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김세용이 지렁이들을 몰살시킨 후, 요겐하임 광산에는 잠시 평온이 찾아왔다.
흑마법사 덴바 녀석도 당황했을 것이다.
지렁이 떼로 우리를 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멘탈 정도는 흔들어 놓을 작정이었을 테니까.
지금 그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졌다.
탕! 탕!
김세용의 거친 곡괭이질이 광산 전체에 울려 펴졌다.
돈독이 제대로 올랐는지 이놈은 정말 열심이었다.
요겐하임 광산의 모든 휘은석을 싹쓸이라도 할 기세.
어차피 15층이 끝나면 본캐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뭘 이리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다.
“쉬엄쉬엄 좀 해라. 너 벌써 눈 돌아갔어.”
“지금 깔린 게 돈인데 내 눈이 안 돌아갈 수가 없잖아!”
“그런데 돈 모아서 어따 쓰려고? 어차피 본캐로 이전도 안 될 거 같은데.”
“형, 그런데 정말로 이전이 안 될까?”
“흐음. 아마도?”
사실 나도 확답은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만약 이전이 가능했더라면 공략집이 미리 일러 주었을 터이니, 짐작만 하고 있을 뿐.
“그나저나 형도 곡괭이질 좀 해 봐.”
김세용은 캐 놓은 휘은석을 인벤토리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써 인벤토리 한계 수용량을 거의 다 채워 간다.
“곡괭이질? 내가 워낙 귀하게 커서 말이야.”
“참나! 누구는 막 큰 줄 아나! 나도 집에서는 곱게 자랐다고!”
저 얼굴을 보면 절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외모로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이놈의 살벌한 인상을 보면 살아온 세월이 너무 잘 보일 정도니까.
“너나 많이 챙겨 가. 야, 그런데 이 많은 걸 언제 다 처분하려고!”
“그러지 말고 형도 좀 해 봐. 형은 운도 좋잖아!”
그건 니케의 반지가 있을 때의 이야기고, 사실 난 뽑기 운이 없는 사람이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니, 세상의 첫 뽑기부터 꽝이었던 셈이다.
“거 참. 더럽게 비싸게 구네. 여긴 게임 세계관이라 생각보다 잘 뜰 거라고 형이 그랬잖아!”
“알았어, 인마!”
할 수 없이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보채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잘 어울리는구만! 크크.”
적당한 곳을 찾아 곡괭이를 휘둘렀다.
물론 니케가 없는 상황이니 기대감은 전혀 없다.
탕! 탕!
날씨 탓인지 몇 분 만에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입에서는 단내가 풀풀 난다.
아무리 돈독이 올랐다지만, 김세용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난 여기까지만.”
어차피 진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타아앙!
마지막으로 내리친 곡괭이의 거친 날이 바위를 절단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끝이라는 생각에 힘을 좀 더 준 것이 제대로 맞은 것이다.
절단면에서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누런빛이 황홀하게 빛났다.
“혀…… 형!”
“……금이네?”
“미친! 무슨 이딴 운빨이 다 있어!”
김세용은 금을 보더니 나보다 더 흥분을 했다.
동서고금을 넘어 다른 차원에 와서도, 금이란 녀석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신기한 광물이다.
갑자기 김세용이 바빠졌다.
곡괭이질을 하는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형! 대박!”
내가 금맥을 제대로 발견한 것인지, 곡괭이로 때리는 곳마다 누런빛의 세계가 펼쳐졌다.
지금 이 상황이 부캐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세용이 녀석. 눈이 돌아가지 못해 거의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형도 빨리 담아!”
녀석의 손은 더욱더 바빠졌다.
이미 인벤토리를 꽉 채운 휘은석을 꺼내 놓아야 했으니까.
“금도 금인데 이제부터 정신 제대로 차려!”
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흑마법사 덴바.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놈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서라도 다음 수(手)를 내놓을 터.
그리고 내 짐작은 바로 현실로 다가왔다.
크아앙!
크아앙!
불길하게 들려오는 사운드.
검은 기운이 깔리며 무언가가 형체를 잡아가고 있었다.
덴바 놈이 무언가를 소환해 내고 있는 것이다.
“형! 이게 뭐야!”
광폭한 울부짖음과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수십 마리의 데스독(Death Dog)이었다.
저것은 생명체도 몬스터도 아니다.
흑마법사가 혼령술로 불러낸 일종의 강시.
사이즈는 대형견을 넘어서서 거의 퓨마 수준이었다.
데스독의 퍼렇게 빛나는 눈을 보고 있으니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형! 저놈들은 내가 처리할게!”
그 순간 김세용이 다시 한번 화염 방사를 펼쳐 냈다.
화르르르!
수만 마리의 지렁이들을 몰살시켰던 그 호쾌한 불꽃은 데스독을 향해 날아갔다.
“세용아! 힘 빼지 마!”
이 공격은 무위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데스독은 화염 계열 마법에 유난히 높은 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둔탁한 무기로 데스독의 머리를 공격하십시오. 물리 공격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흑마법사 덴바가 괜히 데스독을 소환한 것이 아니었다.
놈은 김세용이 화염 계열의 마법으로 무쌍을 찍은 모습을 생생히 보았을 터.
우리를 또 한 번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맞춤형 소환물을 꺼낸 것이다.
크아아앙!
크아아앙!
데스독들은 화염 방사에도 끄떡없는 모습을 보이며 더욱더 광폭하게 울부짖었다.
“뭐 이딴 놈들이 다 있어! 바로 통구이가 될 줄 알았는데!”
“불 쓰지 말고 곡괭이나 집어 들어!”
나도 인벤토리에서 또다시 여분의 곡괭이를 꺼낸 뒤 헤드를 부러뜨렸다.
빠악!
“세용아, 혹시 무섭냐?”
“무섭긴 개뿔!”
빠악!
녀석도 나를 따라 곡괭이의 헤드를 부러뜨리며 몽둥이를 만들었다.
역시 전사의 심장.
이놈을 데려온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형! 불도 안 먹히는데 이런 몽둥이로 될까?”
“어. 무조건 되니까 대가리만 때려!”
흑마법사 덴바가 간과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녀석은 김세용의 화염 공격을 파훼하기 위해 데스독을 불렀겠지만, 정작 저놈은 불을 쓰는 것보다 더 잘하는 게 있었다.
“이렇게 몽둥이로 만들어 놓으니까 감촉이 또 다르네. 크크.”
“가자.”
우리 2인조는 울부짖는 데스독들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덴바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는지 놈들은 일제히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앙!
빠아아악!
김세용이 휘두른 풀스윙에 데스독 한 마리가 대가리를 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본인도 놀랐을 것이다.
마력을 쏟아부은 공격도 안 통하는 상대가 이렇게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
하지만 김세용에겐 이런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빠아아악!
나도 질 수는 없었다.
정석적인 빠따질은 세용이만큼은 못 하겠지만, 탑에서 검으로 갈고 닭은 가락이 있으니 타격 자체에는 자신이 있다.
빠아아악!
* * *
탑의 12층은 마법의 대륙 칼리아.
이곳에서 우리는 게임 미션이자 마법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 플레이어들은 모두 제각기 하나씩의 마법 속성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토대로 부캐를 키워 나갔다.
본캐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오로지 새롭게 얻은 마법.
하지만 예외는 늘 있는 법이었다.
“형! 우리 너무 쩌는 거 아니야? 크크크.”
“김세용! 뒤!”
빠아아악!
김세용의 공격에 또 한 마리가 뻗어 버렸다.
공략집이 아니었으면 애를 좀 먹을 뻔했다.
일부러 머리가 아닌 다른 곳을 공격했을 때에는 데스독의 상처가 바로 수복되었으니까.
그리고 김세용의 스윙 파워는 정말로 가공할 만했다.
이놈은 정말 물 만난 고기처럼 빠따질을 해 대었다.
물리 공격에 약한 데스독을 만나 이놈은 원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형 버스를 타길 잘했어!”
이놈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가?
사실 요겐하임 광산에 와서는 김세용이 날 캐리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편하게 머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이 녀석은 몸뚱이로 실질적인 힘을 쓰고 있었다.
빠아아악!
우리의 신들린 빠따질에 수십 마리의 광견들은 이제 거의 정리가 다 되어 갔다.
나도, 김세용도 여기저기를 물리며 상처를 입었지만, 강시들을 상대로 이만하면 싸게 막은 것이다.
스르르르!
흑마법사 덴바도 결국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지 남은 데스독을 모두 역소환해 버렸다.
이렇게 우리 손에 소환물들이 죽어 봐야 본인 마력만 손실될 뿐이니 현명한 선택이다.
“형, 그나저나 흑마법사 이 자식은 언제 나오는 걸까?”
“이제 나오게 해야지. 방법은 네가 아주 잘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인벤토리에서 다시 곡괭이 두 개를 꺼냈다.
이미 금맥은 발견했으니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덴바 녀석은 그걸 두고 보지 못할 테고.
“급하면 알아서 쳐 나오겠지. 서두르자, 세용아.”
“어. 형.”
덴바가 직접 나올지, 아니면 계속해서 소환물을 상대해야 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그 어떤 것이 나오든 공략집이 있는 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와 김세용은 다시 신나게 순도 높은 금광석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13층에 올라가면 이것으로 바로 쇼핑부터 할 생각이다.
운이 좋다면, 게임 미션이 진행되는 15층까지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마아아안! 이 나쁜 새끼들아!”
그 순간, 등 뒤에서 경박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좀 다르지만, 누구인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흑마법사 덴바.
아주 왜소한 꼬맹이 같은 녀석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이 나쁜 도둑 새끼들!”
덴바 녀석은 우리 둘을 번갈아 가며 쏘아 보았다.
어이없게도 우리를 정말로 나쁜 놈으로 보는 눈빛이다.
정작 이 광산 전체를 강탈한 건 본인이면서.
“너희 둘! 인벤토리에 넣은 거 도로 다 꺼내 놔!”
녀석은 최대한 근엄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거 같은데, 여전히 음색은 경박했다.
김세용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덴바를 향해 불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전 어이없네. 이런 꼬맹이가 흑마법사라니!”
그 말에 덴바의 눈빛이 심하게 요동쳤다.
“너! 꼬맹이라는 말로 날 도발할 작정이었다면, ……실패했어.”
“뭐?”
“지금 난 아주 침착하니까 말이야.”
- 젠장! 이래서 내가 직접 안 나서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확인되었다.
덴바 녀석이 마음으로 내는 목소리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던 것.
흑마법사치고 정상인 놈이 없다고 들었는데, 이런 종류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야, 꼬맹아.”
“안 통한다니까!”
“그동안 잘못한 게 많으니 이제 벌 좀 받자.”
내 말에 덴바의 표정이 썩어 간다.
이렇게 유치한 도발이 먹힐 줄이야.
“이런 미친놈! 너희 두 놈 다 갈기갈기 찢어 죽인 뒤 내 소환물로 만들어 버릴 거야!”
외모가 이래서 그런지, 말하는 것도 꼭 꼬맹이처럼 느껴졌다.
김세용은 코웃음을 치며 덴바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뒈져라, 꼬맹이!”
화르르르르!
김세용의 특기인 화염 방사.
녀석의 손끝에서 불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대단한 놈이다.
어린이 같은 저 얼굴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을 내뿜다니.
스르르르.
하지만 기습은 무위로 돌아갔다.
김세용의 화염 공격은 덴바의 코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뭐지?’
뭔가 이상했다.
분명 덴바는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으니까.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덴바가 입은 로브에는 계약을 맺은 악마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로브로 인해 덴바는 모든 종류의 마법에 강한 내성을 갖습니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덴바가 아무런 소환물도 없이 우리 앞에 나선 이유.
악마의 힘이었다.
“돼지! 그딴 건 안 통한다고!”
“에라이! 그럼 이건 어떠냐!”
김세용이 덴바를 향해 달려들며 주먹을 뻗었다.
녀석도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또한, 덴바의 로브는 물리 공격에도 강력한 저항력을 갖습니다.]
타아앙!
“와! 씨! 뭐야! 지금 내 주먹이 튕겼어!”
덴바는 김세용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야, 돼지! 그게 다야?”
[그럼에도 조금 더 효과적인 공략 방식은 마법보다는 물리 공격입니다. 마력을 원 포인트에 집중시켜 공격하십시오.]
원 포인트라.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었다.
검.
마법의 대륙 칼리아에서 다시 한번 검의 위대함을 보여 줘야겠다.
- 9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