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천마지로의 세 번째 관문은 역시 모두의 예상대로 생도 간의 일대일 대결이었다.
문제는 대결의 무대가 상당히 괴랄하다는 것.
방사형으로 펼쳐진 스물네 개의 나무 밑동이 연무장에 설치되었다.
대결 중 이곳에서 떨어지면 탈락이니, 얼마나 빨리 이 무대에 적응하느냐가 관건이다.
“호영 씨. 무대가 저런 형태라면 실제 실력과는 다른 결과가 속출하지 않을까요?”
“잘 보셨네요, 이설 씨. 그리고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누군가가 아-주 유리하겠죠.”
그러면서 나는 눈짓으로 손서연을 가리켰다.
시험 방식이 공개된 후 손서연은 아마 속으로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녀와 싸우게 될 상대는 접근하는 것조차 훨씬 더 어려워질 테니까.
“그러니까 내게 잘 보여라. 대결 상대로 지목당하기 싫으면.”
칼자루를 손에 쥔 손서연은 아주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사실 평지에서 싸운다 해도 손서연은 피하고 싶은 상대지만 말이다.
대결 방식이 발표되고 나서 몇몇 생도들은 불만을 터뜨리며 아우성이었다.
정공법으로 승부하기에는 대결의 무대가 너무 큰 변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태무정 장로는 이런 생도들의 불만을 강하게 일축했다.
“그만 좀 징징대거라! 설마 실전에서도 평지 아니면 안 싸우려는 것이냐?”
예상은 했지만, 이번 관문에서 보법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졌다.
괜히 시험 전에 보법서를 제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며칠 만에 보법 하나를 마스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생도들에게 보법의 중요성을 일깨우려는 취지일 것이다.
“야, 조무건인가 뭔가 하는 놈이 계속 널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손서연이 내게 일러 주었는데, 사실 아까부터 나도 느끼고 있었다.
어찌나 날 노려보는지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였으니까.
“몰랐냐? 저놈이 나 떨어뜨리려고 벼르고 있었던 거.”
“저딴 얼간이가 너를?”
손서연은 기가 찬다는 말투였다.
조무건이 재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얼간이’로 평가받을 수준은 절대 아니다.
손서연은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셋 모두 조무건과 정식으로 붙는다면 십중팔구는 질 수밖에 없다.
해독 미션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그렇지, 조무건은 전체 생도들 중에서도 한 손 안에는 충분히 들어갈 실력이었다.
“모두 집중!”
태무정이 다시 연단 위로 올라왔다.
드디어 천마지로의 세 번째 관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재까지 생존한 생도들은 여기서 떨어지더라도 보직을 부여받는 것이 확정된 상태.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최대한 많은 단계를 통과해야 높은 보직으로 시작할 수 있으며,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테니까.
만약 최하급 보직으로 시작한다면 신교에 뼈를 묻는 순간까지 교주를 한 번도 알현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겠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태무정을 바라보았다.
관건은 생도들 중에서 누가 상대 지명권을 갖는지의 여부.
모든 것은 태무정에게 달려 있었다.
* * *
가장 먼저 지명권을 얻은 것은 손서연.
태무정도 그녀가 이번 관문에서 얼마나 유리한지 알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탄지공으로 오해하고 있는 손서연의 총은 이번 미션에서 너무 사기적이었다.
형체 자체가 보이지 않아 탄환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는 생도 수준에선 절대 볼 수 없으니까.
“저기, 저 녀석과 싸우겠습니다.”
손서연은 심지어 상대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지명했다.
자신과 싸울 상대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
지목받은 생도는 환종 출신의 진무겸.
진무겸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정말로 자신을 고른 거냐며 반문했다.
“그래 너.”
내가 판단하기로 진무겸은 상당한 실력자.
모든 능력치가 육각형에 가까운 만능 타입이다.
손서연은 최초의 지명권을 얻었으니 손 안 대고 코 풀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쉽게 갈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게 아니면 진무겸도 그녀의 눈엔 쉬워 보였거나.
“좋다. 그럼 대결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교관의 선언과 함께 두 사람은 무대 위로 올라갔다.
1미터가량의 높이에 방사형 징검다리처럼 설치된 나무 밑동이 스물네 개.
손서연은 그중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고선 총을 꺼내 들었다.
“호영 씨! 손서연은 왜 쉬운 상대를 피해 간 것일까요?”
“쟤는 원래 제정신이 아니잖아요.”
채이설에게 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서연이 누굴 고르든 웬만해선 질 것 같지 않았다.
평지라면 모를까, 이렇게 공간이 제약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손서연의 총 한 발 한 발은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골드를 걸라면 난 무조건 손서연에게 건다.
몰빵도 할 수 있다.
휘익! 휘이이익!
시작과 함께 진무겸은 손서연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발놀림. 경쾌한 몸동작만 봐도 그가 보통이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타아앙!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무대뽀로 접근하는 상대는 손서연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다들 탄지공이라 굳게 믿고 있는 손서연의 탄환이 진무겸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내겐 보이는 것 같다.
잠시 후 비명을 지를 진무겸의 모습이.
“허어어업!”
진무겸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 내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행히 몸은 잘 지탱하고 있어 실격은 아니었지만 손서연의 연속 공격이 이어졌다.
타아아앙!
이번엔 발목 쪽.
진무겸이 본능적으로 공중으로 몸을 띄우며 간신히 피했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눈으로는 탄환이 날아오는 걸 보지도 못했을 텐데.
“제법이군.”
“잘난 척하지 마. 네년의 공격 방식은 이제 다 파악했으니까.”
“아닐걸?”
타앙!
타아앙!
이번엔 연사였다.
저런 식으로 쏴 대다가는 마력이 남아나지가 않을 것 같은데 손서연의 총질에는 거침이 없었다.
휘익!
휘익!
하지만 진무겸은 나무 밑동을 지그재그로 밟으며 손서연의 공격을 모두 피해 냈다.
“다 파악했다고 했잖아.”
진무겸은 손서연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타아아앙!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렸고, 진무겸은 동시에 몸을 틀었다.
이번에도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허어어업!”
진무겸의 두 번째 비명이 터졌다.
“아니라고 했잖아. ……병신아.”
이번 공격엔 나도 놀랐다.
예리하게 휘어 들어가는 탄환의 궤적.
곡사였다.
그것도 타깃의 이동 방향을 고려한 아주 정교한 곡사.
오랜만에 손서연의 상태창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스킬 목록에 곡사가 추가되어 있었다.
타아아앙!
손서연은 다친 부위를 부여잡고 있는 진무겸을 향해 또 한 번의 탄환을 날렸다.
그녀의 손속에 자비란 없었다.
이번에는 복부.
“허어어업!”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승부가 기울었다.
손서연은 터벅터벅 진무겸을 향해 걸어갔다.
“잘 가라.”
타아아앙!
타아아앙!
손서연의 승리를 예견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일방적으로 끝날 줄은 정말 몰랐다.
부럽다.
총은 언제 봐도 사기적인 무기가 아닐 수 없다.
손서연이 까다로운 상대인 진무겸을 선택했던 이유.
알고 보니, 자신감을 가질 만도 했다.
* * *
“왜 그놈을 골랐냐고?”
“어. 사실 그동안 진무겸이랑은 접점 자체가 없었잖아.”
“사실 그놈을 고른 게 아니었다. 옆에 놈을 지목했는데 그놈이 일어나더군.”
“뭐?”
진무겸이 이 사실을 안다면 땅을 칠 노릇.
하지만 이미 승부는 정해졌고, 진무겸은 세 번째 관문에서 탈락하며 사실상 최하급 보직을 받는 것이 확정되어 버렸다.
그래도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이호영!”
손서연에 이어 두 번째로 호명된 것은 바로 나였다.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시험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나였기에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내가 지목한 대전 상대의 이름.
“조무건과 싸우겠습니다.”
내가 녀석의 이름을 거론하자 장내는 떠들썩해졌다.
빅 매치가 성사되었으니까.
조무건은 이번 천마지로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던 인물이었고, 나는 비록 듣보잡이었으나 화려하게 급부상한 다크호스였다.
조무건은 내 앞에 서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놈 이름이 먼저 불려서 걱정했었다. 혹시라도 도망갈까 봐.”
도망이라.
이번 시험의 무대가 일반 평지였다면, 결정의 순간엔 도망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조무건과 비교한다면 언더독이니까.
하지만 대결의 무대를 보고 나선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앞으로 쓸데없는 걱정은 사서 하지 마.”
확신한다.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승부라는 것을.
나와 조무건은 각자 양 끝에 배치된 나무 밑동으로 올라섰다.
시작 신호가 울렸고, 나는 차분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스물네 개의 방사형 징검다리.
내게는 아주 익숙한 그림이었다.
무명보 하권에도 그려져 있었으니까.
이것은 절대 우연일 리가 없었다.
‘이번 관문은 사부가 설계했어!’
사부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니 자기의 저서를 고른 생도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짜 놓은 것이 분명했다.
참 특이한 성격이기도 하다.
수많은 보법서 중에 무명보를 고를 생도가 존재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게다가 절대로 선택하기 싫을 이름을 지어 놓고 누군가 골라 주길 기대한다는 게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사부는 여전히 탑에 있는 것인가?
혹시 내가 10층 미션을 모두 마칠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탑에서 사부를 만났을 때에도 그는 그곳에 한참을 머물렀으니까.
이렇게 무림까지 왔는데도 사부를 못 만나고 돌아가면 많이 아쉬울 것이다.
휘이이익!
이런저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 조무건의 검이 나를 찔러 왔다.
녀석의 검은 직선적이면서도 패도적이었다.
단번에 나를 제압하려는 모양인데, 대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 이 무대는 내게 안방처럼 익숙하기만 하니까.
스르르륵!
나는 물 흐르듯 무명보를 펼쳐 내며 조무건의 공격을 피해 냈다.
조무건에게는 이 무대가 움직임을 제약하는 족쇄처럼 느껴지겠지만, 내겐 너무나도 편안한 홈그라운드였다.
파아앗!
파아아앗!
조무건의 공세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백 퍼센트의 전력이라면 모를까, 지금 조무건은 무대의 제약으로 본인 실력의 칠 할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나의 방어에 조무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미꾸라지 같은 새끼.”
이런 반응은 벌써부터 초조해졌다는 명백한 증거.
물론 언제까지 미꾸라지처럼 피할 생각만은 아니었다.
무명보와 결합된 나의 무영추혼검은 일말의 전력 손실 없이 녀석의 목을 노릴 것이다.
스윽!
내 불굴의 검은 호쾌한 직선을 그었고, 여백이었던 자리엔 붉은 핏물 몇 방울이 채워졌다.
곳곳에서는 경악의 탄성 소리가 들려 왔다.
멀찌감치 백스텝을 밟은 조무건의 눈빛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그는 순간 서늘해졌던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피를 닦아 냈다.
나는 지체 없이 조무건을 향해 전진했다.
승부를 길게 가져갈 마음은 없었다.
스윽!
스윽!
공간에 수놓아진 두 개의 사선.
조무건은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쓰러졌다.
쿵!
그리고 장외패.
손서연만큼이나 싱겁게 승부를 내 버렸다.
다시는 그 누구라도 탑 출신을 무시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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