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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69화 (69/292)

69화

어느 늦은 가을밤.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새 부쩍 굵어져 있었다.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천둥소리는 이곳 운월관의 분위기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시부럴! 날씨 한번 더럽게 지랄 맞네!”

운월관에서 일하는 막내 점소이는 연신 투덜거리며 드넓은 장원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근래에 보기 드문 장대비에 그의 옷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매 걸음 튀어 오르는 흙탕물에 짜증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썩을 놈! 그냥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처 잘 것이지!”

이런 악천후를 뚫고서 계집질을 하러 기루에 오는 놈이 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지금 시각은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경).

이런 야심한 때에 손님을 맞이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 그 손님의 심기를 절대 건드려서는 안 돼! 열 받으면 다 때려 부술지도 모르니까.

자신의 사수로 있는 선임 점소이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지금 맞이해야 하는 손님의 성격이 정말로 더럽다는 것.

까딱 비위라도 잘못 맞췄다가는 무슨 곤욕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말도 들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에잇, 시부럴!”

손님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으로 혼자서 욕 한 사발을 내뱉었다.

잠시 후면 억지 미소를 지어야 하니까.

끼이익-

점소이가 대문을 열자 그 앞엔 가마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를 쫄딱 맞고 서 있는 가마꾼들을 보자 점소이는 저도 모를 위로감이 느껴졌다.

이 지랄 맞은 날씨에 저 성질 더러운 거구를 가마에 태우고 오는 일이 보통은 아니었을 테니까.

“대문을 왜 이렇게 늦게 열고 지랄이야? 어?”

가마 위의 남자는 바로 짜증부터 냈다.

하지만 점소이는 미리 연습해 둔 가짜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응대했다.

저놈은 비록 적사문의 신입이지만 갑질하는 솜씨는 웬만한 장로급도 뺨칠 정도로 유명하니까.

“죄송합니다. 손님께서 쓰실 우산을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막 우산을 만들어 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어?”

“아닙니다. 하필 접대용 우산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김세용 무사님.”

“쳇!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특별히 봐주는 거니까 빨리 안내하기나 해!”

점소이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들고 온 우산을 김세용 쪽으로 씌웠다.

덕분에 이제부터는 비를 쫄딱 맞아야만 한다.

“얀마! 나를 뭘로 보고! 같이 쓰고 가!”

“네?”

“이놈이 귓구멍에 뭘 처박은 거야? 못 들었어? 같이 쓰고 가자고!”

“아! 네! 무사님!”

이놈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더 불편해졌다.

우산을 둘이 나눠서 쓰게 되면 김세용의 옷은 빗물에 두 배는 더 젖을 테니까.

괜히 그걸로 트집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점소이는 벌써부터 눈앞에 캄캄해졌다.

“오늘 운월관에는 별다른 일 없었어?”

“오늘은 날씨가 이래 가지고, 운월관 전체가 조용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점소이는 뭔가 불안했다.

지금 느지막이 온 김세용이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한 우산 아래에서 장원을 걸었다.

고래 등처럼 넓은 운월관. 보통 적사문의 무사들은 가장 안쪽의 별채를 사용하곤 했기에 점소이는 자연스럽게 그 길로 안내했다.

이미 적사문의 매호평이 별채를 사용 중이기도 했고 말이다.

“야, 그런데 혹시 수박도 나무에서 열리는 거였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기 봐 봐. 저 나무 꼭대기에 수박 하나가 열려 있잖아.”

개소리를 이렇게 참신하게 하다니.

점소이는 속으로 병신이라는 말만 삼킬 뿐이었다.

“무사님, 저건 그냥 은행나무입니다.”

“은행나무? 그럼 저기 열려 있는 큼지막한 과일은 뭔데?”

김세용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

신기하게도 그곳엔 정말로 수박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워낙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어 식별이 어려웠지만, 은행나무에 웬 과일이 정말 달려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휙-

김세용은 점소이의 손에서 우산을 낚아채더니 그것을 은행나무 위로 집어 던졌다.

공력이 실린 우산은 마치 화살처럼 쭉 뻗어 날아가 표적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아아아아악!!!”

점소이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내내 불길했던 예감. 왠지 오늘 내로 대형 사고가 터질 것만 같았는데, 이미 터져 있었던 것이다.

쿠웅!

바닥으로 떨어진 매호평의 머리통.

얼굴 표정은 아직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멀뚱멀뚱 뜬 눈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를 묻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 * *

천마지로의 네 번째 관문, 암살.

이 시험에서 성공을 거둔 이는 나를 포함하여 단 열두 명뿐이었다.

일곱 명은 시험 도중에 목숨을 잃었고, 반병신이 되어 돌아온 이가 열다섯, 나머지 대부분은 암살에 실패하여 겨우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소수이긴 하지만 현장에서 암살 시도도 못 한 채 돌아온 이도 있었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채이설이 그 이전 단계에서 탈락한 것은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암살이란 것은 그녀의 스타일과 너무 맞지 않으니까.

물론 암살과 너무 잘 어울리는 인물도 바로 내 옆에 있었다.

“손서연, 넌 이번에도 날로 먹은 거지?”

“너는 왜 총이 날로 먹는 무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솔직히 그렇잖아. 멀리서 조준하고, 방아쇠 당기면 끝. 여차하면 도망가기에도 좋고.”

“나의 무기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마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손서연은 내 말에 깊은 거부감을 표했다.

사실 그녀의 무기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그녀가 총질 한 번에 꽤 많은 마력을 소모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이유로 연사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는 점 정도.

“어쨌든 암살 표적을 소림의 인물로 정하다니, 손서연 너는 미친 게 분명해.”

손서연의 배포 하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비록 그녀의 암살 대상 수준은 내가 죽인 매호평보다 훨씬 아래였지만, 그래도 무려 소림 출신.

구파일방의 수장격인 소림으로 직접 쳐들어가 깔끔하게 총성 한 방을 울리고 돌아온 그녀를 리스펙트 할 수밖에 없었다.

난이도만 놓고 보면 나의 임무와 비교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림이 별거인가?”

“몰라서 묻는 거냐?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네가 소림으로 간다고 했을 때 미친년 취급했을 거야.”

“그건 적사문을 헤집어 놓은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뭐, 나는 대놓고 미친놈 취급받았으니까.”

모든 상황들이 잘 맞아떨어져 쥐도 새도 모르게 매호평을 암살할 수 있긴 했는데, 그는 확실히 나보다 훨씬 더 강자였다.

세향이 내게 협조하지 않았더라면, 캥수가 없었더라면, 조무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김세용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매호평이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날씨가 맑았더라면…….

……물론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겠지만 이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적사문 일대는 지금쯤 뒤집어졌을 것이다.

매호평은 적사문의 적장자로 훗날 문주가 될 예정인 인물. 나름 거물의 목을 베어 나무 위에 걸어 놓았으니, 어쩌면 사파 전체가 들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호영!”

교관이 내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태무정 장로의 호출 명령이 떨어진 것.

그는 이번 시험의 합격자를 한 명 한 명씩 불러 개인 면담을 하는 중이었다.

사실 나를 가장 먼저 부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가장 마지막 순서.

집무실 책상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태무정의 표정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기만 했다.

암살 성공에 대한 치하 따위는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말씀하십시오.”

“넌, 정말로 그분의 제자인 것이냐?”

“이미 수차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군. 믿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안 믿자니 뭔가 석연치 않고.”

“어차피 지존께서 폐관을 마치시면 해소될 수 있는 의문 아닙니까?”

“그야 그렇긴 한데…….”

결국 태무정은 뒷말을 삼키고 말았다.

분명 무슨 말을 하려다 마는 모양새.

어쩌면 신교의 수뇌부는 사부의 부재 상태에 비상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사부의 폐관이 길어지고 있었으니까.

또 어쩌면 수뇌부는 사부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지존께서는 사라지신 겁니까?”

예전부터 떠보고 싶었던 질문.

지금이 적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내 말에 갑자기 태무정이 노발대발했다.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

역시 내 짐작대로였다.

신교의 장로급 이상의 인물들은 사부의 실종을 알고 있다는 것.

“지존께선 강녕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부는 하늘로 솟은 것도,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니다.

그저 탑에 있을 뿐이다.

무의 끝을 보기 위해서.

“계속 건방진 말을 지껄이는구나!”

“혹시 다들 걱정하고 계신 거 아니셨습니까? 이를테면 폐관하신 그 장소에서 홀연히 사라지셨든가 해서.”

나는 태무정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미 나는 선 넘는 발언을 수차례 했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믿고 있다는 방증.

딱딱하게 굳어 가는 태무정의 표정만 봐도 그러했다.

“……너, 설마 뭔가 알고 있는 것이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지존의 유일한 제자라고.”

나는 태무정과 시선을 교차했다.

굳이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다.

비록 내 신분은 천마지로의 생도일 뿐이지만, 사부의 제자임을 밝힌 이상 신교의 누구 앞에서도 나는 당당할 수 있다.

태무정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결국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두 시진 뒤에 다시 부르겠다. 잠시 대기하고 있도록 해라.”

면담을 하러 태무정을 만났을 뿐인데, 왠지 뜻밖의 기회를 얻은 것 같다.

어쩌면 사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절호의 기회 말이다.

* * *

두 시진 뒤.

나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태무정을 만날 수 있었다.

이미 그는 수뇌부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나의 정체까진 밝히지 않았더라도, 나에 관한 이야기는 했을 터.

어떤 식으로든 액션이 올 것이 분명했다.

일단 애가 닳는 쪽은 태무정일 테니, 다른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장로님, 장로님께서는 이번에 제가 암살 임무를 성공했을 때 특별한 보상을 내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었지. 마침, 그 이야기부터 하려던 참이었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무정이 준비해 온 함에서 꺼낸 것은 인피면구.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얼굴 가면으로 무림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할 때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신기한 아이템인 것은 분명하지만, 뭔가 좀 아쉬웠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무공비급이나 영약 같은 종류니까.

“실망한 눈빛이구나?”

“아닙니다.”

“아니기는! 무공비급이나 영약이 아니라 아쉬워하는 거 같은데.”

그렇게 잘 알면서 고작 이딴 걸 보상이라고 내밀다니, 살짝 화가 나려고 했다.

역시 현실의 보상은 게임 시스템이 퍼 주는 것만큼 화끈하지가 못하다.

탑 시스템은 매호평을 암살한 내게 +30의 마력을 선사했다.

마력의 부족으로 만개하지 못했던 나의 무영추혼검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날개를 달게 된 것.

덕분에 이제 조무건과는 정식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다.

“이건, 그냥 평범한 인피면구가 아니다.”

“네,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특등급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물론 영혼 없는 리액션이었다.

“단순히 품질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부교주 소유의 신물이었으니까.”

“신물이요?”

“그래. 난 부교주가 이걸 흔쾌히 쾌척한 것이 신기해.”

이것이 부교주로부터 내려진 것이라면, 방금 전의 결정일 터.

태무정이 이렇게 나오니 갑자기 또 흥미가 동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그 인피면구의 무엇이 그리 대단하기에…….”

그냥 보기에 특별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재질이 조금 고급져 보인다 정도.

“이 녀석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거든.”

태무정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자신의 얼굴에 인피면구를 썼다.

차아악!

정말 그의 말대로 인피면구는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태무정의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이 녀석에게 마력을 불어넣으면 재밌는 일이 벌어지지.”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태무정의 얼굴에 붙은 인피면구는 저절로 움직이며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 냈다.

“자, 어떠하냐?”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태무정의 얼굴은 20대 중반의 완전히 다른 사람.

절대 감각을 지닌 나조차도 저 얼굴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절묘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저 인피면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얼굴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는 것.

보상에 실망한 것이 무색할 만큼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부교주의 신물을 왜 나에게 굳이.

“부교주가 전해 달라고 하더군. 지금 당장 부교주전으로 오라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게 분명해 보였다.

- 7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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