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손서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텔레파시로 보낸 내 제안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제안한 것은 합동 살인, 살성인 그녀가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살인이라.’
결국 11층에서도 난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내 동료였던 김준성을 시작으로 난 적지 않은 사람을 죽였다.
그때마다 내겐 항상 명분이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죽을 만한 악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살인은 살인.’
무림에서 매호평을 암살한 일은 내 도덕률을 가장 크게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악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나, 죽을 만한 사람이었는지 혹은 나에게 심판의 자격이 있는 지에 대해선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에겐 암살 명령이 떨어졌고, 나는 그것을 수행했을 뿐이다.
이번에도 내게 주어진 조건은 비슷하다.
미션명은 [현상금 사냥꾼]
하나의 구역을 이루는 다수가 죽어야만 내가 살 수 있다.
내가 적극적으로 살해 행위를 펼치지 않더라도, 결국엔 누군가 죽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내 손으로 피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자기기만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누군가가 나 대신 손을 더럽혀 주길 바라는 것.
과연 후자 쪽이 덜 고통스러운 일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피할 수 없다면 내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로.
물론 여전히 살인은 거북스러운 일이며, 이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기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손서연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살성의 눈으로 타인의 살인 행적을 볼 수 있으니, 나는 이를 통해 타깃이 될 구역을 결정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 타갓은 악인들.
이는 살인을 결심한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흐음.’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해도 가슴 한편에 찝찝한 마음 한 조각이 사라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적응을 해야만 한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아포칼립스의 탑이니까.
갑자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인 에 나오는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를 몰고 있는 어느 운전사의 이야기.
여기서 운전사는 빌어먹을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를 그대로 몰고 나가 해당 선로에서 일하는 5명의 인부를 죽일지, 아니면 핸들을 틀어 바뀐 선로에 있는 1명의 인부만 죽일지.
당시 나는 핸들을 트는 선택을 지지했다.
물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감히 [정의] 따위를 거론할 수 없으니까.
지금 내가 처한 현실 또한 그랬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소수의 악인을 제거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11층을 끝내는 것.
물론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 * *
[11층으로 이동합니다.]
항상 그랬듯이 낯선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어느 부락.
이곳은 아마도 인간형 몬스터가 살았던 곳일 것이다.
절대 후각을 통해 느껴지는 이 냄새는 영락없는 몬스터의 썩은 시체였으니까.
“그렇지, 캥수야?”
캥!
캥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현자의 상태창이 미리 고지했던 것처럼, 11층 미션의 시작은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미니맵을 가동합니다.]
스킬이 가동되자 내 시야 상단에는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켜지며 다양한 색깔의 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 점들 하나하나는 플레이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미니맵은 아주 사기적인 스킬이다.
구석구석 디테일까지 볼 수는 없지만, 층 전체를 관조하며 판을 읽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니까.
[11층 전용 전광판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홀로그램이 하나 더 생성되었다.
1구역: 2명 생존
2구역: 11명 생존
3구역: 7명 생존
4구역: 7명 생존
※ 당신은 3구역 소속의 플레이어입니다.
구역마다 인원은 제각각.
심지어 플레이어가 고작 2명인 구역도 있었다.
지금까지 탑의 성향으로 미루어 봤을 때 네 구역의 밸런스는 잘 맞춰져 있을 것이다.
어느 압도적인 한 구역은 존재하지 않을 거란 의미.
‘그렇다면 1구역 플레이어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겠군.’
만약 밸런스가 100퍼센트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면, 1구역의 2명은 나와 손서연을 합한 전력보다 강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3구역에는 우리 둘 외에도 5명의 동료들이 더 존재하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말이다.
[식량과 식수가 지급됩니다. 11층이 종료될 때까지 더 이상의 배급은 없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내 앞에는 빵 세 조각과 물통 하나가 떨어졌다.
탑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기본적인 욕구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게 벌써부터 허기가 느껴졌다.
이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직무를 유기하지 않도록 설계된 장치일 것이다.
만약 그 누구도 타 플레이어를 사냥하지 않고 버티기에 들어간다면 탑으로선 재미없어질 테니까.
“캥수야. 그나저나 넌 어쩌지?”
이 빌어먹을 탑은 캥수의 식량까진 챙겨 주질 않았다.
갑자기 녀석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캥!
“알았어, 인마. 일단 하나는 너한테 양보할게.”
나는 캥수의 입에다 빵 한 조각을 가져다 댔다.
캥수는 일말의 사양도 없이 소중한 식량 하나를 우걱우걱 먹어 치웠다.
물론 밥값 이상의 일은 시킬 것이다.
이제 서둘러 손서연과 접선을 시도해야겠다.
미니맵을 보아하니 시작 위치가 아주 절묘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플레이어가 바로 손서연.
“캥수야, 가자.”
캥!
나는 캥수의 등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이런 류의 미션에서 기동력은 곧 생명이다.
나에겐 미니맵에 캥수까지 있으니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나 같은 주인 없는 거 알지?”
캥!
그래도 은혜를 모르는 펫은 아니다.
캥수는 바람을 가르며 폐허가 된 몬스터의 부락을 질주했다.
가는 내내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했다.
어느 구역을 사냥 타깃으로 삼아야 할지.
사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1구역의 2명이 모두 악인이며, 손서연과 내가 한 명씩 맡아서 처리하는 것.
그렇다면 단둘의 희생으로 11층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소설일 뿐이다.
그 둘이 어떤 캐릭터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니까.
캥!
캥수가 서둘러 주었기에 나는 바로 손서연과 접선할 수 있었다.
손서연은 가부좌를 틀고 내공심법을 연마하고 있는 중.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간을 쪼개 수련이라니.
“생각보다 빨리 왔군.”
“혹시 내가 수련을 방해한 거냐?”
“아니, 수련보다는 현상금 사냥 쪽이 더 재미있을 테니 상관없다.”
손서연의 말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조금은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살성의 특성은 여전한가 보다.
하긴 탑의 시스템이 부여한 고유 특성이 변한다는 게 어불성설.
역시 손서연은 시한폭탄 같은 녀석이었다.
상황과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손서연은 언제든지 폭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호영, 이젠 너의 구체적인 계획을 들어 보고 싶다.”
“지금부터 너의 살성의 눈을 활용할 생각이야.”
“굳이 내 것을?”
“그래. 네 스킬의 성능이 더 향상되었으니까.”
“……너 알고 있었던 것이냐?”
“물론이지.”
손서연의 상태창은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스탯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스킬은 어느 정도 숙련되고 있는지.
최근 손서연이 얻은 능력은 ‘확장된 살성의 눈’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살인 행적을 광역으로 볼 수 있는 향상된 스킬.
“이것도 역시 대살성의 능력인가?”
손서연이 자꾸 이러니 나도 착각하게 된다.
혹시 내가 정말로 대살성이 아닐까 하는.
“어쨌든 스킬 가동이나 해 봐.”
“살인 행적을 통해 다른 구역 녀석들의 실력을 가늠해 보겠다는 속셈이군.”
“어? 어.”
본래는 악행의 정도를 파악하고자 함이었지만, 손서연이 그렇게 해석한다면 굳이 해명할 이유는 없었다.
타 플레이어들의 실력을 미리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말이다.
“먼저 1구역 플레이어부터 좀 봐 줘 봐.”
“기다려라.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탑에서 나의 실종을 알아챘을 때부터 짐작한 것이지만, 지금 손서연의 감각에는 미니맵을 대신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한때는 내가 길치라고 놀렸는데, 이제는 그걸 극복해 낸 것이다.
상태창에는 드러나지 않는 걸 보니 스킬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뭔가가 있다.
“다 봤다.”
“벌써?”
손서연이 살인 행적을 보았다는 개념은 사실 정보의 전이에 가까웠다.
“그래. 1구역의 2명은 서로 부부로군. 이 둘은 모든 동료들을 죽였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지만, 이 둘이 지향한 것은 안전제일주의. 부부인 서로 외에는 모두 믿지 못했기에 다른 동료들을 적으로 간주했다.”
이 부부가 살성인지를 묻고 싶었지만, 굳이 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살성의 신비감을 유지시켜 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손서연의 별도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부가 살성일 확률은 희박해 보였다.
“아마도 강하겠군. 탑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두 사람이 독식했을 테니까.”
“10층에서의 살인 행적을 보니 확실히 강하다. 직접 붙어 봐야 알겠지만 쉽지 않은 상대가 되겠군.”
손서연이 말한 대로라면 타깃으로 삼기에는 살짝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같은 구역의 플레이어들을 죽이긴 했으되 악인이라 단정 짓기 어려웠다.
손서연이 인정할 실력이라면 정면 승부를 보기에도 부담스럽고.
“그럼 이젠 2구역.”
“기다려라. 그리고 명령하는 투로 말하지 마라. 난 네 부하가 아니니까.”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2구역의 플레이어는 가장 많은 열한 명.
구성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확률적으로는 개체별 전투력은 가장 약할 확률이 높았다.
물론 손서연의 말부터 들어 봐야겠지만.
“아마도 여긴 플레이어 간 밸런스가 심하게 기우는군.”
“무슨 뜻이지?”
“살인 행적을 보니 11명 중 한 명은 정말로 강하다. 어쩌면 1구역의 그 부부보다 강할지도 모르겠군. 나머지는 잔챙이 수준이고.”
“그 가장 강하다는 녀석은 살인귀인가?”
“그건 아니다. 살인 횟수가 너무 적으니까.”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강자가 얌전하게 지냈다는 건, 역시 악인일 확률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2구역도 일단은 패스.
4구역도 만약 이런 식이라면 타깃 선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제 4구역도 좀 봐 주시겠습니까?”
“이건 무슨 콘셉트냐?”
“명령하는 투로 말하지 말라면서.”
“……날 놀린 것이로군.”
손서연이 그래도 이런 부분에선 유해지긴 했다.
본인이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상 한 번 쓰는 것으로 끝.
예전에 김세용을 개 패듯이 팰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상당히 순한 양이 된 것이다.
나는 말 없이 손서연을 기다렸다.
이제 4구역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면 결정을 해야 한다.
어느 곳을 타깃으로 해야 할지.
“4구역의 전원은 교복을 입고 있다.”
미성년자라는 이야기.
이렇게 되면 4구역을 타깃으로 삼기에도 어려워진다.
“모두가 같은 교복이며, 일곱 명이 동시에 한 명을 공격하고 있군. 같은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뭐?”
“울면서 빌고 있는데도 잔인하게 밟고 있군.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다.”
“도대체 왜!?”
“나도 잘은 모르지만, 대화 내용을 보아하니 맞는 녀석은 아무래도 골드 셔틀인가 보군.”
그렇다면 결정은 내려졌다.
비록 이것이 정의는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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