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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88화 (88/292)

88화

집회소가 있는 시작의 마을로 돌아가는 감회가 남달랐다.

고작 명성 1을 올리기 위해 서신 전달을 하러 갔다가 무려 99가 되어 돌아가게 되니, 금의환향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명성이 100이 되는 순간 다음 층으로 이동하게 되니, 지금의 난 사실상 만렙이나 마찬가지.

실제로 나는 꽤 유명해졌다.

캘리 클로드의 영지를 떠나 시작의 마을로 돌아오는 동안,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내 이름을 숱하게 들었을 정도니까.

‘그나저나 손서연은 안 죽었겠지?’

그 녀석을 업고 올 순 없었기에 대충 치료만 해 준 뒤 양지바른 곳에 버리고 왔는데, 아마 살아 있긴 할 것이다.

천하의 살성이 객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밤이 깊었기에 마을 중심부의 주점에 들렀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술도 좀 마시고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좀 취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탑에서는 자주 있지 않은 기회이니까.

늦은 시각이었지만 주점의 테이블은 거의 만석이었기에 다른 사람과 합석을 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이미 두 명이 더 있었는데 조나단과 애쉬라는 녀석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애쉬가 내게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어. 외지인이라서.”

“요즘 무슨 일이 있나? 왜 이렇게 외지인들이 많은 건지.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도 너와 얼굴 생김새가 비슷하더군. 넌 어디 출신이지?”

“한국.”

“한국? 칼리아에 그런 곳도 있었던가?”

“칼리아는 넓으니까.”

“하긴.”

대충 둘러댔더니 녀석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마법의 대륙 칼리아답게 이 두 녀석도 마법사였다.

조나단은 화염 속성, 애쉬는 빙결 속성.

이 두 가지는 가장 흔하게 각성하는 속성이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 주점만 조사해도 한 트럭은 나올 것이다.

“이봐 리(Lee)! 너도 혹시 마법사인가?”

이 질문이 올 때마다 나는 정체성에 혼란이 오곤 한다.

12층을 시작하자마자 나도 마법 각성을 하긴 했다.

내 마법 속성은 <마음>.

하지만 드넓은 칼리아의 그 누구도 이런 속성을 각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

또한 마음 속성은 완벽한 비전투용이었기에 이걸 마법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기도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는 더 큰 이유는 내 마법이 가진 특성 때문.

타인의 마음을 훔쳐볼 수 있는 능력을 커밍아웃하는 건 곤란한 일이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난 마법사가 아니야.”

“그럼?”

“검투사.”

나의 대답에 조나단과 애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유는 잘 알고 있다.

마법의 대륙 칼리아에서 검을 수련하는 건 너무 드문 일이니까.

“검이라니 멋지군.”

물론 거짓말인 건 잘 알고 있다.

- 설마 이 녀석 마법 각성도 못 한 거야?

-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검술 명가 출신은 아닌 거 같고.

“멋지다고 해 주니 고맙군.”

“하하. 그래.”

이 어색한 웃음소리.

사부가 이 장면을 보고 있다면 기함할 노릇이다.

검이 이토록 천대받는 세상이라니.

“검은 만병지왕이야.”

취기가 오르긴 했나 보다.

사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내가 하고 말았다.

“만병지왕? 그런 말도 있어?”

“어. 있어. 내 사부가 해 준 말이지.”

“하긴, 전설처럼 회자되는 소드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도 있잖아? 나도 활이나 창보다는 검이 낫다고 생각해.”

조나단이 내 말에 응수했다.

물론 병장기들 중에서 검이 다른 것들보다 낫다는 말이지, 마법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란 의미일 것이다.

“아참! 조나단! 소드마스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도 그 소문 들었지?”

“어, 도리아산의 괴물을 사냥했다던?”

역시 소문은 발보다 훨씬 빠르다.

나보다도 나에 대한 소문이 먼저 도착해 있었던 것.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드마스터라니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할까?”

“내가 알아? 소문은 항상 부풀려지는 법이니 난 아니라고 보긴 해.”

“그 부분은 나도 동감!”

조나단과 애쉬는 나를 앞에 두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리! 너는 이 이야기 들어 본 적 없어? 같은 검투사니까 당연히 들어 봤을 거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대답을 해 줘야 할지 참 난감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밝혀 둘 걸 그랬다.

“사실 내가 이호영이야.”

“네가 이호영이라고? 리! 취했구나!”

“어. 취하긴 했지.”

“싱거운 놈.”

내공을 끌어올려 취기를 몰아낼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현재의 알딸딸한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리! 넌 어떻게 생각해? 소드마스터라는 경지 말이야.”

“실제로 있어. 소드마스터.”

물론 나는 그 정도의 경지는 절대 아니다.

내가 본 것은 사부 한 명.

하지만 무림 전체를 놓고 보면 몇 명이 더 존재한다.

무림맹주나 사마련주는 사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경지라고 들었으니 이들도 소드마스터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은거 기인도 존재할 테고.

또한 사부는 탑에서 다른 차원 출신의 소드마스터를 만나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사부가 묘사해 준 세계관만 놓고 보면 칼리아와 비슷하긴 한데, 정말로 이곳 출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드마스터가 존재한다고?”

“어. 그런데 난 아니야. 소드마스터가 고작 도리아산의 괴물을 사냥하는 그런 경지는 아니니까.”

내 말에 두 녀석은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뭐야 리! 너 아직도 이호영 코스프레 중이었어?”

“와하하! 네가 이호영이라니. 이렇게 만나서 영광이야!”

조나단과 애쉬도 많이 취했는지 주점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들 덕분에 창피함은 내 몫이 되었다.

괜히 커밍아웃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이 녀석들은 믿지 않고 있지만.

- 이호영이라고?

순간, 어디선가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나단과 애쉬가 아니다.

이 녀석들이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우리 테이블로 향했던 것.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왠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봐 리!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야, 아무것도.”

“설마 계속 네가 이호영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처음에야 신선했지, 자꾸 그러면 재미없다고!”

이제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 닮았어! 그 녀석들이 말했던 인상착의와 아주 비슷해.

신경이 곤두섰다.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닌 듯했다.

게다가 내 인상착의를 말했다는 것은 나를 찾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 확인해 본 후 알려 줘야겠군.

알려 줘?

누구에게?

일단 하나의 의문은 풀렸다.

왜소한 체격의 한 남자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물론 이 녀석이 목소리의 주인이다.

“네가 정말로 이호영이라고?”

“아니.”

“이질적인 생김새도 그렇고, 맞는 거 같은데.”

- 그 녀석들이랑 피부색이나 억양까지 너무 비슷해. 알려야겠어.

그 녀석들이라니.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탑 출신의 플레이어들이 분명하다.

“나 이호영 아닌데?”

“그래?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군.”

하지만 말과 다르게 이 녀석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그게 어쩌면 오늘 밤일지도 모른다.

* * *

주점에서 오늘 머물 방을 하나 잡았다.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기에 혼자 쓸 수 있는 넓은 방으로 선택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왠지 오늘 누군가가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

뭐, 아니면 말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엘리시온을 꺼내 들었다.

보면 볼수록 명검이다.

내가 본캐일 때 사용했던 불굴의 검과 비교해도 전혀 성능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 칼리아라는 곳은 신기한 대륙이었다.

검술의 수준은 무림과 비교하면 한참 뒤떨어져 있음에도, 이러한 명검이 존재하기도 한다.

어쩌면 클로드 가문의 선조 중엔 대단한 검술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검은 그런 자에게만 어울릴 테니까.

‘소드마스터라.’

조나단과 애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록 여긴 마법의 대륙이지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검의 명인들이 있다고 했다.

내가 비록 그런 경지의 고수는 아니나, 12층을 떠나기 전에 검술로써 작은 족적 하나를 남기고 가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았다.

나는 엘리시온을 들고 무영추혼검을 전개해 보았다.

아직 능력치가 부족하여, 예전만큼의 위력은 나오지 않았으나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심득을 얻는 것이었다.

15층까지 이어질 게임 미션. 이곳에서 얻은 능력치나 아이템을 탑에서 쓸 순 없겠지만, 유일하게 심득만은 남을 것이다.

그래서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아직 나의 무영추혼검은 한없이 부족하니까.

‘쓰레기 소리를 또 들을 순 없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부를 다시 만나는 날이 되었을 땐, 쓰레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휘익!

휘이이익!

엘리시온은 방 안의 공기를 수없이 가르고 또 갈랐다.

그리고 창밖이 칠흑같이 어두워졌을 무렵, 나는 문밖에서 나를 향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이 방이군.

- 오늘이 절호의 기회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오두호.

‘정말로 날 죽이려고?’

<마음> 속성을 처음 얻었던 그 날, 오두호가 낸 목소리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녀석은 ‘나부터’ 죽이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사실 이 문제를 놓고 깊은 고심에 빠졌었다.

11층 미션에서 죽은 동료들에 대한 복수인지, 그게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인지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에 대한 대답을 오늘 밤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섯 명.’

오두호를 필두로 한 그들 무리 모두가 지금 문 앞에 서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엘리시온을 다시 고쳐 잡았다.

탑에서 만났더라면 이들 모두를 상대한 건 살짝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오두호가 가진 <통솔> 특성은 협동 공격의 위력을 상당히 상승시키는 위력이 있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선 더 이상 예전의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

오두호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겠지만, 단단히 잘못 짚었다.

덜컥!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고, 이들은 신속하게 입장하여 바로 마법 캐스팅을 시작하려 했다.

내 한마디에 바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어서 와. 일부러 이곳에서 가장 큰 방을 잡아 놓았으니까.”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들을 환영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들의 눈빛이 흔들린다.

심지어 살짝 뒷걸음질을 치려는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장 마지막에 입장한 오두호와 눈을 교차했다.

‘역시!’

이놈만큼은 분위기가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평온한 표정.

오두호에게선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네가 우리의 등장을 예상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결과는 변함없을 테니까.”

“결과?”

“이호영, 오늘 밤 네놈은 죽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인사가 꽤 거친 녀석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우리의 재회는 서론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8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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