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김세용과 캥수의 스파링은 내 예상대로 호각세로 진행되었다.
“와! 씨! 캥수, 너 뭐야!”
캥수가 날린 핵펀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김세용.
녀석은 십 년 감수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것은 비단 김세용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동료들 역시 수련을 멈추고 이 둘의 스파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호영 씨. 무림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캥수가 주인 닮아서 운이 좀 좋았습니다.”
서준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캥수가 무림에서 산삼이라도 캐 먹은 겁니까?”
“비슷해요.”
“뭐라고요?”
예전 같았으면 김세용의 펀치에 벌써 녹다운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캥수는 여전히 쌩쌩했다.
펀치를 많이 허용하긴 했지만, 내구력이 그만큼 증가한 것이다.
공력을 실어서 때리는 펀치는 그야말로 상전벽해 수준이었고.
“얀마! 너 내가 알던 캥수 맞아?”
캥!
그런데 사실 김세용도 많이 늘긴 늘었다.
펀치는 좀 더 간결하면서 정교해졌고, 무엇보다도 스텝을 밟는 게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역시 무림에서 익힌 보법이 김세용과 궁합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캥수 너 인마, 착각하지 마. 형이 지금까지 봐주면서 한 거니까.”
캥!
“뭐? 너도 지금까지 슬슬 한 거라고? 자식이 지금 어디서 사기를 치고 있어!”
캥! 캥!
김세용은 혼자서 모노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펫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조련사인 나뿐이니까.
“들어와라! 캥수!”
캥!
캥수와 김세용은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모처럼 둘의 생각이 동시에 통한 것이다.
이 일격을 통해 스파링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빠아아악!
거대한 두 주먹이 서로 교차하며 상대의 안면을 강타했다.
* * *
모두가 수면을 취하며 피로를 회복하고 있는 시간.
나는 인피면구를 만지작거리며 홀로 깨어 있었다.
‘참 신기한 물건이란 말이지.’
이 아이템은 천마신교에서 부교주 은소희로부터 받은 신물.
착용자의 얼굴을 감쪽같이 바꾸어 주는 변장형 아이템이다.
심지어 탑의 상점에는 비슷한 물건조차 존재하지 않는 귀한 물건.
‘그럼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번 볼까.’
현자의 상태창이 보내 준 정보에 따르면 인피면구는 탑 시스템에 맞게 기능이 변형되어 있다고 했다.
하긴 탑에서는 모든 플레이어들의 이름이 공개되어 있으니, 얼굴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긴 하다.
<인피면구>
- 등급: 전설
- 쿨타임: 2시간
- 효과: 착용자의 얼굴을 바꿀 수 있으며, 세부 효과는 다음과 같음
1. 얼굴 변경은 타 플레이어의 모습으로 국한되며, 착용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음.
2. 착용자의 얼굴을 변경하는 것 외에, 이름 표시와 레벨 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복사할 수 있음.
3. 인피면구의 존재를 타 플레이어에게 들키는 즉시 아이템의 기능은 하락함.
4. 살성의 눈으로도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벌인 살인의 행적은 볼 수 없음.
놀라운 일이었다.
인피면구는 탑 밖의 다른 차원에서 만들어진 물건이지만, 탑 안으로 들어온 순간 이곳에 알맞은 형태로 진화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충격적인 것은 이 아이템의 등급이 무려 전설급이라는 것.
무림에서 괜히 신물이라고 불린 게 아니었다.
나는 시험 삼아 인피면구를 얼굴에 써 보았다.
현자의 상태창은 이 녀석의 기능을 미리 숙지해 놓길 추천했으니까.
차아악!
인피면구는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얼굴에 바로 달라붙어 버렸다. 그리고는.
[인물을 선택하십시오.]
이것이 새롭게 만들어진 기능.
내 맘대로 얼굴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흐음.’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말했다.
“채이설.”
물론 여장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체형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며, 성별마저 다를 경우 인피면구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목소리, 머리카락 길이, 옷차림 등 얼굴의 변화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영역도 존재했고 말이다.
[착용자의 선택을 적용하겠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온몸에서 이물감이 느껴지며 잠깐의 메스꺼움이 있었다.
방금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불굴의 검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뭐야 이게!’
변한 것은 단지 얼굴만이 아니었다.
체형을 비롯한 모든 것이 채이설 그 자체.
순간 소름이 몰려왔다.
성대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보니 목소리마저 변한 것이 틀림없었다.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아!’
태어나서 처음 입어 보는 여자 옷의 감촉에 당혹감이 밀려왔다.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신체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었고.
착용을 해제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다음 옵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채이설의 이름과 레벨 중 복사할 것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이 부분에는 제한이 있었다.
그냥 둘 다 복사하게 해 주면 좋을 것을.
“이름.”
[착용자의 선택을 적용하겠습니다.]
내가 직접 확인할 순 없지만 내 머리 위엔 분명 이호영 대신 채이설로 표시가 되어 있을 것이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레벨 때문에 위화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얼핏 보면 영락없는 채이설로 보일 터.
새롭게 변형된 인피면구의 성능을 확인했으니 이젠 서둘러 착용을 해제할 생각이었다.
잠이 든 동료들이 이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서로 민망해질 테니까.
[사용을 종료합니다.]
“후우!”
인피면구를 해제한 후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모두가 쌔근쌔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고된 수련 탓에 다들 상당량의 수면 에너지가 필요한 듯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바로 자리에 누웠다.
보호 결계가 내 주위에 펼쳐지며 회복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혼자 조용히 누워 있을 때면 생각이 많아지곤 한다.
휴식을 위해 누웠음에도 내 머릿속은 끊임없이 많은 생각들을 생산해 냈다.
‘현자의 상태창이 인피면구의 사용법을 미리 숙지하라고 조언한 이유는…….’
아무래도 11층에서는 새로운 플레이어들을 만날 공산이 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 동료들 사이에서 이 물건을 사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일이니까.
지난 10층은 순한 맛이었으니, 매운맛이 한번 나올 때가 되긴 했다.
그런 불길함 속에서 조금씩 눈이 감겨 왔다.
* * *
[11층 미션이 이제 곧 시작됩니다.]
미션을 앞두고 있음에도 예전보다 동료들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무림에 다녀온 후 다들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모두 ‘비약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전 층에서 등장했던 웬만한 몬스터들은 이제 가볍게 썰어 버릴 수 있는 수준.
“제발 이번에도 쉽게 갈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러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0층만 같았으면!”
하지만 이곳은 빌어먹을 탑이니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11층 미션의 주제는 ‘현상금 사냥꾼’입니다.]
[지금부터 각 플레이어들의 목숨에 현상금을 부여하겠습니다.]
[플레이어 킬에 성공한 플레이어는 해당 현상금을 획득합니다.]
“헐! PK 미션?”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탑의 메시지에 순간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싸해진 공기 속에 우리는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각자의 머리 위에는 새로운 정보창이 생성되었다.
이름, 레벨, 그리고 현상금.
내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현상금은 2만 2천 골드에 18 스탯 포인트.
바로 김세용의 머리 위에 쓰여 있는 숫자였다.
눈에 띄는 규칙이 하나 있었다.
강한 플레이어일수록 높은 현상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유일한 예외라면 손서연이었다.
손서연은 특별할 것도 없이 그냥 딱 평균치였다.
그리고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 머리 위의 숫자가 심상치 않을 것이다.
지금 다들 날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이호영 씨!”
“네. 저는 얼마입니까?”
“14만 6천 골드에 38 스탯 포인트요.”
진짜 미쳤다.
이 정도면 현상금 맛집으로 간판 건 수준이다.
“누군지 몰라도 저 하나 죽이면 아주 팔자 펴겠군요.”
그렇게 농담을 날렸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다들 독하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PK 미션은 여전히 거북한 일이었기에.
[이번 11층은 네 구역의 연합 미션으로 펼쳐집니다.]
[미션 클리어 조건은 한 구역의 전멸입니다.]
[11층 미션은 30분 후에 시작됩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건투는 개뿔.
역시 내 예상대로 11층은 매운맛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설마 이 PK를 우리끼리 해야 하는 건가 하고요.”
“사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저도요!”
참 놀라운 일이다.
우리 동료들은 서로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현자의 상태창은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보1: 11층에서 최초의 킬과 최다 킬을 달성하는 플레이어에게는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정보2: 11층 미션 클리어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구역에도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아무래도 내게 이 두 가지 모두를 달성하라고 추천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이 11층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다른 세 구역의 플레이어들이 어떤 인물들일지 아직 알 수 없으니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한 구역은 반드시 전멸해야만 이 11층이 끝난다는 것.
“이쯤에서 이호영 씨 생각을 들어 보고 싶군요. 우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네 구역 연합 미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겁니까?”
서준호가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기에 정답을 알 수 없으며 나의 생각을 강요할 수도 없다.
지금 이 상황을 가장 단순하게 정리한다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다른 구역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살육쇼를 펼치며 골드와 스탯 포인트를 얻으며 강해지는 것. 이는 향후 탑에서의 생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번 미션에서 최대한 방관자의 입장에 서는 것. 다른 구역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싸움을 피하는 선택도 가능하다. 어차피 한 구역만 전멸당하면 11층은 끝나게 되니까.
다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으며 우리는 타 구역 플레이어들보다 도태될지도 모른다.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이번 11층은 저의 판단에 기대지 말고 본인의 뜻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호영 씨가 그렇게 나오니 더 혼란스러워지는데요?”
서준호의 말에 나는 다시 힘주어 답했다.
“지금 이 상황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들이 각자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전적으로 존중하며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나름대로의 뜻이 있을 테니까요.”
사실 내 마음 속에서 내린 결론은 있다.
그걸 실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 빌어먹을 탑은 조금씩 우리들의 도덕률을 무너뜨려 가고 있습니다. 몬스터를 사냥하며 살생에 무뎌지고 있으며, 때로는 살인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적지 않은 살인을 하였고요. 이 탑에서는 점점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각자의 도덕률과 원칙대로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신이 아니다.
고로, 나는 정답을 알 수도 없으며 타인 각자의 신념에 간섭할 수도 없다.
그저 나 나름대로의 신념대로 움직일 뿐.
- 야, 손서연.
나는 손서연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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