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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89화 (89/292)

89화

“이유라도 좀 들어 보고 싶은데. 왜 나지? 난 11층에서 너의 동료를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거든.”

오두호의 진의가 궁금했다.

나머지 녀석들이야 그냥 꼭두각시일 뿐이다.

“네가 가장 위험한 녀석이니까.”

“내가 위험하다고?”

이 녀석은 애매한 말로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오두호 일행의 타깃은 내가 유일하지 않다.

12층의 첫날, 오두호 녀석은 ‘나부터’ 죽이겠다고 다짐을 했으니까.

“넌 가장 음흉한 놈이기도 하지.”

이 말엔 바로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본의 아니게 실제 레벨을 속여 왔으며, 심지어 이젠 마음의 소리까지 엿듣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난 아주 놀라운 걸 듣고야 말았다.

- 널 죽이고, 지금이라도 살성이 되는 수밖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오두호가 갑자기 살성이 되겠다니.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살성 도전은 탑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그렇다면 이 제안은 최근에 있었을 확률이 높다.

달성 조건은 나를 죽이거나, 혹은 나와 내 동료들까지 죽이거나. 와 같은 것이겠지.

“너희들도 오두호의 생각대로 날 정말 죽여야 한다고 생각해?”

오두호의 일행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이들은 뭔가 주체성이 상실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철저하게 오두호에게 의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의 리더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한 명이 입을 열자 나머지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비 신도도 아니고 아주 가관이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히스토리가 있을 것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오두후에게 여러 번 생명의 빚을 지었을 터.

이들의 형편없는 능력치로 지금까지 똘똘 뭉쳐 생존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거대한 구심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오두호. 하나만 묻자.”

궁금한 것이 생겼다.

이 녀석이 대답을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의 궁금증은 풀어 주도록 하지. 물론 가능한 것이라면.”

“이 탑에서 넌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지?”

내가 만약 똑같은 질문을 받았더라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지 스스로도 생각해 보았다.

사실, 거창한 목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한 층 한 층 탑을 오르며 살아남는 것 정도.

살얼음판 같은 매 층마다 긴장과 안도를 반복해 오며 그저 생존해 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오두호는 어떤 생각인지 궁금했다.

어떤 연유로 살성의 제안을 받았으며, 그에 응하여 살성 도전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본인의 입으로 솔직히 대답해 줄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의 목소리는 내게 사실을 말해 줄지도 모른다.

“나와 내 동료들이 마지막까지 생존하는 것. 그 외엔 없다.”

“오두호, 네가 말하는 ‘내 동료’에 적어도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군.”

녀석은 내 질문에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미스터리한 일이다.

놀랍게도 이 녀석의 말은 진실이었으니까.

- 살성이 되기 위해선 이놈을 죽여야만 해. 힘을 얻으면 동료들과 계속 생존해 나갈 수 있다.

살성이 되고자 하는 이유가 독특했다.

이 녀석은 본인의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택적 박애주의자.

탑에서 참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났지만, 오두호 이 녀석도 참 특이한 놈이었다.

“그럼 죽어라. 이호영.”

오두호가 신호를 내리자 이들 일행은 일제히 캐스팅을 시작했다.

뭔가 좀 씁쓸하다.

이 녀석은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마냥 악하지만 않다는 사실이.

그리고 녀석의 신념을 죽음으로 꺾어야만 한다는 현실이.

“방 안에선 좀 곤란하지 않겠어?”

여기서 싸웠다가는 건물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휘익!

나는 창문을 열고 4층 높이의 여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창문 사이로는 파이어볼과 얼음기둥의 향연이 내 뒤를 쫓아 쏟아져 나온다.

* * *

12층을 시작한 후 동료들과 헤어진 것은 약 보름 전의 일.

이들은 그사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탑의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게임적인 특성이 있었지만, 12층은 대놓고 게임 미션이었으니 그 특징은 더욱 두드러졌다.

레벨업을 거치며 이들의 마법은 몇 단계 더 진보된 형태를 보였다.

초반에는 겨우 탁구공만 한 파이어볼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면, 지금은 거의 사과 크기 정도는 되어 보인다.

사악! 사악!

하지만 내가 휘두른 엘리시온 앞에 이들의 공격은 전부 와해되어 버렸다.

이 정도의 마법 공격에 당해 줄 생각은 전혀 없다.

“말도 안 돼!”

“12층에선 더 이상 스킬을 쓸 수 없을 텐데!”

녀석들은 무영추혼검을 스킬로 오해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소문. 이미 들은 것 아니었어?”

내가 검술로 도리아산의 괴물을 사냥한 소식은 이 근처 일대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분명 오두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작의 마을로 복귀하고 있는 나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 것만 봐도 내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의미니까.

나는 오두호 일행의 앞으로 걸어갔다.

내 코앞까지 여전히 마법 공격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괜한 짓이었다.

사악! 사악!

미안하지만 적어도 12층에서는 플레이어가 마법으로 내게 위협을 주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두호를 제외한 모두는 내 모습에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 소문대로로군.”

오두호는 체념한 듯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기에 소문을 들었으면 적어도 실행 시기는 변경했어야지.

탑이 오두호에게 살성이 되기 위한 조건을 어떻게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감이야. 오두호.”

아까운 인재지만 어쩔 수 없다.

나와 사생결단의 의지를 품었으니 죽이는 수밖에.

돌연, 오두호의 눈빛이 변했다.

무언가 결연한 의지를 다진 느낌.

녀석은 갑자기 내게 달려들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뭔가 이상해!’

마법사 입장에선 검투사와 대결할 때에는 거리를 벌리는 것이 정석.

상식을 벗어난 돌발적인 움직임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나의 검을 펼쳐 나갔다.

- 다음은 없어!

오두호는 이 한 방에 모든 것을 건 모양이다.

화르르르!

지독한 화염이 나를 덮쳐 온다.

녀석은 남아 있는 모든 마력을 다 쏟아부은 것이 틀림없었다.

다섯 줄기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의 줄기들은 그동안 경험한 그 어떤 마법보다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쑤우우욱!

하지만 나의 엘리시온 이 모든 붉은 위협들을 뚫어 낸 뒤 마침내 오두호의 가슴마저 뚫어 버렸다.

울컥!

오두호의 입에서는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에도 녀석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 살‥…..”

녀석의 입이 힘겹게 움직였다.

내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이다.

마법사 주제에 검투사에게 거리를 내준 것도 어쩌면 이를 위함인지도 모른다.

- 살려 줘! 내 동료들만은!

미친놈.

감동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가는 길에 마음은 편하게 해 주어야겠지.

“살려 줄게. 네 동료들.”

오두호라는 구심점을 잃은 후 이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내 말을 믿었던 것인지, 녀석은 바로 눈을 감았다.

[플레이어 오두호가 사망하였습니다.]

이렇게 내 손으로 또 플레이어를 죽이고야 말았다.

[살성의 길에 도전하시겠습니까?]

* * *

내가 탑으로부터 살성 도전의 제안을 받은 것은 벌써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도플갱어 미션 때 김준성을 죽이면서.

두 번째는 자격 갱신의 장에서 살성 한강혁을 죽이면서.

마지막으로는 바로 지금, 오두호를 죽이면서.

물론 이번에도 거절이었다.

이러다가 탑에게 단단히 찍힐지도 모르겠다.

약속대로 오두호의 동료들은 모두 살려 주었다.

오두호가 죽은 뒤 혹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폭주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내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무기력하였고, 현실을 받아들였으며 내 제안에 순응하였다.

1층에서부터 이들을 캐리한 오두호가 새삼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찾은 곳은 시작의 마을에서 처음 퀘스트를 받았던 집회소였다.

“이보게 이호영!”

“소문은 들었네! 도리아산의 괴물을 잡았다면서?”

“난 자네가 처음부터 비범해 보였다니까!”

내 명성이 99에 도달하자 나를 대하는 NPC들의 태도가 180도 돌변했다.

퀘스트를 받지 못해 난감해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내가 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의뢰를 좀 부탁해도 되겠나? 요즘 해결되지 않는 골칫거리가 있어서 말이야.”

“이보게, 이호영! 사례금은 두둑하게 줄 테니 내 말 먼저 들어 보게나!”

이제는 내게 의뢰를 맡기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황이 되었다.

“일단 한 번씩 다 들어나 봅시다.”

이제 내게 필요한 명성은 단 1.

사실 어려운 의뢰는 맡은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혹시라도 혹할 만한 보상을 제안하는 NPC가 있지 않나 확인해 보기 위해서.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반가운 메시지 알림음이 떴다.

[명성 99의 플레이어는 NPC와 보상 협상이 가능합니다.]

[미스터 체첸의 의뢰를 받는 것을 추천합니다.]

협상이 가능하다니.

모르고 지나갔으면 억울할 뻔하였다.

“체첸 씨. 당신이 내게 의뢰를 맡긴다는 게 뭐였었죠?”

“아…… 그게, 요겐하임 광산에 살고 있는…….”

“흑마법사 퇴치였던가요?”

“그렇다네.”

“제 기억으론 성공 보상으로 2만 골드를 불렀던 거 같은데.”

“그래! 좀 위험한 임무이긴 해도 그 정도 보상이면 자네 마음에 들 거라 생각했다네.”

물론 적은 금액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닦달하면 분명 더 좋은 것이 나온다.

공략집이 괜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뇨. 2만이면 금액을 너무 후려쳤어요. 그 흑마법사 때문에 요겐하임 광산의 채굴 작업이 올 스톱 되었잖아요.”

“그……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광산의 경제적 가치가 고작 2만 골드입니까? 그 정도면 내가 광산 하나를 사고 말지.”

내가 힘을 주어 말하자 체첸의 눈빛이 흔들렸다.

“……후우. 그래 자네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 하지만 내가 말한 2만 골드는 사실상 최대치를 제안한 것이라네.”

“그럼 당신의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2만이 최대치라는 체첸의 말은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녀석의 길드에서 소유하고 있는 광산이 방치되면서 돈줄이 막혔을 테니까.

“2만 2천! 이게 정말로 한계야!”

쥐어짜 내는 걸 보니 다급하긴 한가 보다.

하지만 2만이 2만 2천이 되었다고 해서 매력적인 제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아하니 돈줄도 막힌 거 같은데, 골드 말고 다른 거로 걸어 보시지요. 에누리 없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급한 사정을 알았으니,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내가 마지막 기회라고 엄포를 놓았으니, 체첸은 생각이 많아질 게 분명했다.

이럴 때 시간을 많이 주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다른 NPC를 향해 발걸음을 살짝 돌렸다.

“잠깐! 어딜 가려는 겐가! 내 마지막 제안은 들어 보고 가야지!”

격양된 말투를 보아하니 이제야 확실해졌다.

녀석이 내게 만족할 만한 제안을 하리라는 것을.

- 9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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