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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86화 (86/292)

86화

마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혹시 이 심마니 NPC는 전투력 측정기인가?’

딱 보니 손서연에게도 같은 반응이었던 것이다.

방금 전 심마니는 마음속으로 ‘이 녀석도 무리’라고 했으니, 나 이전의 플레이어에게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는 의미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는 밥을 얻어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이 산을 떠도는 괴물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아, 글쎄 밥 없대도! 꺼져!”

- 쪼렙 플레이어 주제에 더럽게 성가시네!

이로써 내 가설은 더욱 더 힘을 받게 되었다.

도리아산의 괴물을 상대하기엔 내 전투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물론 이 NPC는 나의 마력과 스탯, 마법만을 가지고 판단을 내렸을 테니 나를 과소평가하고 있겠지만, 괴물의 전투력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높은 모양이었다.

심마니의 측정기에 따르면 손서연도 무리라는 판단이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공략집은 내게 심마니를 찾아가라고 했으니, 분명 이 NPC의 마음을 움직일 방도는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지금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마음의 목소리를 들어 가면서 말이다.

“사실 어르신께 약초 캐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의식의 흐름이었다.

상대가 NPC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아무 말 대잔치였다.

“에라이! 미친놈!”

- 쪼렙인 데다가 정신까지 나간 놈이로군.

역시 이 방법은 아니었다.

공략집이 좀 더 세세하게 알려 줬더라면 좋았을 것을.

기왕 미친놈 취급받은 김에 미친 척 한 번만 더 해 보자.

“사실 산을 헤매서 배가 좀 고픕니다. 밥 한 끼만 얻어먹고 갈 수 있겠습니까?”

“딱한 친구로군. 들어오게.”

“네?”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들어오래도?”

의식의 흐름이 엉망인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심마니였다.

12층에서 만났던 다른 NPC들과는 느낌이 좀 많이 달랐다.

그동안은 NPC라 해도 실제 사람과의 위화감이 거의 없었는데 이 심마니는 NPC 그 자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밥 한 끼 얻어먹고 싶다는 말이, 심마니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패스워드였던 것이다.

어쨌든 운이 좋았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일단 포문은 열었으니, 절반은 해결한 셈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약초 냄새들이 내 코를 진동시켰다.

심마니는 마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는데, 음식의 향은 약초 냄새에 완전히 묻혀 있을 정도.

잠시 후 그는 내게 식사를 가져왔다.

“차린 것은 없지만, 이것으로 허기라도 좀 채우게.”

정말 차린 것은 없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 설향초를 괜히 넣었나?

누가 심마니 아니랄까 봐, 고깃국에 약초를 넣은 모양이다.

한 숟가락 들어 본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국에서 쓰레기 맛이 났으니까.

순간 심마니와 눈이 마주쳤다.

- 젠장! 이번 요리도 실패인가?

어떻게 설계된 NPC이길래, 이딴 국을 끓여 놓고 다른 사람의 반응을 기대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하는 바가 있으니 일단은 비위를 좀 맞춰 줘야겠다.

“맛이 진하고 좋습니다. 설향초로 끓인 국 말입니다.”

내 말에 심마니의 인상이 단번에 밝아졌다.

[당신에 대한 심마니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아암! 내가 끓인 것이니까! 그나저나 한 숟가락에 바로 재료를 알아보다니 자네 정말 대단하군.”

“약초에 관해 공부를 좀 했습니다. 미각이 좀 예민한 편이기도 하고요.”

“보기와 다르게 속이 꽉 찬 친구일세! 맛에 대한 감각도 뛰어난 거 같고.”

“……그렇습니까?”

“확실하네.”

- 혹시 자네는 지금 집 안에 진동하고 있는 천년오엽초의 향도 느낄 수 있는 건가?

신기한 일이었다.

이 NPC는 내가 마치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걸 알고 있는 양, 마음속으로 질문을 걸어왔다.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약초의 이름이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천년오엽초의 향이 집 안에서 진동하는군요. 최근에 채취하신 모양입니다?”

“깜짝이야! 자네가 어떻게 그걸!”

마음속으로 다 알려 주고 있으니 맞힐 수밖에.

오히려 내가 더 신기할 따름이었다.

[당신에 대한 심마니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지금쯤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르신. 혹시 최근 도리아산에 출몰하고 있다는 괴물을 보…….”

“꺼져! 밥 없…….”

- 아, 이게 아닌가? 그래도 이놈이 괴물을 상대하기엔 너무 약한데.

이 NPC가 설계된 방식이 분명해졌다.

전투력이 모자란 상대에겐 기계적으로 꺼지라는 답변이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밥은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만. 어르신.”

“아 참. 그렇지.”

심마니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도리아산의 괴물 말입니다…….”

어떤 반응일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운을 떼 보았다.

호감도를 많이 올려 두었으니 다른 대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괴물? 혹시 잡으러 가려고?”

“네, 맞습니다. 어르신께서 그 괴물을 목격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알려 주십시오.”

- 이런 망할!

[NPC가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 내가 이런 쪼렙에게 괜히 호감을 느끼는 바람에!

아마도 이 심마니는 괴물을 잡을 수 있는 플레이어에게 호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호감을 느끼는 플레이어에게만 그 괴물의 행방을 알려 줄 테고 말이다.

“제가 괴물을 잡으러 갔다가 혹시라도 봉변을 당할까 봐 걱정되시는 겁니까?”

“걱정은 무슨!”

“그럼 알려 주십시오.”

- 젠장, 알려 주지 말아야 하는데!

하지만 그게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호감 조건이 충족된 플레이어에겐 기계적으로 대답하도록 설계되어 있을 테니까.

“도리아산의 열세 번째 봉우리의 정상 부근에 동굴이 있는데, 괴물은 바로 거…… 에잇, 젠장!”

이로써 원하는 대답은 들었다.

나에게 괴물을 사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이 새끼 뒈지면 어떡하지?

심마니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의 대답은 플레이어 하나를 사지로 몬 꼴이니까.

“혹시 걱정되시면 강해질 수 있도록 약초라도 좀 주십시오. 보답은 하겠습니다.”

“약초는 마력을 늘려 주는 효과밖에 없는데 그걸 자네가 먹어서 어따 쓰려고? 보아하니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스킬도 없는 거 같은데.”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다.

마력은 스킬을 사용할 때에 소모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력.

등록되어 있는 스킬은 없지만, 내겐 수련의 잔상이 그대로 각인되어 있으며, 마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영추혼검의 위력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속는 셈치고 천년오엽초 한 뿌리만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방 안에 향이 진동하는 걸 보면 꽤 많이 채취하신 모양인데.”

“안 돼!”

- 미친놈! 약초에 대해 공부했다더니만, 천년오엽초의 위험성까지는 모르는군.

“혹시 제가 먹고 위험해질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무슨 위험인지는 아직 나도 모른다.

일단 심마니의 반응을 기다려 보는 수밖에.

“그걸 알면서도 먹겠다고? 이 미친놈아! 영약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이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 몸이 터져 버려!”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복용 후 체내에서 마력이 폭주를 일으키는 모양인데, 이건 이 영약이 담고 있는 마력의 양이 상당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영약. 먹을 줄 압니다.”

“뭐?”

나를 만독불침으로 만들어 주었던 내단까지 포함한다면 무려 세 번이나 영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다.

- 이 새끼. 영약 가지고 구라 치는 놈이었어?

“영약 가지고 구라는 절대 안 칩니다! 약초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연이 겹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뭐라고? 이놈 봐라?”

[당신에 대한 심마니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괴물의 행방을 알려고 심마니를 찾았는데, 여기서 영약까지 얻어 가게 될 줄이야.

역시 될 놈은 된다.

* * *

심마니의 집에서 나온 후에는 손서연의 야영지를 찾았다.

괴물이 있는 곳으로 혼자 떠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이 녀석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손서연은 정말로 심마니를 죽일지도 모를 테니까.

비록 NPC이긴 하나 내게 호의를 베푼 존재가 살해당한다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 노인네가 정말로 괴물의 행방을 밝혔다고?”

“어.”

“망할 NPC가 사람을 차별하는군! 잠깐 기다려 봐. 가서 죽이고 올 테니까.”

“난 바로 떠날 거야. 널 기다려 줄 만큼 호의를 베풀 생각은 없어.”

“또 성인군자 행세인 것이냐?”

“그건 좋을 대로 생각하고.”

내가 정말로 떠날 기세를 보이자 손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녀석의 마음을 돌린 것 같으니, 심마니에 대한 은혜는 갚은 셈이다.

“너 같은 놈이 어떻게 대살성이 된 것인지 모르겠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자.”

심마니가 측정한 전투력이 맞다면, 손서연은 절대 그 괴물을 사냥할 수 없다.

그래서 일단은 이 녀석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다.

괴물의 전력도 좀 파악할 겸, 전력도 세울 겸.

“9층에서 우리가 같이 캥수를 타고 산을 오르던 일이 생각나네. 그렇지 않냐, 손서연?”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 미션을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10층은 피의 날이 되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우리 둘 중 하나는 살아 있지 못할 공산이 컸다.

물론 생존자는 내가 되었을 테고.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냐?”

“그만 좀 투덜대고 따라오기나 해.”

“누가 투덜댔다고! 난 그런 건 할 줄 모른다.”

우리는 밤을 새어 산봉우리를 넘나들었다.

몬스터라도 있었다면 중간중간 사냥을 하며 레벨이라도 올렸을 텐데, 이 산은 사냥터라고 불릴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저 지루한 산행의 연속일 뿐이다.

더군다나 내 옆에 있는 것은 손서연이니, 말동무로는 최악의 파트너.

서로 대화 없이 산길을 걷기만 한 지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오랜 침묵을 깬 것은 우리가 아닌 탑의 메시지였다.

[오민아의 명성이 100에 도달하였습니다.]

[해당 플레이어는 13층으로 이동합니다.]

프로 게이머 부부가 나란히 1, 2위로 12층을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거슬리는 놈년들이군.”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분한 반응이냐?”

“분하다기보단 잘난 척하는 그 녀석이 꼴 보기 싫은 것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런데 손서연의 마음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가 않는다.

모든 마음을 다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손서연의 것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질 못했다.

산행을 하며 붙어 있었던 시간을 고려한다면, 손서연을 상대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어쨌든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심마니가 말한 열세 번째 봉우리의 정상 부근.

괴물이 산다는 영역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태양이 산 너머에서부터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이미 말했지만, 괴물을 발견한다면 내가 먼저다.”

양심을 어디에 팔아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 줄 생각이다.

“어, 그런데 바로 네 뒤에 있네.”

“뭐?”

콰콰쾅!

순간, 손서연의 등 뒤에선 작은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내 경고와 동시에 손서연이 뇌전 마법을 펼쳐 낸 것.

정말 경이적인 반응 속도였다.

“이런 거에도 속아?”

속는 건 그렇다 쳐도 마법의 위력이 상당하다.

이런 수준으로도 전투력 측정기에서 탈락이면, 그 괴물은 얼마나 더 강하다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 8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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