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무명보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진천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분명 무명보는 서고 내에서 내가 발견한 최고 별점의 보법서.
그럼에도 신교의 좌호법인 진천이 모른다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왜? 내가 모른다니 실망했느냐?”
“아닙니다.”
“아니기는! 딱 봐도 그런 표정이구만!”
솔직히 실망했다.
무명보에 대해 한마디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진천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서고에 무공서가 좀 많아야지! 신교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무공서는 있는 대로 다 때려 박다 보니 서고가 쓸데없이 너무 비대해져 버렸어. 그건 그렇고, 무명보라는 보법을 익혀 본 소감을 말해 보거라.”
“직접 펼쳐 보니 좋은 보법서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영 아닐 거 같은데 말이다?”
진천은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좌호법이 이 정도의 상승 무공을 전혀 모른다는 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교의 알려지지 않은 천재가 만든 무공이거나, 신교의 무공이 아니거나.
“네 녀석이 좋게 평가하니 더 궁금해지는구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좌호법님 앞에서 정식으로 펼쳐 봐도 되겠습니까?”
좌호법 정도의 고수라면, 내가 무명보를 완전하게 펼쳐 보이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진가를 알아볼 수 있을 터.
때마침 궁금하다고 하니 아주 좋은 기회였다.
“안타깝구나. 천마지로 시험 중인 생도에게는 본 호법이 개입을 할 수 없으니.”
진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게 특혜를 베풀어 준 태무정 장로가 선을 넘은 것이다.
“안 되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정 없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내 앞에서 한 번 그 보법을 다시 한번 정식으로 펼쳐 보거라. 한두 마디 정도 조언해 준다고 누가 날 잡아먹기라도 하겠느냐?”
진천이 이렇게 나와 준다면 나로선 땡큐.
이 정도 거물이 해 주는 말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얻는 게 있을 것이다.
“감사드립니다. 좌호법님.”
나는 진천의 앞에서 다시 한번 무명보와 무영추혼검의 콜라보를 펼쳐 보였다.
아까도 느꼈던 것이지만 신기할 정도로 익숙했다.
무명보가 처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마치 이 둘은 한 몸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방금 전보다도 훨씬 자연스러워졌어.’
보법을 기존의 검술 동작에 이식할 때엔 위화감이 생기는 것이 보통.
하지만 지금 나는 무명보를 너무 편안한 상태로 펼치고 있으니, 이것이 혹시 무명보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군.”
내 동작을 지켜본 진천의 짤막한 감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오늘 처음 해 보는 것일 텐데 마치 숨 쉬는 것처럼, 혹은 익숙한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네.”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좌호법 정도의 고수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저 역시 무명보를 처음 펼쳐 보며 특별한 위화감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좌호법님.”
“호오! 내 앞에서 건방을 떠는 것이냐? 아주 담담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군.”
“아닙니다.”
“이번 천마지로가 떠들썩했던 이유가 있었어. 너…… 천재구나!”
천재.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말이었다.
탑 이전의 세상에선 단 한 번도 어느 한 분야에서라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비슷한 말조차도.
하지만 내 눈앞에 서 있는 이계의 절세고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날 천재라 칭하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이 아니다.
신교의 지존인 사부 역시 나를 천재로 대했었다.
그는 나의 재능을 알아보았기에 날 후계자로 삼고 무영추혼검을 전수한 것이었다.
내가 천재라니 참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방금 네가 펼친 것들이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어.”
당연한 말이다.
앞으로 수천수만 번의 시련을 이겨 내야만 내 것으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무공이란 무릇 그런 것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아니, 네가 못했다는 게 아니라 뭔가 빠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네가 펼친 보법이 무명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서고로 돌아가 그거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 보도록 해라. 아무리 봐도 네놈의 보법은 똥 싸다가 끊긴 느낌이니까.”
꼼꼼히…… 라.
사실 꼼꼼하게 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 특징일 정도로 내용이 많지 않았으니까.
이미 무명보의 모든 내용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으니, 혹시 놓친 부분이 분명 있다면 이 자리에서도 복기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천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 너와 내가 만난 것 말이다, 사실 별건 없었지만 일단은 비밀로 하도록 하자. 괜히 그 깐깐하기 짝이 없는 부교주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피곤해지니까.”
“알겠습니다. 좌호법님. 오늘 가르침 감사했습니다.”
“가르침이라니! 난 오늘 널 보지 못한 것이다.”
“입조심하겠습니다.”
“오냐. 그리고 난 이틀 후 이 시각에 십만대산 천영봉에 오를 생각이다. 그동안 넌 열심히 수련하고 있도록 해라.”
이거 설마, 이틀 후에도 내게 개인 교습을 해 주겠다는 의미?
좌호법 진천. 아주 맘에 드는 캐릭터다.
뽕을 뽑아 줘야겠다.
* * *
결국 서고로 다시 돌아왔다.
진천의 말에 따르면 내가 펼친 무명보는 ‘미숙’이라기보다는 ‘공백’에 더 가깝다고 했다.
분명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다시 한번 무명보를 꺼내어 첫 장부터 차근차근 넘겨 갔다.
단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도록, 행간에 숨은 의미를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읽었다.
일독을 마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본의 내용 자체가 많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아쉽게도 없었다.
이럴 때는 한 번 더 읽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다.
나는 다시 무명보의 첫 장으로 돌아갔다.
‘학창 시절에 이렇게 공부를 했었더라면.’
분명 뭐가 돼도 됐을 것이다.
아포칼립스 이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겠지만.
그렇게 세 번을 더 읽어 보았지만, 새로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내용이라도 난해했다면 수십, 수백 번을 파고들어 구결의 묘리를 파헤쳤겠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데 여기에 내가 무슨 토를 달 수 있겠는가.
- 너 천재구나!
방금 전 만난 진천이 내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천재는 무슨.
혹시 내가 정말로 천재가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들었었지만, 그 생각은 깔끔히 접기로 했다.
무명보를 아무리 더 읽어도 진천이 말한 공백을 도저히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역시 나는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범인 중 하나일 뿐이다.
“호영 씨.”
그렇게 고뇌에 빠져 있을 무렵 채이설이 나를 찾아왔다.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 얼굴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열공 모드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보법서의 내용을 최소 단위로 해체해서 분석했을 것이다.
“이설 씨는 수련 잘 돼 가고 있어요?”
“네. 호영 씨가 추천해 주신 덕에 좋은 보법서를 찾은 거 같아요. 히히. 어렵지만 할 만해요.”
참 신기한 일이다.
약국에서 일하며, 평생 바퀴벌레 한 마리 잡아 보지 않았을 20대의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검술이며, 보법을 익히고 있다니.
탑 시스템의 보정 효과는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다.
심지어 지금 채이설은 무척 즐거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군요. 저는 지금 꽉 막혀 있는 상태인데.”
“호영 씨가요?”
“네. 그게 이상한가요?”
“이상하죠! 호영 씨가 이해하지 못할 책은 없을 거 같은데.”
그 말에 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또 등장한 이호영 천재설.
이쯤 되고 나니 사람들이 나를 상대로 몰카를 찍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도 들었다.
탑 전체가 나를 위한 트루먼 쇼의 무대 장치이고 말이다.
사실이라면 스케일 한번 더럽게 큰 몰카일 것이다.
“저는 그냥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이렇게 얇은 책 한 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에이! 겸손도 하셔라.”
지금 당장 탑 밖으로 나가 채이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라면 내가 이길 수 있는 분야는 많지 않다.
신체적 능력이야 내가 앞서겠지만 토익을 보든, 한국사 능력 시험을 보든 대부분의 지적 능력들은 채이설이 앞설 것이다.
“제목이 무명보네요? 호영 씨가 어려울 정도면 정말로 어려운 것이겠죠. 딱 제목만 봐도 어려워 보이잖아요.”
“참나!”
무명보 이름이 어딜 봐서 어려워 보인다고.
“그런데 여기 똑같은 책이 한 권 더 있네요?”
“네?”
채이설이 책장에서 얇은 보법서 한 권을 꺼냈다.
그녀의 말대로 제목은 역시 무명보.
이렇게 같은 책이 두 권씩이나 있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된 거 채이설과 같이 읽으면서 스터디라도 해 볼까?
라는 생각이 들 무렵, 위화감 느껴지는 일이 일어났다.
‘어? 별점이 일곱 개 반?’
놀랍게도 채이설이 들고 있는 무명보의 별점은 내 것과 달랐다.
내 손에 들고 있는 무명보는 다시 봐도 별 일곱 개.
뭔가 이상했다.
따지고 보면 애당초 별 일곱 개 반의 서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책장 전체를 스캔하며 가장 높은 별점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별 일곱 개의 무명보니까.
“이설 씨! 그거 잠깐만 줘 보실래요?”
“네? 여기.”
채이설은 군말 없이 내게 책을 넘겼다.
나는 재빠르게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가 읽은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독을 하며 확인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이설 씨. 이거 제가 좀 읽을게요.”
“네? 네!”
진천이 이야기했던 무명보의 공백.
어쩌면 이제 메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무명보는 한 권짜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째 권의 별점이 뒤늦게 제대로 보인 건, 앞 권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테고.
“이설 씨, 고마워요!”
“……뭐가요?”
“그런 게 있어요!”
어쩌면 난 천재일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그것을 확인해 볼 시간이다.
* * *
무명보의 진가는 하권에 있었다.
상권이 예열 단계였다면, 하권부턴 서서히 액셀을 밟아 가며 가속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난해함 역시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책장 사이의 비좁은 공간에서나마 동작들을 펼쳐 보는데, 단기간의 수련으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모든 단계 단계마다 벽에 턱턱 막히는 느낌.
이런 비슷한 느낌은 이전에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무영추혼검을 처음 익혔을 때.
그때는 사부의 도움으로 난관들을 돌파해 나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무명보의 하권을 읽어 나갔다.
변태!
이 무명보를 창안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변태인 것이 분명했다.
이름을 무명보로 지은 것도 그렇고, 상권과 달리 의도적으로 하권은 아주 어렵게 써 놓았다.
익혀 볼 테면 익혀 보라는 듯이 빼놓은 설명들이 너무 많았다.
덕분에 나는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개고생을 해야만 했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구결들은 수두룩 빽빽했다.
주석이 달려 있는 부분은 하나같이 무명보의 창안자인 본인을 은근하게 찬양하는 내용들이었다.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 없다면 익힐 수 없을 것이며, 다행히도 본인에게는 그것이 너무 많다는 표현들.
이 무명보의 저자. 누구인지 이제는 백오십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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