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무명보의 저자를 사부라 단정 짓고 나니, 책 속에서 그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아직 내 수준으로는 그의 무예 철학을 털끝만큼도 이해할 수 없지만, 군데군데 간헐적으로 묻어 나오는 그의 감성이 느껴졌다.
그동안 이 보법이 무영추혼검과 신기할 정도로 조화를 이룬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었다.
- 탑과의 계약 때문에 너에겐 검술밖에 가르칠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사부의 말이 떠오르며 그때 그가 느꼈을 심정을 이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나에게 무명보부터 가르치고 싶었을 것이다.
이 보법이야말로 무영추혼검의 근간이 되는 것일 테니까.
무영추혼검을 익힐 때마다 턱턱 막혔던 부분을 어쩌면 이 무명보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놈의 무명보 하권이 더럽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지만.
나는 사부를 떠올리며 무명보를 다시 한번 탐독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부의 입장에서 이 보법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니 조금은 진척이 있는 것도 같았다.
일단은 이론상으로나마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굳이 무림이 아니더라도 내가 수련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이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이틀 후면…….’
짤막하게나마 진천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무림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기막힌 기연.
이번 10층을 끝마치고 나면 아마도 나는 아주 많이 강해져 있을 것이다.
* * *
“무명보?”
조무건 일행이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왔다.
실습을 위해 연무장으로 가는 길에 굳이 나를 보러 온 것이다.
정확히는 염탐.
녀석은 내가 어떤 보법서를 골랐을지 궁금해했다.
반대로 나는 그가 사신보를 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사신보는 어떠냐?”
“좋은 보법이지. 웬만한 생도들은 구결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조무건의 말투는 저 ‘웬만한’의 범위에 나를 끼워 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녀석은 여전히 나를 경계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건 아마도 미천한 내 출신 성분 때문일 터.
지구나 무림이나 이렇게 출신 따지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아하니,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 같은데 벌써 이론으론 끝낸 거냐?”
“뭐 어느 정도는. 책의 내용을 외운 건 진즉에 끝낸 일이고.”
다들 조무건을 천재라고 하더니, 암기력 하나는 확실히 대단한 듯했다.
“부럽군.”
“그나저나 넌 무명심법에 무명보라니. 아주 어울리는 조합이야.”
조무건은 슬며시 나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이 무명보의 저자가 현재 천마신교 지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궁금하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잘 어울린다니 고마워.”
“건방진 놈. 그 여유 있는 태도도 이젠 부리지 못하게 될 거야. 잊지 않았지? 천마지로의 세 번째 관문에서 내가 널 대결 상대로 지목하기로 했던 말.”
“잊지 않고 있어. 반대로 지목의 기회가 내게 먼저 주어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해 주지.”
“선택권이 너에게 먼저? 풉! 그런 일은 없어.”
조무건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물론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저놈과 내가 지금 붙으면 십중팔구는 내가 질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남은 시간 동안 대비를 충실히 하는 일.
더 약한 것은 나지만, 녀석에게 져서는 곤란한 일이다.
비록 지금은 약할지라도 나는 천마의 후예이니까.
* * *
좌호법 진천을 만나기로 한 것은 바로 오늘 이 시각.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는 십만대산 천영봉의 정상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을 것이다.
후배인 내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 예의겠지만, 나는 지금 천마지로의 과정 중에 있으니 그도 이해는 해주겠지.
내 생각보다도 사실 시간이 더 지체되긴 하였다.
그와 만나기 전 최대한 무명보를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는데, 내 계획보다는 진척이 더뎠다.
망할 사부. 책을 왜 이렇게 어렵게 써 놓아서.
나는 서둘러 등반 채비를 했다.
채비라고 해서 별다른 게 아니다.
“캥수야!”
나는 천영봉의 초입에서 캥수를 소환했다.
내 본래의 걸음으로 천영봉을 오르고 내린다면 너무 긴 시간을 이동으로 허비하게 될 테니까.
캥!
캥수는 경쾌한 울부짖음으로 내 소환에 임했다.
세 번째 관문이 시작되고 내가 무명보에 정신을 다 쏟느라 캥수를 오랫동안 탑에 방치해 둔 것이 괜시리 미안해졌다.
“그동안 답답했지, 캥수야?”
캥!
“그럼, 오늘은 원 없이 달려 보자.”
캥!
태생이 몬스터이니 확실히 야생이 체질인 녀석이다.
일을 시키려는 것인데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게다가 이놈은 십만대산의 풍경을 무척 좋아했다.
“출발!”
캥!
캥수 녀석은 무림에 와서 영약도 먹었으니까, 논스톱으로 천영봉 정상까지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3분의 2지점부터는 내가 직접 등반을 해야겠지만.
휘이이잉-
캥수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다행히 천영봉은 인적이 거의 드문 곳이었기에 누군가에게 캥수를 들킬 위험은 없었다.
캥! 캥!
캥수도 이렇게 원 없이 달리는 것이 오랜만이라 더없이 신나 보였다.
캥수 이놈. 영약을 먹은 이후론 완전히 에너자이저가 따로 없다.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처음의 스피드를 거의 유지하며 달렸다.
아마 캥수와 정상까지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늦었습니다. 좌호법님.”
남은 3분의 1을 직접 달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역시 진천은 천영봉의 정상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술 한잔을 걸쳤는지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
“늦다니? 우리가 언제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더냐? 꺼억!”
진천이 걸쭉한 트림을 내뱉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캥수를 타고 오는 건데.
“이미 많이 드신 모양이네요.”
“왔으면 술부터 따라야지, 뭘 그렇게 멀뚱멀뚱 있는 것이냐?”
나는 진천에게 술을 한 잔 올리고, 바로 그에게 한 잔을 받았다.
이게 얼마만의 술인지 모르겠다.
탑에 와서는 물론이고, 바깥에 있을 때도 미리 종말에 대비하느라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았으니 정말 오랜만의 알코올이었다.
그런데 알코올 맛이 원래 이랬던가?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순간 바로 위화감이 느껴졌다.
[만독불침이 발휘됩니다.]
독!
그것도 맹독이었다.
해독 과정에서 생성되는 열감이 상당했다.
대략적으로 천마지로 때 먹었던 수준의 곱절.
이 양반이 술에다 장난을 쳐 놓은 것이다.
“어떠냐 술맛이?”
“좋습니다. 좌호법님.”
진천 역시 나와 같은 것을 마셨으니 이미 그의 몸속에는 독이 침투해 있는 상태.
하지만 진천은 그 어떤 내공도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
독을 몰아내기는커녕,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만독불침인 것이냐?”
진천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부러운 녀석이군. 그 나이에 벌써 만독불침이라니.”
굳이 진천에게는 숨기지 않았다.
확신에 가까운 심증이 있는 상대에게 거짓말을 해서 불신을 살 이유는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니까.
“어떻게 제가 만독불침이 되었는지는 안 물어보시는군요.”
“그걸 내가 알아서 뭐에 쓰겠느냐?”
“그래도 보통은 궁금해하지 않습니까? 한낱 생도 주제에 하늘이 준 기연을 얻어 만독불침의 몸을 가진 것입니다만.”
“안 궁금하다는 데도! 네놈이 만독불침인 것을 확인하였으니 그걸로 됐다.”
역시 쿨내가 진동하는 노인네였다.
사실 이 부분은 천마신교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했다.
강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신교 내에서는 강해지는 수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추구되는 가치는 강해졌다는 결과로서의 사실.
내가 어떻게 만독불침이 되었는지 그 과정 따윈 진천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꺼억! 취기에 독기까지 오르니 기분이 아주 좋구나.”
초고수임에는 틀림없지만, 정상이 아닌 노인네인 것도 분명했다.
진천의 얼굴은 갈수록 검붉게 변해 갔다.
내공을 일으켜 당장 독을 몰아내지 않으면 위험할 것만 같았다.
해독되지 않은 채 퍼진 독은 고수와 하수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치명적이니까.
“왜? 지금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게냐?”
“아닙니다.”
하긴, 무림에서 제일 쓸데없는 짓이 절정고수 걱정하기.
하물며 진천은 초절정의 고수다.
“그럼, 지난 이틀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한번 보자꾸나.”
“네. 좌호법님.”
나는 천영봉의 정상에서 무명보를 펼쳐 보였다.
진천이 이야기했던 내 보법의 공백.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채울 수 있었다.
무명보라는 그릇이 워낙 컸기에, 비록 채운 부분은 미미하지만 진천 정도의 고수라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서억!
서억!
나의 무영추혼검은 무명보를 윤활유 삼아 그 어느 때보다 유려한 검무로 변모하였다.
느낄 수 있다.
이제 나의 검술은 중급검술의 초입을 까마득하게 지나왔음을.
사부가 지금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분명 흐뭇해 할 것이다.
말로는 쓰레기라고 표현하겠지만.
“쓰레기로군.”
“네?”
예상치 못한 진천의 감상평에 나도 모르게 검을 멈추어 버렸다.
“말 그대로야. 쓰레기.”
단 이틀이었지만 상당히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무명보의 하권은 상권의 뼈대에 풍성하게 살을 붙여 가도록 도와주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진천의 말은 완전히 달랐다.
“솔직히 칭찬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고작 칭찬이나 받으러 천영봉 정상까지 개고생해서 올라온 것이냐?”
진천은 술병을 하나 더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공으로 독기라도 몰아내고 마실 것이지.
그게 아니면 취기라도 좀.
“한 번 더 말해 주지. 쓰레기다 쓰레기.”
무슨 천마신교 전용 유행어도 아니고, 교주에 이어 좌호법에게마저 쓰레기라는 말을 듣고 말았다.
돌이켜 보니 장로 태무정에게도 쓰레기라는 말을 들었었다.
“못 쓸 정도입니까?”
“그래. 공백을 채워 넣으라고 했더니만 쓰레기로 가득 채웠어. 그릇이 아깝구나, 아까워. 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줄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놈아.”
진천은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확실히 이틀 전보다 세련돼지긴 했는데, 겉멋만 잔뜩 들었어. 쓸데없는 사족이 너무 많다는 얘기야. 이 보법의 이름이 무명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이 보법의 저자가 왜 그런 이름을 붙였을지 생각해 보라고.”
그저 사부가 장난친 것이라 생각했다.
얕보고 익혔다가 큰코 한번 다쳐 보라고.
“무명보. 비록 읽어 보진 않았지만, 창안자는 분명 있는 듯 없는 듯 물 흘러가는 보법을 의도했을 것이다. 이틀 전의 너의 모습에서 그걸 발견할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의 네 모습은 어떤 줄 아느냐? 쓸데없는 쓰레기들로 보법을 덕지덕지 치장하고 있단 말이다.”
진천은 떡이 되도록 취한 얼굴로 이런 이야기를 잘도 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흘려들어서는 안 될 말이다.
무공에선 한순간 깨달음이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오기도 하니까.
그리고 지금 난 진천의 말에 완전히 납득을 해 버렸다.
화려한 장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
오늘 내가 펼친 보법의 한 줄 요약이었다.
다시 한번 서고로 돌아가 무명보의 하권을 정독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든다.
“그나저나 누가 창안한 무공인지 천마지로가 끝나면 내가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어. 아무리 봐도 나보다 윗급인 것 같은데 말이야.”
진천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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