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최정혁은 손서연이 떨어뜨린 총을 굳이 줍지 않았다.
“탑에 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어. 그런데 총을 사용하려면 특별한 스킬이 필요한 건가?”
역시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만약 최정혁이 일말의 호기심을 보이며 총을 집어 들었더라면 손서연은 그 빈틈을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최정혁은 땅에 떨어진 총을 발로 밀어내며 손서연이 가진 카드 하나를 원천 봉쇄해 버렸다.
물론 손서연에게 총이 없다고 해서 그녀의 전력이 확 꺾이는 것은 아니다.
맨손으로 싸우더라도 권법가인 김세용 정도는 쉽게 발라 버리는 수준이니까.
‘오늘 계 탔네.’
총이 없을 때 손서연의 풀 전력을 알고 싶었는데, 그걸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다.
그녀의 맨손 전투는 최정혁을 상대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최정혁의 컨트롤이 놀랍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스펙 자체는 손서연이 훨씬 우위였기에 승부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특히 두 사람의 마력 차이는 그야말로 압도적. 최정혁의 정교한 컨트롤을 손서연이 힘으로 찍어 누르는 모양새였다.
파악!
손서연의 발차기가 최정혁의 가드 위를 쳤지만, 위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최정혁은 몸이 밀려나며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고, 그 틈을 타 손서연의 정권이 최정혁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파아악!
이번에는 정타.
저 가녀린 주먹에도 마나가 실리면 바윗돌만큼의 파괴력이 발휘된다.
본래는 탄환에 실었어야 할 손서연의 거대한 마나가 주먹에서 터져 나오며 최정혁의 가슴을 쳤다.
최정혁은 거의 20미터는 밀려났다.
“……아오! 씨! 더럽게 아프네!”
웬만한 플레이어였다면 지금 이 공격에 바로 절명했을 것.
하지만 최정혁은 순간적으로 충격 부위에 마나를 일으켜 피해를 최소화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타격은 꽤 컸을 것이다.
입에서 피를 토하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려는 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리한 것은 최정혁이겠지.’
제삼자의 입장에서 관전을 하다 보니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손서연이 매 공격마다 마력을 퍼붓다 보니 좀 더 우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력이 마르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손서연과 최정혁의 잔여 마력이 비슷해지는 순간 승부는 기울 것이다.
지금 훨씬 더 효율적으로 싸우고 있는 쪽은 신들린 컨트롤을 발휘하는 최정혁이니까.
손서연이 총을 떨어뜨린 것이 너무 결정적이었다.
* * *
싸움은 내 예상대로 전개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서연은 본인의 마력이 줄어드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 갔고, 도리어 최정혁의 공세는 갈수록 매서워졌다.
아직까진 팽팽한 균형추가 유지되곤 있었지만, 최정혁 쪽으로 승부가 기우는 건 이제 명약관화한 사실.
지금쯤 손서연도 알고 있을 것이다.
초반의 실책 하나가 승부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쯤 했으면 손서연의 풀 전력도 잘 보았고, 11층을 클리어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여기 주목! 내가 지금 이 놈의 목을 좀 베려고 하는데 말이야!”
두 사람이 싸움에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나는 기절해 있는 4구역 애송이의 목줄을 잡았다.
물론 두 사람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최정혁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밀리고 있는 손서연도 내 행동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멈춰! 설마 내가 질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정답.
하지만 손서연이 질 거란 이유로 11층을 끝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끝낼 명분이 아주 좋을 뿐이었다.
“네가 이길지 질지는 모르겠지만, 이놈 마누라가 곧 올 거야. 그땐 정말 대책이 없거든.”
최정혁의 마누라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건 손서연이 더 잘 알고 있다.
살성의 눈으로 이미 그녀의 살인 행적을 보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손서연이 지금 내게 합공을 제안하여 최정혁을 치자는 말도 하지 못한다.
그건 자존심 센 그녀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상관없어! 그 전에 내가 최정혁 이 녀석을 끝내 버릴 거니까!”
역시 이 상황에서도 손서연은 허세를 부린다.
본인 스스로도 밀리고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
“아니, 그럴 시간이 없어. 저놈 마누라는 이제 여기에 곧 당도할 테니까.”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미니맵을 보며 11층 전체의 판도는 항상 체크하고 있었다.
손서연도 살성의 능력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너희 둘. 참 신기하네. 내 동료가 마누라라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건 알 거 없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불굴의 검을 꺼내며 내 의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최정혁은 체념한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내 사인도 안 받고 11층을 끝내 버리려고?”
“미안하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어쩔 수 없군. 그럼 사인 대신 정보 하나를 주지.”
“정보?”
“그래. 이렇게 내 팬을 만났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팬 아니라니깐, 정말 또라이 같은 녀석.
하지만 지금은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주겠다는 정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최정혁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운을 뗐다.
“난 12층의 테마를 알고 있어.”
“그걸 현시점에서 알고 있다고?”
말도 안 된다.
공략집을 가진 나도 아직 모르는 미래를 최정혁이 알고 있다?
이놈은 단순히 직업이 프로 게이머일 뿐인데.
“어, 알고 있어. 그리고 넌 11층을 조기에 끝내 버린 걸 12층에 가서 바로 후회하게 될 거야.”
“왜지?”
“11층의 활약 정도가 12층의 스타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
최정혁이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물론 이 녀석이 하는 말을 믿을 순 없다.
어쩌면 시간을 벌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의 마누라는 우리와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고 있으니까.
“12층의 테마가 도대체 뭔데?”
“게임.”
“뭐?”
“게임이라고. 게임!”
최정혁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탑의 시스템은 게임 그 자체.
그런데 12층의 테마가 게임이란 것은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별 도움도 안 되는 정보로군.”
“그런가? 크크큭.”
나는 잠들어 있는 4구역 애송이의 목에 불굴의 검을 겨누었다.
최정혁은 날 말리는 걸 애초에 포기한 상태였으며, 손서연도 더는 날 저지하지 않았다.
그녀로선 자존심을 구기지 않으며 11층을 끝낼 수 있는 적당한 타협점.
떨어진 총을 주우며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휘이익!
내 검이 허공에서 짧은 춤을 추었고 짧은 메시지가 모두에게 전송되었다.
[PK가 발생하였습니다.]
[4구역 플레이어가 전멸하였습니다.]
[11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알지 못하였다.
최정혁이 말했던 게임이란 말의 의미를.
그리고 로비에서는 어떤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를.
[로비로 귀환합니다.]
내 손으로 총 5번의 살인을 저지른 후 11층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 * *
손서연을 제외한 다섯 명의 동료들.
그들은 나의 적극적인 11층 개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사실 11층을 진행하는 내내 그 부분은 의문이었다.
이들 모두는 나의 텔레파시 내용을 충실히 따라 주었고, 그 결과 아무런 위험에도 봉착하지 않은 채 이번 층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장기적으로 내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11층에서 내 동료들의 성장 가능성을 제한하여 버렸고, 어쩌면 그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자율성을 침해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에게는 내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존재했지만, 현실적으로 내 생각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암묵적이긴 하나 나는 우리 구역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이는 모두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이니까.
로비로 소환되는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하지만 로비로 돌아갔을 땐,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모든 번민들은 휘발유처럼 증발되어 사라졌다.
“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우리 앞에 펼쳐졌으니까.
“구역 통합?”
지금 로비에 있는 플레이어는 떠나기 전의 일곱 명이 아니었다.
무려 열여섯 명.
방금 전까지 11층에서 미션을 수행하던 모든 생존자들이 한 장소에 소환되었다.
[새로운 구역이 생성되었습니다.]
탑의 메시지는 그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으며, 그제야 우리 모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챙!
챙!
곧바로 2구역의 플레이어들이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칼을 뽑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이들은 11층에서 무려 네 명의 동료들을 잃었으니까.
전원이 생존한 1구역의 부부 플레이어나 우리 3구역과는 사뭇 다른 온도차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정들 합시다!”
결국 내가 나섰다.
“현상금 미션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우린 더 이상 서로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이 한마디로 설득이 되진 않을 것이다.
“닥쳐! 지금까지 우리 동료들을 죽여 놓고선 이제 와서 싸울 이유가 없다고?”
“그래서 여기서 또 피를 보겠다는 것입니까?”
나는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살기를 발출했다.
이런 악역이 달갑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초반에 교통정리를 해 놓고 시작하는 것이 앞으로 모두에게 유익할 테니까.
내가 내뿜는 기세에 로비의 분위기는 순간 살얼음판이 되고 말았다.
“죽엇!”
내게 덤벼든 것은 2구역 출신의 박우찬.
직업은 나와 같은 검투사. 능력치는 평범한데, 나름 의리는 있어 보인다.
콰당!
물론 상황 판단 능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은 제로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죽은 동료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다니.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더라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이 아니라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피를 보고 싶다면 한 번 더 들어오세요. 다음번엔 사양 않고 목을 베어 드리죠.”
“이 악마 같은 새끼!”
“어느 쪽입니까? 피를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대화를 하시겠습니까?”
내 질문에 박우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노려만 보았다.
같은 검투사로서 방금 전 한 번의 경합만으로도 수준 차를 절감한 것이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최정혁.
“이봐. 이호영 씨. 왜 당신이 지금 내 역할을 하고 있는 거지? 2구역 플레이어들을 죽인 건 나랑 내 마누란데. 아무리 내 팬이라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그리고 최정혁은 로비의 중앙으로 걸어가 모두에게 선언했다.
“11층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와. 불만 접수는 이쪽이니까.”
로비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
지금 나는 한 명의 플레이어를 주시하고 있었다.
2구역 출신의 오두호.
대다수가 평범한 2구역에서 유난히 튀는 능력치를 가진 인물이다.
어쩌면 그동안 나와 비슷한 롤을 맡고 있을 지도 모른다.
11층 이전까지 2구역의 생존자는 무려 열한 명이었는데, 이런 오합지졸로 이 정도의 생존률을 보이려면 뛰어난 구심점 하나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오두호는 바로 움직였다.
그는 나와 최정혁의 사이로 걸어와 말했다.
“협상을 제안하지.”
“협상?”
“그래. 우리 동료들의 목숨에 달려 있었던 현상금. 그걸 이 자리에서 다 뱉어 낸다면 지난 일은 다 묻어 두지.”
오두호의 제안에 최정혁이 히죽 웃는다.
일단 강 건너 불구경이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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