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공략집이 준 정보에 따르면, 퀘스트 생성 조건이 드디어 완성되었다는 것.
벌써 조셉에게 검술을 가르친 지도 열흘이 지났기에 조금은 초조해지려던 참이었다.
“막내 공자님은 워낙 총명하신 분이기에, 이제부터는 스스로 깨우칠 수 있으실 겁니다.”
나는 주저 없이 캘리 클로드를 찾아가 내 뜻을 전했다.
사실 이곳에 더 남을 이유는 없다.
애당초 클로드 가문을 찾은 이유도 퀘스트 때문이니까.
“설마 벌써 떠나려는 겐가?”
“벌써가 아닙니다. 제가 이곳에서 지체하는 동안, 밀려 있는 서신들이 수북할 것입니다. 저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자네 같은 사람이 고작 서신을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니 말이야.”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 말에 캘리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 정도의 검술 수준을 가지고도, 마법사 행세를 하는 것부터가 아귀가 맞지 않았을 테니.
“혹시 그 사정에 경제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두둑하게 사례금을 준비해 놓았네만.”
솔깃한 이야기였다.
캘리 클로드의 재력과 성품을 고려한다면 정말로 두둑하게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지금 받아서는 안 된다.
일단은 퀘스트 생성이 우선이니까.
“막내 공자님께 검술을 지도한 것은 순전히 제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훌륭한 인재를 보고도 지나치는 것은 견딜 수 없어 한 일이니, 사례금은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어 내려니 조금 괴롭기는 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무보수로!”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 참 답답한 친구로군!”
이놈의 게임 세계관은 좀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적절한 상황과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퀘스트가 생성되지 않는다.
내가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집회소에서 그 어떤 퀘스트 의뢰를 받을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공략집: 캘리 클로드가 생성하게 될 퀘스트는 반드시 NPC 쪽에서 먼저 제안해야 합니다.]
사실 지금 상황도 그러하였기에 나는 이 얘기, 저 얘기를 빙빙 돌리며 퀘스트 생성을 유도하였다.
“그럼 혹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대가를 제시하도록 하지.”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말씀하십시오.”
“혹시 도리아산의 괴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이 알림음에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서신을 전하기 위해 이동한 시간까지 계산한다면 무려 보름이 걸렸다.
참 길고 긴 시간이었다.
“괴물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이는 아직 없다네. 다만, 발자국의 크기와 모양으로 봤을 때 이족보행의 거인족이라고만 추측들을 하고 있지.”
“아직 아무도 사냥을 하지 못한 걸 보면, 꽤나 강력한 놈인가 봅니다?”
“그놈이 가진 힘도 힘이지만, 아주 신출귀몰한 녀석이라고 알려져 있어서 말이야. 혹시 자네가 도전을 해 보겠나? 잡아 온다면 사례금으로는 10,000골드를 주도록 하지.”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네. 제가 해 보겠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성공 시 명성 98 증가]
98?
13층으로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명성을 98퍼센트나 채워 주는 엄청난 건수다.
대형 퀘스트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현재 나의 명성이 1이니 상당히 비효율적인 조건이긴 하지만 그래도 큰 임무를 맡았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고양된다.
‘할 수 있겠지?’
공략집은 결코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믿고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 나도 아버님께 부탁을 드려서 스승님을 따라가야 해!
조셉이 날 따라나서길 원한다는 것.
녀석의 마음의 목소리는 아주 크고 간절하게 들려왔다.
“제가 떠나기 전에 공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짐 덩어리를 달고 갈 수 없었기에, 미리 선수를 쳐 놓을 필요가 있었다.
“말해 보게.”
“막내 공자님께선 적어도 하루에 6시간은 제가 가르친 검술을 복습하셔야 합니다. 몸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연습을 놓는다면 지금까지의 수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염려하지 말게나. 자네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 부분은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아…… 아버님! 사실 저도 같…….”
“막내 공자님께선 제가 당부한 걸 반드시 지키셔야만 합니다!”
나는 서둘러 조셉의 입을 틀어막았다.
캘리 클로드의 막내아들 사랑은 심하다 싶을 정도니까.
“……네. 스승님.”
녀석은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NPC 주제에 나에 대한 마음이 좀 지나치다.
단 열흘을 함께 지냈을 뿐인데, 날 거의 아버지 수준으로 생각할 정도니 말이다.
어쨌든 처음으로 퀘스트다운 퀘스트를 받으니 가슴이 웅장해지려고 한다.
* * *
[최정혁의 명성이 100에 도달하였습니다.]
[해당 플레이어는 13층으로 이동합니다.]
역시 프로 게이머답게 최정혁이 게임 미션에서는 가장 빠른 페이스였다.
이 직업으로 인해 정확히 어떠한 보정을 받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대로 간다면 내가 내기에서 지게 된다.
마누라를 이곳에 남겨 둔 채 혼자서 다음 층으로 넘어갈 정도면 정말로 이번 내기에 진지하게 임한다는 의미. 역시 미친놈이다.
내기에서 이겨 봤자 고작 나한테서 형 소리 듣는 것일 뿐인데.
최정혁의 뒤를 쫓는 것은 그의 마누라이자, 또 다른 프로 게이머인 오민아였다.
현재 그녀의 명성은 74. 게임 미션 이전에는 두 부부의 능력이 엇비슷해 보였는데, 기존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니 두 사람의 차이가 분명해졌다.
확실히 최정혁의 컨트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다음으로는 명성 63의 손서연이었다.
손서연의 마법 특성은 뇌전(雷電)이었는데, 이것은 살성의 특전인 것으로 보인다.
11층 최다킬 보상으로 마법 특성을 고를 때 선택지에 없는 것이었으니까.
총이 없어도 여전히 손서연은 잘나가고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오두호, 김세용, 서준호 등이 뒤를 잇고 있는데 어차피 도긴개긴이다.
이번에 내가 수행하고 있는 퀘스트 한 방이면 바로 역전할 수 있는 수준.
이제부터 서둘러야겠다.
최정혁 녀석에게 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도리아산에 진입하였습니다.]
퀘스트의 영역에 들어오니 바로 안개가 걷히며, 메시지가 떴다.
말로 전해 듣던 것보다도 훨씬 더 광활한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넓은데.’
여기서 하루 이틀 가지고 괴물을 찾는 것은 절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에겐 행운을 보정해 줄 니케의 반지도, 나의 기동력을 상승시켜 줄 캥수도 없다.
절대 감각의 스킬도 없으니, 그야말로 쌩 노가다를 뛰어야 할 판이었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자의 상태창은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게임 캐릭터로 플레이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비기가 내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공략집: 도리아산의 초입에 거주하는 경험 많은 심마니를 찾아가십시오.]
역시 공략집을 들고서도 쌩 노가다를 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를 찾아간다면 분명 뾰족한 수가 나올 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경험 많은 심마니는 도리아산의 초입에 있다고 했으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며, 그를 찾기 위한 노가다 정도는 기꺼이 할 의향이 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기에 나는 서둘렀다.
[다른 플레이어가 인근에 있습니다.]
나 말고 또 누군가가?
그렇게 삼십여 분 정도를 헤매고 있을 때 경쟁자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분명 나와 같은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테니, 서둘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나저나 누굴까?’
경쟁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비록 내게는 공략집이 있다지만 공격 마법도 없이 경쟁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바스락-
멀리서 풀숲을 헤집는 소리가 들린다.
절대 감각이 없기에 나는 시선을 고정한 채 동공을 확대했다.
뭔가 익숙해 보이는 실루엣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손서연?”
“역시 너였던 것이냐. 이호영?”
경쟁자로는 달갑지 않은 녀석이었다.
* * *
역시 살성은 게임 미션에서도 무언가 특혜를 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뇌전이라는 마법 특성을 획득한 것도 그렇고, 지금 이렇게 큰 건수의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명성 1? 줄곧 궁금했었다. 왜 네가 여기 12층에서는 빌빌대고 있는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결론은 아주 당연한 것이더군.”
얘는 또 혼자서 무슨 소설을 쓰려는 건지.
일단 들어 보기는 해야겠다.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데?”
“네놈은 우리에게 표시되는 명성을 조작할 수 있다. 그동안 레벨을 조작해 온 것처럼. 이번에도 분명 음흉한 꿍꿍이가 있을 테지.”
비록 정답은 틀렸지만, 듣고 보니 그럴듯하긴 했다.
“명성을 조작해서 내가 얻는 게 뭔데?”
“거기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우리들의 뒤통수를 치려는 것이겠지.”
뒤통수라니.
지금까지 내가 동료들에게 해 준 게 얼만데.
하긴 손서연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건 됐고. 너도 퀘스트 하러 온 거 맞지?”
“보아하니 너는 지금 막 도착한 모양이군.”
“어.”
반대로 손서연은 여기서 개고생을 꽤나 한 모습이다.
“너에게 충고 하나 하지. 지금이라도 여기는 포기해라.”
“이유는?”
“더럽게 넓으니까.”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의도보다는 처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넌 포기냐?”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노인네 하나는 족치고 떠날 생각이다.”
“뭐?”
“정보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죽어도 불지 않는 고집 센 노인네가 하나 있다. 지금까지는 살려 두고 있지만, 오늘도 입을 열지 않으면 죽일 생각이다.”
정황상 손서연이 말하는 게 누구인지는 확실했다.
공략집이 내게 말해 준 경험 많은 심마니.
“어디 있는데? 네가 말하는 그 노인네.”
“저쪽으로 가면 그 녀석의 집이 나온다.”
손서연은 고민하지 않고 내게 심마니의 집을 알려 주었다.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심마니를 만나더라도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으리란 것을.
어쩌면 본인이 울화통 터지는 걸 내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 봐야겠어. 정말로 그자가 정보를 갖고 있는지.”
“네놈도 별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뭐?”
“성인군자 행세를 하는 네놈도 그 노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하여간 빻은 인성 하고는.”
하지만 잠시 후.
손서연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꺼져!”
심마니의 집을 찾은 내가 가장 먼저 들은 음성이었다.
“사람 보자마자 하는 말씀치고는 좀 거치신 거 같습니다만?”
“밥 없으니까 꺼져.”
“밥을 얻어먹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어르신께서 도리아산의 괴물을 목격하셨다는 말을 들었기에…….”
“밥 없으니까 꺼져.”
이놈의 심마니는 다짜고짜 밥 없다고 꺼지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정신병자 콘셉트의 NPC.
확실히 손서연이 화딱지가 날 만도 했다.
- 이놈도 무리야, 무리.
“네?”
“꺼지라고!”
- 너도 아직은 안 된다고!
심마니가 내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NPC. 괜히 도리아산의 초입에 존재하는 게 아닐 것이다.
- 86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