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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87화 (87/292)

87화

사실 손서연에게 장난을 쳐 놓고서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 녀석이 내 장난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으니까.

어쩌면 다음 공격의 타깃은 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후회마저 들었다.

“싱거운 놈이군.”

“어? 어!”

하지만 의외의 반응이었다.

날 죽이려 들 줄 알았는데, 손서연은 별말 없이 앞장서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녀의 무뚝뚝한 표정에선 민망한 기색마저 보인다.

“같이 가! 어차피 길도 모르잖아?”

“이 근처라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각자 찾아봐도 될 것 같다.”

내 장난에 뭔가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태연한 태도.

정말 알 수 없는 캐릭터다.

‘그나저나 방금 전 뇌전 마법으로도 괴물을 못 이긴다고?’

나는 손서연의 뒷모습을 보며 방금 전 펼쳐진 마법의 위력을 되뇌어 보았다.

탑에서의 총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이곳 세계관에선 상당한 파괴력의 마법인 건 확실했다.

손서연이 할 수 없을 정도면 이 퀘스트의 난이도가 헬인 것은 분명하다.

성공 시 획득 명성이 98이라는 게 ‘고작’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런데 이 근처가 정말로 맞는 거냐?”

“심마니의 말이 사실이길 믿어야지.”

“이 주변은 딱 봐도 별다를 게 없잖아. 그 망할 노인네를 같이 끌고 왔어야 했는데!”

손서연의 투덜거림 가운데 우리는 계속해서 수색을 진행했다.

아침이 밝아 오며 태양은 산봉우리를 완전히 넘어왔다.

하늘이 한층 환해지니 괴물 수색도 이제 탄력을 받을 것이다.

분명 위험한 녀석일 테니 절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손서연! 뒤!”

내가 그녀의 배후를 경고하자, 손서연은 재빨리 몸을 돌리며 뇌전을 쏘아 냈다.

콰콰쾅!

그녀의 손에선 가느다란 번개 줄기가 쏘아져 나오며 허공을 갈랐다.

아까보다 한층 강해진 위력에 내 입에선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오!”

“또?”

“어, 긴장을 늦추지 말자는 의미에서!”

“이 새끼가?”

‘싱거운 놈’보다는 수위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생각보다 반응이 약했다.

어쨌든 손서연은 장난치는 상대로는 보람이 없는 녀석이다.

이렇게 리액션이 재미없을 줄이야.

“생각보다 잘 속는군.”

“한 번만 더 하면 죽여 버린다.”

물론 더 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손서연이 이상하리만큼 인내심을 보이고 있지만, 이 이상 선을 넘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녀석이니까.

다시 침묵은 이어졌고 우리는 탐색을 계속해 나갔다.

절대 감각을 쓸 수 있었더라면, 금세 찾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이 비루한 캐릭터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주변에 발자국은 있는지, 혹은 사냥의 흔적이 있는지를 일일이 눈으로 찾아야만 했다.

새삼 내가 가진 스킬들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나보다 무언가를 더 빠르게 발견한 것은 손서연이었다.

“혹시 저거 동굴이냐?”

전방 오십여 미터 부근.

풀숲에 가려져 있어 식별이 어려웠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어쩌면 심마니가 말한 괴물의 서식지일지도 모른다.

“어, 일단 가까이 가 봐야겠어.”

“내가 먼저!”

손서연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퀘스트 경쟁이긴 한데, 저 녀석은 너무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탑에서는 항상 포식자의 입장이었으니, 본인이 위험할 수도 있을 거란 가능성을 자연스레 배제하는 것이다.

분명 손서연은 단독으로 괴물을 사냥할 수 없다.

심마니의 전투력 측정기는 꽤 정확했을 테니까.

“손서연! 옆 조심!”

“개소리!”

“이 미친놈아!”

양치기 소년의 심정이 지금의 나 같았을 것이다.

지금 횡단으로 가공할 속도로 돌진하는 형체가 보인다.

더 놀라운 건 기척조차 내고 있지 않다는 것.

의심의 여지 없는 도리아산의 괴물이었다.

손서연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그녀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콰아아아악!

* * *

사실 괴물이 손서연을 덮친 순간, 나는 그녀의 죽음을 예감했다.

손서연은 완전하게 무방비였으니까.

제아무리 강자라 해도 빈틈을 대놓고 내주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무림 미션에서 나보다 훨씬 고수였던 매호평을 암살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방심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상대의 전투력이 더욱 높을 때는 두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도 손서연은 살아 있었다.

살성이 탑으로부터 받고 있는 가호는 생각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된 대목이다.

징글징글한 녀석.

비록 정신은 잃었지만, 손서연의 숨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어쨌든 놀라운 것은 괴물의 위력이 생각보다도 강하다는 것.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손서연을 한 방에 정리한 것만 봐도 이 괴물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었다.

“너희 둘, 어떻게 날 찾은 거지?”

하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이 괴물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

“못 찾을 이유도 없잖아? 네놈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아니, 너희 둘은 처음부터 내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찾아왔어. 그게 말이 안 되잖아.”

“괴물이 말을 하는 건 말이 되고?

“키야오!”

“그래. 괴물은 그런 소리를 내야지.”

빅풋. 이족 보행의 털북숭이로 몸길이는 대략 2미터 50센티미터.

유사 인류처럼 보이는 거인족이었다.

녀석은 처음부터 우리의 접근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예민한 시력으로.

“설마 날 사냥할 생각인가?”

“그럼 여기까지 이 고생을 해서 왜 왔겠어?”

“키야오! 불가능한 이야기다.”

“가능해. 전투력 측정기 검증도 받고 왔거든.”

“그게 무슨 소리냐! 키야오!”

“그런 게 있어. 괴물 놈들은 평생 모를.”

심마니로부터 얻은 천년오엽초는 마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주는 영약이었다.

지금 부캐로 활동하고 있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이 빅풋이란 괴물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해볼 만은 할 것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 한 자루를 빼 들었다.

캘리 클로드 가문의 보검으로 전해지는 엘리시온.

무영추혼검을 펼쳐 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명검이었다.

“키야오! 마법도 아닌 고작 검으로 나를 베려고?”

이곳은 마법의 대륙 칼리아.

검술보다는 마법이 훨씬 더 발달한 곳이었기에, 괴물은 나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어. 너에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키야오! 여기 쓰러져 있는 계집을 데리고 노는 게 나을 뻔했어. 보기 드문 뇌전 속성의 마법사였으니까 말이야.”

도리아산에 갇혀 지내다 보니 세상 넓은 줄 모르는 모양인데, 오늘 이 녀석은 검술의 새로운 경지를 보게 될 것이다.

“키야오오오!!”

괴물이 예고 없이 날 덮쳐 왔다.

빠르다.

손서연이 한 방에 간 게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저 녀석의 공격을 허용한다면 나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 부캐의 비루한 신체로는 녀석의 공격을 감당해 낼 수 없을 터.

이 괴물과의 싸움은 일격에 승부가 날 공산이 컸다.

나도, 괴물도 먼저 공격을 허용하면 죽을 것이다.

슈우우우욱!

손서연이 당했던 그 공격이 그대로 나에게 쏘아져 왔다.

이 찰나의 순간, 맞불과 방어의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다.

한 방으로 결정될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이기에 이 최초의 결정은 아주 중요하다.

문득 사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 어떡하긴. 맞받아쳐야지 쓰레기야!

사부의 음성 지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 괴물이 강하다 한들 사부의 무영추혼검에 비할 바는 아니다.

마력이 부족하다면 모를까 영약마저 얻은 마당에 여기서 한발 물러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나의 결론은 맞불이었다.

스으으윽!

내 손에 쥐어진 엘리시온이 괴물의 목젖을 향해 유려한 직선을 그렸다.

비록 이곳이 마법의 대륙이긴 하나, 제련술만큼은 무림에 뒤처지지 않는다.

엘리시온만 해도 무림의 어떤 명검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키야아아아아오!”

결국 괴물이 신음을 내뱉었다.

단 일격.

만족스러운 죽음이었을 것이다.

칼리아에서 이런 검술을 보는 건 처음일 테니까.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플레이어의 레벨을 재조정합니다.]

이곳 세계에서도 레벨 조작은 계속되고 있었다.

현자의 상태창만은 유일하게 작동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 *

“스승니이이임!”

다시 돌아간 클로드 가문의 영지에서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제자 조셉이었다.

덩치는 김세용만 한 것이 이런 하이톤을 내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었기에 정을 붙이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셉을 지나쳐 캘리 클로드 앞으로 다가가 인벤토리에 넣어 둔 괴물의 시체를 꺼냈다.

쿠웅!

거대한 몸집이 땅에 떨어졌다.

“잡아 왔습니다.”

“오오! 이게 정말 도리아산의 괴물이란 말이지?”

[명성이 98 상승하였습니다.]

한 방에 확 올라간 내 명성 수치.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이 메시지가 전송되었을 테니 다들 놀랐을 것이다.

이렇게 큼지막한 퀘스트는 내가 최초였으니까.

하지만 도리아산의 괴물 사냥은 명성이 고작 98 올라간 것이 억울할 정도의 헬 난이도였다.

빅풋이라는 괴물 녀석은 사실상 현재 12층에서는 공략이 불가능한 몬스터였기에.

한 방에 13층으로 올려 주지 않는 것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정말 고맙네! 자네가 우리 가문의 명예를 드높여 주었군!”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도리아산의 괴물은 인근 지방들의 최대 골칫거리였기에 이번 사냥 소식은 곧 칼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이곳에서 환대를 받았으니,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 여기 약속했던 골드일세.”

[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역시 통 큰 보상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빅풋 사냥에 대한 용병료이지만, 조셉에 대한 과외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빌려 간 엘리시온은 그대로 넣어 두게나.”

“하지만 이것은 가문의 보검 아닙니까?”

“가문의 보물을 남에게 쉬이 빌려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미 그것은 자네의 것이었네.”

[엘리시온을 획득하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었다.

13층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은 것이 다행으로 생각될 정도의 행운이다.

“스승님께 아주 잘 어울립니다!”

조셉 이 녀석은 내가 엘리시온을 획득하는 모습에 해맑게 웃었다.

어쩌면 본인의 것이 될 수도 있었던 가문의 보물임에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모습에 감동할 지경이다.

NPC 주제에 아주 기특한 녀석이었다.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을 다 마쳤으니 이제 떠나 볼까 합니다.”

“좀 더 머물렀으면 좋겠지만, 역시 자네를 잡아 둘 수는 없는 거겠지?”

“제가 감사했습니다.”

“스승니임!”

조셉 녀석이 나를 와락 껴안았다.

이 녀석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신파를 찍게 된다.

이제는 다시 12층에서 처음 시작했던 집회소로 돌아갈 때가 왔다.

공격 마법이 없다는 이유로 퀘스트를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 나를 무시하고 괄시하고 등한시했던 NPC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다들 나에게 임무를 맡기지 못해 안달이 나겠지.

- 8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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