맡기려 하지 않았다.

“자네의 마법 속성은 무엇인가?”

“사실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그럼?”

“검투사입니다.”

이 대답에 바로 표정이 바뀐다.

“미안하네. 딴 데 가서 알아보게.”

여전히 검투사는 마법사에 비해 천대받는 세상이었다.

내 제자 놈이 검술의 위상을 끌어올리긴 했지만, 이곳의 NPC들은 마법사를 훨씬 더 선호했다.

하는 수 없이 집회소에 있는 모든 NPC를 상대로 순회를 돌았다.

어쩌면 12층 때와 마찬가지로 잡일 정도는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검투사라고?”

“네.”

“검투사에게 큼지막한 의뢰를 맡기기엔 좀 그렇고, 혹시 서신 전달하는 일도 괜찮겠나? 미안하지만 보수는 좀 짜다네.”

다행히 내게 제안을 해 온 NPC가 있었다.

그런데 헛웃음이 나온다.

또다시 서신 전달이라니.

“어디로 가는 서신입니까?”

“제논 마을에 있는 투기장일세. 자네 같은 검투사들이 대결을 펼치는 곳이지.”

“하겠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할 거라 믿으며 결국 의뢰를 받아들였다.

퀘스트 완료 시 얻게 되는 명성은 이번에도 역시 1.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에 내게 박탈감을 선사하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최정혁의 명성이 24 증가하였습니다.]

정말 치타 같은 놈이었다.

나는 이제 겨우 13층에 들어섰을 뿐인데, 녀석은 벌써 명성을 74나 쌓았다.

여기서 더 벌어지면 따라잡기가 어려워질지도 모르니 분발해야겠다.

내기에서 질 수는 없으니까.

* * *

사흘을 이동해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논 마을의 투기장.

내가 활약했던 32년 전에는 아마 이런 것이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검투사가 더 희귀한 존재였으니까.

“검투사들의 투기장이라.”

세월이 많이 흐르긴 한 모양이다.

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미 두 명의 검투사가 무대 위에서 한판 벌이는 중이었다.

수십여 관중들은 무대를 에워싸며 괴성을 저마다 내지르고 있었다.

“에라이! 머저리 같은 자식! 다 이긴 승부를!”

“젤로우! 네놈이 지면 난 끝장이라고! 너한테 베팅한 돈이 얼만데!”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투기장의 관리인 한스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것이지만, 잠시 구경 좀 해 봐야겠다.

이 시대의 검술 수준이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맥주 한 병을 주문해 목을 축이며 두 검투사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나름 흥미진진했다.

두 검투사의 검술 경지가 고수여서가 아니다.

절묘하게도 실력이 엇비슷해 승부 예측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인상 험악한 거구의 남자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투기장은 처음이니까요.”

“얌전하게 구경하는 걸 보니 돈을 걸지는 않은 모양이군. 모름지기 투기장에선 베팅을 하고 봐야 제맛인데. 아 참. 나는 여기 관리인인 한스라고 하네.”

한스.

알고 보니 내가 가져온 서신을 전달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실, 저는 젠킨스 자작의 서신을 전달하러 온 사람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명성이 1 증가하였습니다.]

“수고했네. 기왕 온 김에 베팅이나 좀 하고 가지?”

심부름꾼을 상대로 영업이라니. 그러고 보니 생긴 것부터가 돈 꽤나 밝힐 관상이다.

“도박에는 관심이 없어서.”

“쳇! 재미없는 친구로군.”

한스는 내게 더 이상 볼일이 없어지자 등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예기치 못한 메시지가 있었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이 타이밍에 공략집이라면, 십중팔구는 퀘스트 생성에 관한 것일 터.

나는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집회소에는 당신이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투기장에서 다른 검투사와 대결을 하며 명성을 쌓으십시오. 투기장의 관리인 한스의 환심을 산다면,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액이라도 돈 좀 걸어 보는 건데.

생각해 보니 이제부터 돈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기도 했다.

내 인벤토리에는 순도 높은 금광석이 빼곡하게 들어 있으니까.

“저기, 말씀 좀!”

“뭔가? 혹시 베팅할 마음이 다시 생긴 건가?”

“……아. 네.”

정말 징한 녀석이다.

나는 한스 앞에서 돈 자루를 풀어 놓았다.

“그럼 서둘러야 하네. 다음 경기 선수들이 이미 몸을 풀고 있는 중이라서 말이야.”

“네. 그건 그렇고, 혹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겁니까?”

“왜? 누구 추천할 사람이라도 있는가?”

“아, 그게 아니라 저도 검을 좀 배운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심부름꾼인 자네가?”

한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경기의 질이 떨어지면 손님도 함께 떨어져 나간다는 것.

한스의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가관이었다.

- 이 새끼가 누구 사업을 말아먹을 일이 있나!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어떻게 하면 한스의 환심을 살 수 있는지를.

- 9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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