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11층에서만 벌써 두 명을 죽였다.
물론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살인 계획을 갖고 있으며, 이 계획은 4구역의 7명이 모두 죽을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제 남은 건 다섯.’
마치 내가 연쇄살인마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정신적으로 망가지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담담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나의 인간성 역시 조금씩 닳아 버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치 4구역의 꼬맹이들처럼.
캥!
캥수는 갑자기 몸을 낮춰 내 가슴팍에 머리를 비벼 댔다.
주인의 허한 마음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 녀석은 내게 장난질을 걸어왔다.
“괜찮다고 인마.”
나는 캥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의 존재는 왠지 모를 위안이 되었다.
주인과 펫이 서로 공유하는 감정적 유대가 이럴 땐 참 좋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느낌을 받으니까.
“캥수야, 그럼 이제 다시 가 볼까?”
캥!
“그래, 최대한 빨리 끝내 보자. 근데 너도 공범인 건 알지?”
캥!
고개를 끄덕이며 캥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건 내가 자주 짓는 표정.
이놈의 펫이 갈수록 요망해진다.
휘익!
몸을 날려 캥수의 등에 올라탄 순간, 탑의 메시지가 울려 왔다.
[세 번째 PK가 발생하였습니다.]
벌써?
나 외의 누군가도 결국 스타트를 끊고야 말았다.
가장 유력한 것은 역시 손서연.
나는 ‘11층을 굽어보는 자’ 스킬을 발동하여 손서연 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손서연은 이제 막 PK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번에 죽은 것은 4구역의 고딩도 아니었다.
1구역: 2명 생존
2구역: 10명 생존 (-1)
3구역: 7명 생존
4구역: 5명 생존 (-2)
이번엔 2구역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
누가 죽였는지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은 손서연 쪽을 계속 클로즈업하였다.
지금은 그쪽이 일촉즉발의 상황이니까.
“이쁜 누나! 레벨이 꽤 높네?”
손서연의 앞에 서 있는 것은 4구역의 고딩.
녀석은 겁도 없이 손서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녀석의 머리 위를 보니 그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레벨이 무려 31.
레벨 33의 손서연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 정도 열세는 초기 스탯으로 만회할 수 있단 판단일 것이다.
남녀 간에는 아무래도 기초 체력에서 차이가 나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건 심각한 착각일 뿐, 막상 붙어 보면 거대한 벽을 느낄 것이다.
“너, 죽기 전에 할 일이 하나 있다.”
“뭐? 내가 죽어?”
4구역의 고딩 허태성.
녀석은 손서연을 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봐. 누님. 착각하지 마. 11층 정도 왔으면 레벨이 다가 아니란 것쯤은 알지 않나?”
“…….”
“와! 그렇게 노려보니까 진짜 무섭네. 알았어. 내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도대체 뭔데?”
허태성은 선심 쓴다는 말투로 손서연에게 물었다.
이놈. 이러다가 진짜 잔인하게 죽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용서를 빌어라. 네 녀석들이 잔인하게 죽인 그 친구에게.”
“뭐?”
황당하다는 허태성의 표정.
사실 황당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서연의 입에서 이런 대사가 나올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으니까.
지금 손서연은 살성의 눈으로 본 허태성의 살인 행적을 거론하고 있었다.
“네놈들에게 빌면서, 울면서 죽어 간 그 친구.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하면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이봐. 이쁜 누나! 도대체 그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제정신은 맞는 거지? 말투도 이상하고 겁대가리 없이 이러는 거 보면 딱 마친 사람 같은데.”
물론 손서연이 미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내가 아는 손서연이 아니었다.
그녀라면 지금 구구절절하게 이럴 필요가 없다.
이미 저 녀석의 대가리는 벌집이 되었어야 정상.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결국 손서연은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내었다.
이미 총구는 허태성의 머리를 향했다.
“헐! 그거 총이야? 탑에 총이라는 무기도 있었어?”
“다시 묻겠다.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어. 크크큭.”
그 순간 손서연이 겨눈 총구의 각도는 살짝 아래로 기울었고, 짧은 총성이 11층에 울려 퍼졌다.
타앙!
허태성.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최대한 안 아프게 죽는 게 상책일 텐데 보는 내가 다 안타까웠다.
“아아아악!”
4구역의 꼬맹이들은 참 한결같다.
참교육을 당하고 나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한다.
허태성은 으깨진 발등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손서연은 녀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딱 봐도 장난감 총은 아니잖아?”
손서연은 허태성을 향해 들고 있던 총을 던졌다.
녀석은 땅에 떨어진 총을 허둥지둥 집어 들었다.
“오…… 오지 마! 쏠 거니까!”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쏴 보든가.”
손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 더 다가섰고, 허태성은 정말로 방아쇠를 당기고야 말았다.
딸깍!
“씨X! 뭐야 이거!”
허태성의 검지는 세차게 움직였다.
당연히 그게 나갈 리가 없다.
탑에서 부여받은 스킬도 없이 총을 쏠 수 있었으면, 나도 진즉에 스나이퍼로 전향했다.
“꼬맹아. 그건 그렇게 쏘는 게 아니야.”
손서연은 총을 든 허태성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는 총구의 방향을 돌렸다.
이번엔 반대쪽 발등.
타아아앙!
총성과 동시에 허태성의 비명이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그래, 이게 손서연이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무렵, 손서연은 허태성의 무릎을 강제로 접어 버리고는 말했다.
“자, 이제 용서를 빌 생각은? 이쁜 누나가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고 하는데.”
순간 발가락 열 개가 동시에 오그라들었다.
이쁜 누나라니.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 엿보는 것도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한편으론 의문이었다.
왜 손서연은 녀석에게 용서를 빌도록 하는 일에 집착하는지를.
그 뒤론 모든 행위가 손서연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었다.
허태성은 발등에 총 두 방을 맞고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고, 마치 손서연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서연이 자비를 베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통 없이 죽이겠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였을 뿐, 내가 더 이상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결국 나는 ‘11층을 굽어보는 자’ 스킬을 중지하고는 캥수를 타고 이동했다.
이제 곧 메시지 하나가 들려오겠지.
[네 번째 PK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제 4구역에서 남은 인원은 어느덧 넷.
손서연의 손에 실질적인 4구역 리더인 허태성이 방금 죽었고, 다음번엔 내가 한 명 더 죽일 예정이었다.
* * *
본격적인 헬 파티가 시작되었다.
나는 4구역의 꼬맹이를 한 명 더 정리하였고, 방금 전 2구역에서도 두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구역: 2명 생존
2구역: 9명 생존 (-2)
3구역: 7명 생존
4구역: 3명 생존 (-4)
2구역을 타깃으로 삼은 범인은 역시 1구역의 플레이어였다.
손서연이 살성의 눈으로 본 바에 따르면 1구역의 두 명은 서로 부부.
방금 전 PK에 성공한 건 부인 쪽이었다.
20대 후반의 창기사.
찌르고 베는 기본 동작일 뿐이었지만 확실히 클래스는 느낄 수 있었다.
‘나 혹은 손서연 수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나 정도의 플레이어는 살성이 아닌 한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1구역의 플레이어가 그 극히 드문 경우이거나 살성일 수도 있겠지만, 부부 둘이 동시에 그렇다는 건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도대체 이들은 무슨 기연을 얻었기에!’
나와 손서연이 4구역의 플레이어를 빠르게 정리하여 11층을 클리어한다면 더 이상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문제겠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한 플랜도 세워 둘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1구역의 플레이어가 사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동료들에게는 위험 신호였다.
혹시라도 이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니맵을 보며 동료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 동선을 잡아 주는 것.
가능하다면 빠르게 뭉쳐 있어야만 한다.
“캥수야, 좀 더 서둘러 줄래?”
캥!
캥수는 바람을 가르며 11층의 무대를 달렸다.
나는 이동하면서도 미니맵을 통해 전체 상황을 끊임없이 주시했다.
‘역시 손서연.’
그녀는 또다시 4구역의 플레이어 쪽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뜻을 함께하고 있을 땐 손서연만큼 든든한 플레이어가 없다.
이번에도 허태성에게 했던 일의 반복일 것이다.
용서를 제안할 것이며,
거절한 꼬맹이를 참교육시킬 테고,
마지막엔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였기에 굳이 ‘11층을 굽어보는 자’ 스킬은 발동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쁜 누나 급의 드립이 나오는 것도 무서웠고 말이다.
“캥수야, 너도 그건 싫지?”
캥!
역시 캥수도 나와 같은 생각.
우리 둘은 11층을 바람처럼 질주했고 잠시 후, 캥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캥!
“그래. 캥수야, 나도 봤어.”
전방에는 김세용이 보였다.
녀석은 동료들과 빨리 합류하라는 내 텔레파시를 듣고도 늦장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답답하게도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말이다.
무림에 다녀온 뒤로 세용이 놈은 자신감이 너무 충만한 게 문제였다.
어쩌면 녀석은 현상금 사냥에 애가 닳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플레이어 여럿이 죽어 나가며 헬 파티는 열린 상태였고, 김세용의 성격상 분명 여기에 뛰어들고 싶어 할 것이다.
사실 김세용 정도의 수준이면 어지간해선 위험할 일이 없겠지만, 1구역의 플레이어 둘은 클래스가 다르다.
자칫 마주치기라도 했다가는 바로 골로 가 버릴 터.
마침 이렇게 만났으니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캥수야. 넌 잠시 로비로 좀 가 있자.”
캥!
그렇게 캥수를 로비로 보내고는, 바로 김세용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 뭐냐 넌?”
당연히 녀석은 날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인피면구를 쓰고 있으며, 윤형식의 모습이니까.
“현상금 사냥꾼이지 뭐겠냐?”
김세용은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관광을 시킬 생각에 지금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냐? 나는 현상금 사냥꾼의 사냥꾼인데. 크크크. 어?”
그리고는 김세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머리 위에 적혀 있는 큼지막한 숫자를 이제야 본 것이다.
말도 안 되게 낮은 내 레벨과 함께.
이쯤 되면 한 번쯤 의심해 볼 만도 한데, 놈은 이미 현상금에 눈이 멀어 있었다.
“운이 좋군. 크크크. 왠지 늦장을 부리고 싶더니 이것 때문이었어. 그런데 너는 몇 구역 소속이냐?”
“1구역.”
“그래, 1구역이었군. 크크크. 어? 몇 구역이라고?”
순간 김세용의 얼굴이 굳어갔다.
내가 텔레파시로 경고했던 1구역의 플레이어. 이렇게 바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에잇! 썅! 그래 한번 붙어 보자!”
역시 김세용.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천 번 중에 한두 번은 럭키 펀치가 들어가서 이길 수도 있는 거니까.
물론 나를 상대로는 절대 안 되겠지만 말이다.
휘이이이잉!
김세용의 돌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기습.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것이었다.
언더독이 할 수 있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이며, 이 무지막지한 근력의 펀치를 허용한다면 제아무리 나라도 타격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다 예상하고 있었기에, 나는 아주 편안하게 김세용의 펀치를 흘려보냈다.
“느려.”
“이게 느리다고? 구라 치지 마! 새끼야!”
또다시 김세용의 돌주먹이 날아왔다.
앞뒤 재지 않고 이런 공격을 하다니, 무림 이전의 움직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타악!
이번엔 가볍게 손날로 녀석의 주먹을 쳐 버렸다.
그리고는 녀석의 배후로 들어가 녀석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김세용은 저항도 못 한 채 내게 목을 내주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이쯤 되면 클래스의 차이를 여실히 느꼈을 것이다.
“켁! 켁! 살려 줘!”
“아니. 그냥 죽어.”
그러면서 목을 조이는 팔의 자세를 살짝 바꿔 주었다.
일부러 느슨하게 풀어 주면서.
이젠 김세용의 죽는 연기를 감상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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