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오두호가 왜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는 모른다.
죽은 동료들에 대한 복수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지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나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적의 타깃은 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녀석은 분명 나부터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나지?’
사실 오두호의 동료를 직접적으로 죽인 것은 최정혁과 그의 마누라인 오민아였기에 이 부분은 좀 의아했다.
더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에 일단은 좀 기다려 봐야 할 것 같다.
오두호는 2구역 출신 플레이어들의 실질적인 리더.
분명 혼자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다들, 마법 속성에 빨리 익숙해져야 할 거야! 마침 연습용 허수아비들도 여기 세워져 있잖아?”
최정혁은 프로 게이머답게 이곳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이 허수아비를 공격하라는 거야?”
“공격을 하든지 껴안아 주든지 그건 너희들 자유고, 뭐라도 하다 보면 혹시 또 알아? 보상이라도 떨어질지.”
최정혁은 말을 마치고는 염동력을 발휘하여 허수아비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녀석의 손짓에 허수아비가 흔들린다.
설마 염동력으로 뽑아 버리려고?
아무리 봐도 무리 같은데.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농구공을 처음 잡아 본 사람이 3점 슛을 성공시킬 수 없듯이 말이다.
지금 수준에선 멀리 있는 열쇠 정도만 끌어당기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타아아악!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저 녀석은 정말로 손 하나 대지 않고 허수아비를 뽑아 버렸다.
“와! 이 속성 좋은데?”
염동력이 좋은 게 아니라, 프로 게이머가 가진 특혜가 너무한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이 게임 미션에서 마법사가 되어 버리며 기존의 직업 특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프로 게이머는 좀 다른 모양이다.
최정혁은 여전히 신들린 컨트롤을 발휘하며, 새롭게 얻은 마법 특성에 벌써 적응을 해 버렸다.
이쯤 되면 사기급이 아니라 사기 그 자체다.
“그리고, 나 보상을 얻었어. 허수아비가 쓰러지는 순간 마력 스탯을 올려 주더군.”
“정말이야?”
그 말에 김세용도 바로 허수아비 앞으로 다가갔다.
이놈의 속성은 화염. 허수아비의 모자에 손을 얹더니 결국 불을 붙여 놓았다.
아직 파이어 볼을 쏘기에는 컨트롤에 자신이 없는 모양, 하지만 모자에 붙은 불은 활활 타오르며 전신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난 왜 보상 안 주는데?”
“아, 최초 보상이라는 말을 깜빡했군. 마법에 익숙해지려면 열심히들 해 봐!”
“이 새끼가?”
김세용은 속았다는 기분에 허수아비를 향해 분노의 주먹을 뻗었다.
“앗 뜨뜨!!”
“멍청한 놈.”
불에 덴 건 그렇다 치고, 확실히 주먹의 위력이 예전과는 달랐다.
김세용이 권법가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면 뿌리째 뽑혀 나갔을 허수아비가 고고한 자세로 서 있었다.
“수련들 하세요, 수련! 저처럼 타고나지 않았으면 노력이라도 해야 합니다!”
최정혁의 말은 재수 없었으나, 다들 저마다 허수아비 앞에 서서 자신이 얻은 마법 속성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아직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모양인지, 진땀을 빼며 허수아비와 씨름하는 플레이어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타악!
나는 그저 허수아비를 향해 정권을 지를 뿐이었다.
게임 캐릭터의 초기 스탯은 모든 능력치가 10.
내가 마법이 없이 이걸 박살 내려면, 목검이라도 필요한 듯싶었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명성을 올려야 합니다.]
[집회소로 이동하여 퀘스트 의뢰를 받으십시오.]
탑의 메시지가 전해지며, 플레이어 15명에 대한 명성이 시야 상단에 표시되었다.
현재는 모두가 명성 0인 상태.
이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개인 미션이군요.”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것도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퀘스트도 각자 받는 것 같으니까요.”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기에, 우리는 일단 바로 앞에 있는 집회소로 향하기로 하였다.
* * *
집회소 내에는 많은 NPC들이 존재했다.
사실 이들이 NPC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이들은 정해진 말들만 반복하는 존재가 아닌, 온전한 인격을 가진 존재에 가까웠다.
심지어 마음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니까.
- 귀찮은 놈이군. 공격 마법도 없는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결국 이번에도 의뢰를 받아 내는 데 실패했다.
벌써 네 번째 NPC를 만났지만, 번번이 허탕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저들은 나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
“이래 봬도 제가 전장에서 잔뼈가 굵습니다. 일을 맡겨만 주신다면…….”
“됐네! 자네 같은 어중이떠중이에게 의뢰를 맡겼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괜히 내 신용만 떨어질 뿐이지!”
“의뢰비는 절반만 받겠습니다.”
“일 없다는 데도!”
12층이 시작되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지금 우리 구역의 동료들은 순조롭게 퀘스트를 받으며 하나둘씩 집회소를 떠나는 중.
그들 중 몇몇은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도대체 무슨 퀘스트를 받으려고 여기저기 찔러 보는 거지?
- 역시 한 방에 대박을 노리나 보군.
제대로 잘못 짚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티끌만큼의 명성.
아주 사소한 심부름이라도 맡을 수 있다면 무조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봐, 이호영. 언제까지 여기 죽치고 있으려고?”
최정혁도 이제 막 퀘스트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라면 꽤 굵직한 걸로 챙겼을 것이다.
NPC들 앞에서 자신의 마법을 뽐내며 시위를 한바탕 벌여 놓은 상태였으니까.
“퀘스트 받았으면 안 가고 뭐 하냐?”
“이호영 너랑 했던 약속. 그걸 다시 확인하려고 왔을 뿐이야.”
“약속?”
“이번 게임 미션에서 이긴 사람이 형이 되기로 한 거 말이야. 15층을 먼저 클리어하는 사람이 형 하기. 어때?”
지금은 퀘스트도 못 받고 좀 난감한 상황이지만, 물러설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일단은 믿는 수밖에 없다.
공략집이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콜!”
“좋아, 그럼 난 간다?”
“잠깐! 그런데 너 나이는 몇 살이냐?”
“나? 스물넷!”
꼭 이겨야만 한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놈을 형이라 부를 순 없으니까.
일단은 NPC 순회라도 다시 하면서 뭐라도 좋으니 의뢰부터 좀 받아야겠다.
* * *
“호영 씨, 아직도 안 가신 거예요?”
나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채이설이었다.
그녀도 퀘스트 의뢰를 받는 데에 애를 좀 먹은 모양이었다.
탑에서는 귀하신 힐러이지만, 이곳에선 빙결 속성의 초보 마법사.
가녀린 외모 때문에라도 NPC들에게 신뢰를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 모두는 명성 0으로 시작하는 비기너들이니 이 정도 난관은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설 씨는 이제 곧 떠나시나 보네요?”
“네! 겨우겨우 고블린 토벌 의뢰를 받았거든요.”
“조심하세요. 탑에 있을 적 생각하고 고블린을 쉽게 봤다가는 된통 당할지 모르니까요.”
“네엡! 명심할게요. 그런데 호영 씨는 마음에 드는 퀘스트가 아직 없으신 건가요?”
마음에 들고 자시고가 아닌데.
“사실은 아직 퀘스트를 못 받고 있어요. NPC들은 제가 못 미덥나 보군요.”
“말도 안 돼요! 농담하시는 거죠?”
“농담이 아니라는 게 포인트네요.”
이미 집회소에 있는 모든 NPC 순회를 마친 상태.
하지만 여전히 내게 일을 맡기는 녀석은 없었다.
“그렇다고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이설 씨 먼저 가세요.”
사실 채이설은 나를 걱정하는 눈빛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나에게 계획이 있을 거라 믿고 있는 눈치였다.
“네. 그럼 제가 괜히 방해가 될지 모르니 이만 가 볼게요!”
결국 집회소에 남은 것은 이제 나뿐이었다.
이것은 속성 선택에서 <마음>을 선택한 결과.
공략집이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직은 뾰족한 수가 없으니 다시 NPC 순회를 하는 수밖에.
“이봐! 자네!”
그럼 그렇지.
나에게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거는 NPC가 나타났다.
녀석의 이름은 루이 장.
물론 이놈에게도 퇴짜는 한 번 맞았다.
“네, 어르신. 부르셨습니까?”
“보아하니, 아직 속성 각성을 하기 전인 견습 마법사인 모양인데, 내가 자네에게 의뢰 하나를 맡겨 보도록 하지.”
진작 그럴 것이지.
하긴 이 녀석도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날 찾는 것이 분명했다.
“말씀하십시오.”
“이 서신을 루겐 지방의 캘리 공에게 전해 주겠나? 기한은 이틀일세.”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보상: 1골드]
[성공 시 명성 1 증가.]
명성 1은 그야말로 최소치였다.
12층 클리어에 필요한 명성은 100. 김세용이 이번에 맡은 퀘스트만 보더라도 성공 시, 무려 명성이 11이나 올라간다.
“맡겠습니다.”
하지만 내겐 달리 대안이 없었다.
명성을 티끌만큼이라도 올려 놔야 다음 퀘스트를 받기에 유리해질 테니까.
“조심해서 수행해 주게. 루겐으로 가는 숲길에는 슬라임들이 도사리고 있거든.”
조심해야 할 것이 슬라임이라니.
순간 뒷목을 잡을 뻔했다.
“그럼 잘 전하겠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마법의 대륙 칼리아에서의 첫 번째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루겐 지방으로 향하는 길에 큰 난관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NPC가 경고했던 슬라임들이 정말 많이 나타나긴 했지만 내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하였다.
비록 지금은 더 이상 검투사가 아니지만, 나에겐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나는 검투사 시절에도 자동적으로 획득되는 검술 스킬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
무영추혼검은 오롯이 내 수련의 결과였기에, 지금 이곳에서도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비록 현재의 스탯이 비루하고, 내 손에 든 것은 검이 아닌 나무 막대였지만 슬라임 정도를 상대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캘리 클루드의 영지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현자의 상태창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목적지에 다 온 마당에 공략집을 보내온 건 뭔가 대박 건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일 지도 모른다.
나는 서둘러 메시지를 열람했다.
[공략집: 클로드 가문의 캘리 경은 막내아들을 끔찍이 여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검술광인 그의 막내아들 조셉 클로드에게 검술의 기초를 가르쳐 준다면, 굵직한 퀘스트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역시!
만약 여기서 퀘스트를 연계로 또 얻게 된다면 나로선 더 바랄 것이 없다.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를 완료한다 한들 내 명성은 1. 여전히 누군가로부터 의뢰를 받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캘리 클루드의 저택은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마치 중세 유럽풍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건물은 시선을 압도했고, 그 앞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수만 가지의 꽃들은 탑 생활에 찌들어 있던 내 눈과 코를 즐겁게 해 주었다.
“보아하니 외지인 같은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정원에 들어서자, 클로드 가문의 하인으로 보이는 자가 나를 경계하며 막아섰다.
“캘리 공께 전하는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내게 건네시오. 바로 전해 드릴 테니.”
물론 이대로 서신을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조셉 클로드의 검술 스승이 되어야만 하니까.
“중요한 서신이라 내가 직접 전해 드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의뢰 조건이기도 하고요.”
“공께선 지금 막내 도련님께 검술을 지도하고 있는 중이라 곤란한데…….”
“기다리겠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나는 경우도 있는데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검술 지도 중이라니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다.
이젠 적당히 기회를 봐서 그 현장에 난입 좀 해야겠다.
내 행색이 누가 봐도 마법사라는 것이 좀 걸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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