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아직 10대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나, 한 구역을 반드시 정리해야 한다면 4구역의 일곱 명을 쓸어 버리는 것으로.
‘7명!’
이 숫자는 이번 11층을 끝내기 위한 최소치였다.
어쩌면 그 외에 훨씬 더 많은 킬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
다른 구역의 플레이어들의 생각을 아직 알 수 없으니까.
또한 손서연의 생각도 분명 나와는 다를 것이다.
그녀는 이번 11층을 통해 그동안 미비했던 킬 수를 채우려 할 터.
세 구역 모두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이호영, 네 생각은?”
일단은 내 속내를 감출 생각이었다.
“각개격파.”
“한 구역씩 정리하자는 것인가?”
“그래. 괜히 여기저기 벌집 쑤시고 돌아다니다가 합공을 받으면 우리 쪽이 위험해지니까.”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의외로군.”
“뭐가?”
“지금까지 넌 살성이라는 사실이 의심될 정도로 PK를 피해 왔다. 하지만 지금 네 모습은 뭔가 좀 다른 느낌이랄까.”
손서연이 이런 의문을 갖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의문이 의심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한 일.
지금은 손서연에게 협조하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다.
“나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을 하는 군. 너 혹시 나 좋아하냐?”
“뭐? 이런 미친놈!”
손서연은 예상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까지 감정의 동요를 보일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화제 전환에는 성공한 것 같다.
“아님 말고.”
“아님 말고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녀석!”
순간 깜짝 놀랐다.
손서연이 국어책을 읽는 줄 알았으니까.
“어쨌든 우리가 각개격파를 한다면, 첫 번째 타깃에 대한 합의부터 해야 하지 않겠어?”
손서연이 무슨 대답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결론은 4구역이 되어야만 한다.
그녀가 다른 선택을 할 경우의 논리적 반박은 이미 머릿속으로 준비하고 있다.
물론 설득할 자신도 있다.
“일단 4구역부터!”
손서연은 지체 없이 반응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원했던 결과.
준비했던 설득 작업은 필요 없게 되었다.
“나도 찬성.”
손서연이 왜 4구역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 이유를 물어볼 필요는 없다.
생각보다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각자 움직이며 나만의 작전을 실행하면 된다.
“손서연 너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4구역을 공격하는 건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만이야. 4구역을 전부 다 쓸어 버리면 11층이 클리어돼 버리는 건 알지?”
일부러 내가 선수를 쳤다.
나중에 의심을 받지 않도록.
완전 범죄를 위해서는 이 정도의 세심함은 필요한 법이다.
“나를 바보로 아는군. 4구역에서 마지막 한 명이 남는다면 그다음은 2구역으로 넘어간다.”
“2구역도 오케이.”
“그리고 2구역까지 마친다면, 나를 찾아와라. 그때부턴 같이 움직이도록 하자.”
역시 손서연도 1구역의 부부 플레이어는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도대체 살성의 눈으로 본 것이 무엇이기에.
어쨌든, 작전 실행 전에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린 고딩 녀석들을 보고 괜히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 * *
“와, 아저씨 뭐야?”
“왜?”
“레벨은 개낮으면서 현상금은 졸라 높잖아! 이거 혹시 버그인가?”
윤형식.
처음 만난 4구역의 고딩은 나를 보고선 격한 관심을 보였다.
내 현상금은 14만 6천 골드에 38 스탯 포인트.
탑이 어떤 기준으로 가치를 매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 머리 위의 숫자를 보고서도 초연하긴 힘들 것이다.
녀석은 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아저씨는 버그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아?”
“아니, 전혀.”
“그런데 어쩌지? 난 궁금해 죽겠는데.”
녀석의 오른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이 꼬맹이의 직업도 김세용과 같은 권법가.
그런데, 누가 고딩 아니랄까 봐 스킬명이 가관이다.
스크류 펀치라니.
스탯을 보아하니 파워보다는 스피드에 특화된 타입이었다.
“그쯤에서 멈춰 서는 것이 좋을 거 같은데? 내가 겁이 좀 많아서 말이야.”
“그건 아저씨 사정이고.”
녀석은 목을 까딱거리며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불량기가 줄줄 흐르는 게, 어린 나이에 이런 종류의 위협을 많이 해 본 솜씨였다.
“아저씨, 궁금한 게 있는데 3구역 동료들은 아저씨를 지금껏 살려 두고 있었던 거야?”
“무슨 뜻이지?”
“딱 봐도 탈탈 털면 골드 깨나 나오게 생겼는데, 왜 지금까지 무사하냐는 거지.”
“우리 구역 사람들은 다 같이 사이좋게 지냈거든.”
“그래? 그럼 아저씨는 운이 좋았네. ……물론 나를 만나기 전까지만.”
현실에서 만났더라면,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이게 말로만 듣던 겁 없는 고딩.
탑에서는 훨씬 매운맛이다.
“아저씨, 이제 골드 내놔. 그럼 고통 없이 죽여 줄게.”
이 꼼꼼한 녀석은 내 소유의 골드부터 현상금까지 탈탈 털어 버릴 생각이었다.
“거부하면?”
“후회하게 될 거야. 곧바로 아저씨 몸속에선 뼛조각들이 돌아다니게 될 거거든.”
말하는 내용도 그렇고 풍기는 기운 역시 절대 10대의 것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막 나가는 일진이라 하더라도 이건 좀 말이 되지 않는다.
탑에서 구르고 구르며 인간성이 말살된 모습.
역시 이 빌어먹을 탑이 문제다.
어쨌든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고딩 녀석의 주먹이 직선으로 날아온다.
내 턱을 타깃으로 짧게 끊어 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휘익!
하지만 펀치는 허공을 갈랐다.
비록 녀석이 민첩에 특화된 스탯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급에서 해당되는 이야기.
놈의 주먹은 김세용과 비교해도 훨씬 느렸다.
타아악!
곧바로 나의 손날은 녀석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케엑! 켁! 켁!”
맥없이 나의 공격을 허용한 녀석은 고통스럽게 기침을 뱉어 냈다.
이런 실력으로 잘도 11층까지 살아남았다.
우리 구역의 막내인 용우가 싸워도 이 녀석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어야지.”
“아오! 씨! 켁! 켁!”
“이젠 제일 자신 있는 스크류 펀치를 날려 보든가.”
“뭐?”
“스크류 펀치. 네가 가진 유일한 스킬이잖아.”
“아…… 아저씨 뭐 하는 새끼야!”
놈은 당황했다.
한 방 맞은 것도 모자라 본인의 스킬까지 들켜 버렸으니까.
내 레벨만 보고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터. 하지만 이 어린 녀석은 더 배워야 한다.
세상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물론 다음 세상에서 말이다.
“뒈져 버렷!”
그리고 정말로 스크류 펀치가 날아온다.
내 코앞에서 뱀처럼 휘어 감겨오는 꼬맹이의 주먹이 보였다.
나는 그 주먹을 가볍게 낚아채 손목을 그대로 돌려 버렸다.
콰악!
“아아아아악!”
놈은 부러진 손목을 부여잡고 격한 비명을 질렀다.
그 후 덜렁덜렁거리는 자신의 손을 보고는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을 당해 보는 것은 처음일 것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클 것이다.
놈은 항상 반대의 입장에서만 있었을 테니까.
“어때? 네가 친구에게 한 걸 그대로 당해 본 기분이.”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녀석은 아직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 목적은 훈계나 계도가 아니니 굳이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인피면구를 꺼내어 내 얼굴에 착용한 후 불굴의 검을 치켜들었다.
[인물을 선택하십시오.]
“윤형식.”
내가 변장할 인물은 내 앞에서 멘붕에 빠져 있는 고딩이었다.
앞으로 나는 윤형식의 얼굴을 하며 4구역의 플레이어들을 제거해 나갈 생각이다.
나의 사냥이 조금 더 수월하도록.
그리고 살성 손서연에게 나의 살인 행적을 감출 수 있도록.
현자의 상태창이 조언한 대로 11층 이전에 인피면구의 기능을 미리 파악해 두길 잘했다.
“그럼, 형식아. 잘 가라.”
“안 돼! 살려 줘!”
서어억!
첫 살인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 사람의 생명을 무미건조하게 종결지었으며, 이젠 뭔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은 담담했지만.
* * *
[11층 최초의 킬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1층을 굽어보는 자’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기간제 스킬인가?’
스킬 설명을 보니 11층 한정이긴 하지만 꽤 훌륭한 스킬인 것은 분명했다.
11층 어디든 세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들을 수도 있었다.
미니맵과 함께 사용하면 그야말로 사기급이다.
시험 삼아 손서연이 있는 곳을 클로즈업해 보니 그녀가 밟고 지나가는 낙엽 소리마저 들렸다.
‘11층에선 요긴하게 쓸 수 있겠군.’
다시 나는 캥수를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최초의 킬 이후 아직은 아무런 PK도 발생하지 않았다.
확실히 나의 이동 페이스가 압도적으로 빠르긴 했다.
미니맵 스킬과 캥수의 조합이 빛을 발하는 11층 미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다시 4구역 플레이어와 마주했다.
“형식아!”
물론 나는 윤형식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경계심은 제로 상태였다.
“어. 찬혁아.”
“방금 너도 확인했지? 우리 구역의 한 명이 죽었잖아!”
“그래, 나도 봤어.”
조찬혁.
이미 죽은 윤형식보다는 여러모로 능력치가 훌륭했다.
레벨업 상태도 준수하고, 스탯 능력치도 나쁘지 않은 것이 아마 현 11층의 생존자라면 평균적으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식아, 이제부턴 같이 다녀야지?”
녀석은 친구의 죽음에도 너무 침착했다.
어쩌면 어린 나이인 만큼 새로운 세상에 빠르게 적응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어. 그런데 찬혁아.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뭐가?”
“나한테 부여된 현상금 말이야.”
그러면서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켰다.
인피면구로 얼굴과 이름은 바꾸었지만, 내 현상금은 여전히 14만 6천 골드에 38 스탯 포인트.
녀석이 눈치채지 못했기에 내가 바로 알려 주었다.
어떤 반응일지 궁금했으니까.
“와! 씨! 너 갑자기 뭐야? 버그라도 걸린 거야?”
역시 윤형식과 같은 반응.
탐욕도 비슷할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아무래도 버그인 거 같아! 나 완전 X 된 거 맞지? 다들 내 현상금을 보면 눈이 뒤집어질 텐데.”
“골드도 골드인데 스탯 포인트가 완전 사기네! 38이면 도대체 몇 렙을 올려야 되는 거냐?”
더 이상 골드를 통해서는 스탯을 올릴 수 없는 상황.
11층의 현상금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살인의 유혹일 것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대박 포인트를 가진 경우라면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찬혁이 널 만나서 다행이다. 혼자 다닐 때 쫄려서 죽는 줄 알았거든.”
“어. 그러게. 다행이네.”
조찬혁.
갑자기 녀석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벌써 결정을 내리다니.
“다행이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널 먼저 발견해서.”
역시.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나에게 돌진해 왔다.
만약 내 예상이 빗나갔더라면, 나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는 어린 친구의 목을 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니까.
서어어억!
인벤토리에서 나온 내 불굴의 검이 허공에서 반원을 그렸다.
그럼 잘 가라. 찬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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