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사부는 오랜만에 무림으로 귀환했다.
말로는 정파와 사파의 연합 건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했지만, 그래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무림 귀환과 동시에 사부는 나를 내팽개치고 교주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복잡한 무림의 정치 문제까지는 내가 신경 쓸 바 아니니, 나 역시 숙소로 돌아가 오랜만에 두 다리 뻗고 잘 생각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부와의 재회는 고된 시간이었기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달이 휘영청 기울어진 늦은 밤, 나는 숙소를 향해 터덜터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각에 잠 못 들고 방황하는 생도 하나가 저 멀리에서 보인다.
손서연. 그녀 역시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살아 있었군.”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첫마디였다.
내가 탑에 얼마나 머물러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곳은 밤낮이 없는 곳인 데다가 나도 수련에 몰두하느라 시간 개념을 잊고 있었다.
“왜, 걱정했었냐?”
“그럴 리가 없잖아.”
하긴 손서연이 날 걱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의 존재가 없다면, 탑에서 그녀의 운신은 훨씬 더 자유로워질 테니까.
“그런데 난 얼마나 오래 사라져 있었던 거냐?”
“네가 없던 시간은 정확히 열하루 동안이었다.”
열하루면 생각보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사실 한 달이라고 말했어도 믿었을 것이다.
그사이 사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내가 탑에서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방증일 것이다.
“열흘 정도도 아니고 정확히 열하루라. 넌 그걸 세고 있었던 거로군.”
“착각하지 마라. 난 원래 시간관념에 아주 예민한 사람인 것뿐이니까.”
난 별생각 없었는데 얘 혼자 쓸데없이 발끈한다.
이런 걸 보면 손서연도 은근 감정 기복이 있는 캐릭터다.
본인은 애써 그걸 숨기고 싶어 하는 모양이지만.
“그사이에 천마지로는? 혹시 이미 끝나 버린 거냐?”
단지 열흘 좀 넘는 시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궁금한 것들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더 이상 천마지로는 내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사부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던 일.
이미 사부를 만난 이상, 천마지로의 우승은 누구에게 돌아가든 상관없다.
“천마지로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아마도 네놈의 실종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태무정 장로가 날 배려해 주었을 것이다.
부교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호영, 너는 탑에 다녀온 모양이로군.”
“어?”
전혀 예상 못 한 타이밍에 손서연이 허를 찌르며 들어왔다.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서연은 확신하는 말투였다.
“그래. 다녀왔어.”
“역시 그랬었군. 그것도 대살성의 특권인가?”
“노코멘트.”
“치사한 녀석! 하지만 그걸로 대답은 충분히 되었다.”
얘 뭐냐.
오해는 계속해서 깊어지고 있었다.
내가 대살성이라니.
어쨌든 방금 전 대화에서 손서연의 능력 하나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다른 플레이어의 부재 여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나의 미니맵 스킬과 비슷한 능력일 수도 있겠다.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손서연의 상태창을 스캔해 보았다.
가끔씩 그녀와 나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렸다.
손서연은 내가 탑에서 만난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탑에서의 열하루.
긴 시간은 아니지만, 사부를 만나 새로운 심득을 얻으며 나름 의미 있는 성장을 하였으니 기분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미친.’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그동안 손서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 역시 적지 않은 성장을 했다.
분명 그녀에게 대단한 이벤트는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는 몬스터도, 퀘스트도 없는 곳이니까.
하물며 그녀가 십만대산에서 산삼 몇 뿌리를 캐 먹었을 리도 없었다.
‘그냥 살성이 가진 특성 자체가 사기적인 것인가?’
회귀 전 나도 잠깐 살성이 되어 본 적이 있지만, 살성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한다.
조금 더 길게 경험해 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손서연은 여전히 내게 위협적인 플레이어.
캥수를 낀다면 내가 어찌어찌 이길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쉽지 않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예전에 손서연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 실행을 못 한 것이 지금까지 와 버렸다.
잠시 잊고 있었다.
손서연과는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쌓으면 안 된다는 것을.
언제라도 나는 손서연과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뭐?”
“네가 실종된 동안, 죽은 것인지 아니면 탑에 있는지 궁금했었다. ……그래도 후자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갑자기 멍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10층 미션 종료 시까지는 12시간 남았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전체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10층이 거의 끝나 가고 있음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이곳에서의 미션은 생존.
애당초 예정되었던 피의 날을 피했기에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도리어 이번 10층은 우리 플레이어들에게 비약적인 성장의 무대가 되어 주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든 동료들에게는 큰 발전이 있었다.
손서연, 채이설, 그리고 얼마 전에 만난 김세용까지.
이곳에서 습득한 무공들은 향후 탑에서의 생존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이제 무림에서 남은 시간은 고작 12시간.
이제는 대미를 장식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럼 이제 천마지로의 다음 시험을 발표하도록 하겠다!”
생존한 생도들을 앞에 두고 태무정 장로가 직접 발표를 시작했다.
내게는 이번이 천마지로의 마지막 시험. 다시 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아쉬운 기분이 밀려왔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주어진 대진표에 따라 대결을 펼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 급하게 변경된 룰일 것이다.
이미 생도들 간의 일대일 대결은 세 번째 시험에서 해 보았으니까.
귀환한 사부의 농간임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권력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첫 번째 대결은 천호연. 그리고 이호영!”
이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사부는 탑에서 내게 제안을 했었다.
다시 제자로 인정받고 싶거든 천호연을 꺾으라고.
일부러 첫 번째 대진에서 우리 둘을 붙여 놓은 것이다.
최고의 컨디션에서 싸울 수 있도록 말이다.
이 대결을 두고 생도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사실상의 결승전.
천호연은 이번 기수의 최고 실력자로 기대를 모았던 인물이었고, 나는 천마지로가 시작하고 나서 급부상한 다크호스.
더군다나 매호평 암살에 성공하면서 나의 주가는 더욱 높아져 있었다.
“저…… 저기 봐 봐!”
“저분이 설마 지존?!”
대결을 앞두고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이 연무장으로 몰려들었다.
사부가 직접 참관을 위해 자리했고, 부교주와 좌우호법, 그리고 신교의 모든 장로들이 그 뒤에 함께 했다.
이처럼 생도들이 치르는 시험을 보기 위해 신교의 수뇌부가 몽땅 자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생도들은 이렇게 사부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바짝 얼어붙은 표정들이었다.
천호연과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번 대결은 검과 도의 승부.
천호연의 손에는 민무늬의 커다란 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흑혈도라 불리는 도종의 보물.
하지만 그가 지닌 무기보다는 천호연이 뿜어내고 있는 기도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조무건에겐 미안하지만, 이번 천마지로의 최고 인재는 천호연이 분명했다.
나와 손서연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네 덕분에 천마지로에 긴장감이 넘쳐 좋았다.”
내 앞에 마주 선 천호연이 여유 넘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매호평을 죽인 나를 보고도 전혀 주눅이 든 기세가 아니었다.
확실히 금수저 출신이 부러워지는 것이 이런 종류의 자신감이다.
그는 나를 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어쩌면 나를 도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이야말로 본래 천마지로의 주인공이 됐어야 할 인물이니까.
내가 괜히 그의 자리를 빼앗는 느낌이었다.
“그래, 너도 그동안 수고 많았다. 천호연.”
나 역시 천호연을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무림이란 세계에선 이방인일 뿐인 내가 이제는 완전히 깽판을 놓게 될 것이다.
도종 최고의 기대주를 무참히 짓밟을 것이며, 일생에 한 번뿐인 천마지로에서 그를 낙오시킬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사부의 제자로 인정받고 싶으니까.
사실 이제 나는 곧 이곳 무림을 떠나야 하며, 천마지로에서의 성과 따위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사부의 제자로 인정받게 된다 한들 내가 천마신교를 물려받는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이호영, 나는 너를 꺾은 후 천마지로에서 우승하여 도종의 명예를 드높일 것이다.”
천호연의 오그라드는 멘트를 듣고 나니 그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실제로 그는 단단히 결의에 차 있었으며 표정은 더없이 비장하기만 했다.
이제 내가 해 줄 수 있는 배려는 최고의 절기로 천호연을 부숴 주는 일.
“그럼 시작할까?”
나는 불굴의 검을 들어 올렸다.
사부가 눈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지금, 무영추혼검은 패할 수도 없으며 패해서도 안 될 것이다.
나는 무명보를 밟으며 천호연을 향해 압박을 시작했다.
* * *
도종의 후예인 천호연이 휘두르는 흑혈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
그의 도는 때로는 철퇴처럼 묵직하였으며 때로는 채찍처럼 유연했으며, 내가 상대해 본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웠다.
그 결과, 내가 입은 상처는 결코 작지 않았다.
살점이 살짝 뜯겨 나가며 왼쪽 어깨가 시큰거렸고, 등허리에도 자상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내가 졌다.”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천호연의 항복 선언으로 이제 더 다칠 일은 없게 되어서.
그는 패배를 이야기한 후 연무장의 무대 위에 대(大)자로 뻗어 버렸다.
미친놈.
정말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녀석의 옷은 이미 온몸에 난 깊고 얕은 상처들로 인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 항복 선언도 몸의 고통보다는 탈진으로 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단전에 내공이 한 톨도 남지 않게 되는 순간까지 녀석은 처절하게 내게 저항을 한 것이다.
이 정도면 도종의 후예로서 자존심은 충분히 지킨 셈이다.
지금 이 모습을 지켜보던 어느 도종 꼰대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이번 대결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누군가가 갑자기 일어나서 외쳤다.
신교의 팔 장로 중 하나인 편종호.
도종 출신으로 천호연의 조부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들었던 것도 같다.
그는 천마지로를 주관하는 태무정 장로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편 장로님.”
“태 장로님께 이번 대결의 공정성을 문제 삼고 싶습니다.”
“아니, 방금 전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대결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번 시험이 실시된 시기 말입니다. 듣자 하니 이호영이라는 저 아이 때문에 늦춰졌다는 말이 있던데, 혹시 제가 잘못 전해 들은 이야기인지요?”
말투는 신사적이었으나 편종호의 표정만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노여움으로 가득했다.
도종의 기대주가 나 같은 흙수저 듣보잡에게 처절하게 패한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것이겠지.
이제 와서 이의제기라는 게 아니꼽기는 하지만 꼬투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았다.
그가 지적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오해 마십시오, 편 장로님. 그건 불의의 탈락자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을 뿐이니까.”
“방금 불의의 탈락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그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 것이며, 지엄해야만 마땅할 천마지로의 원칙이라는 것이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뀌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 그건!”
순간 태무정은 말문이 막히는 모양새였다.
대부분의 논쟁에서는 명분을 가진 자가 우위를 점하는 법.
사실 편종호가 하는 말에 틀린 것은 없었기에 태무정은 막다른 길에 봉착하고 말았다.
잠시 침묵만이 감돌았다.
사부가 직접 나서 교통정리를 해 주기 전까지 말이다.
“아주 지랄들을 하는군!”
사부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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