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마신서고 3층.
대부분의 생도들이 자신이 원하는 보법서를 찾는 데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여유가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
조무건 일행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 왔다.
이들은 비록 소곤거리는 수준으로 떠들고 있으나 절대 감각을 가진 나에겐 아주 또렷하게 들린다.
“시험이 나흘 뒤에야 있다니, 너무 길어.”
“왜? 보법이 하루 이틀에 완성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짧은 거 아니야?”
“하루 이틀에 완성되지 않으니 너무 길다는 거야. 어차피 나흘간 수련을 해 봤자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아아.”
투덜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무건이었다.
녀석은 당장에라도 시험을 치르고 싶다고 하였다.
하긴, 지난 단계에서 개망신을 당했으니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건이 너는 나흘 동안 마신서고에서 서책을 고르지 않으려고?”
“당연히 고르긴 해야지. 마침 보고 싶었던 보법책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차피 그 내용을 외우는 데에는 한 시진밖에 걸리지 않아.”
“한 시진? 그게 가능해? 네가 암기의 천재라는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조무건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제대로 습득하는 게 어려운 거지, 외우는 게 어려워?”
“아무리 그래도 한 시진은!”
“나한테는 충분해. 그 정도면. 마침 내가 원하던 책이 여기 있군.”
“사신보?”
조무건이 선택한 보법서 이름이 사신보인 모양이었다.
사실 조무건에겐 굳이 참고할 필요가 없을 보법서인지 모른다.
이미 녀석의 가문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조무건에게 상승보법을 가르쳤을 테니까.
나는 서고 내의 별점을 스캔하며 녀석들에게 접근했다.
내가 지척까지 다가서자 조무건 일행은 나에게 살며시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조무건은 여전히 나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지 갑자기 눈빛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눈싸움을 하러 온 것도 아니니 녀석이 눈에서 레이저를 쏘든 말든 신경 쓸 바는 아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무건이 들고 있는 사신보로 향했다.
별점은 별 네 개.
내가 채이설에게 추천해 준 서책보다 별점이 반개나 높았다.
조무건은 어렵지 않게 꽤 수준 높은 상승 보법서를 선택한 것이다.
이래서 혈통 좋은 가문에서 자란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과는 정보의 양과 질 자체가 다르니까.
“사신보. 좋은 책을 골랐군.”
“신교의 12대 지존께서 창안하신 보법이지. 익히기가 워낙 난해하여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말이야.”
물론 나는 그런 것까진 모른다.
다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별점.
지금까지 스캔한 서적 중에서는 최고점이다.
조무건은 자신이 선택한 사신보에 대한 TMI를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모양인데, 참 쓸데없는 짓이었다.
“너!”
“왜.”
이놈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놈은 갑자기 잔뜩 무게를 잡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실토해라.”
“도대체 뭘!”
“해독 시험에서 네가 1등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솔직히 너 항…….”
진짜 지겨운 놈이다.
조무건은 내가 항독지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극히 낮은 확률로 독성에 강한 저항력을 갖고 태어나는 체질.
사실 조무건뿐만 아니라 많은 교관들이나 생도들도 그렇게 의심하고 있기도 했다.
기왕 상상의 나래를 펼칠 거라면 만독불침이라고 이야기를 하던가. 그게 사실이기도 하니까.
“노코멘트.”
“뭐?”
갑자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영어에 녀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구식 영어는 처음 들어 본 말일 텐데, 놈은 굳이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노코멘트라고.”
“노코멘트…… 라. 역시 그런 것이었군.”
조무건, 이놈 어쩌면 미친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당황했는지 갑자기 말을 돌리며 물었다.
“천마지로 세 번째 관문의 전통은 너도 알고 있겠지?”
“뭔데.”
“뭐? 설마 그런 것도 모른단 말이냐?”
왠지 모르게 밝아진 조무건의 표정.
하지만 놈의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도 역력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한.
“말했잖아. 모른다고.”
“지금 네놈이 날 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조무건은 혼자 구시렁거리면서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세 번째 관문에서는 항상 생도들끼리 상대를 지목해서 대결을 펼쳐 왔다. 아마 이변이 없다면 이번에도 그 방식은 유지될 테고.”
몰랐던 사실이었다.
내게 주입된 기억 속에 그런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현자의 상태창이 조만간 그에 관한 정보를 주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조무건이 먼저 내게 유용한 걸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난 널 지목할 생각이다.”
“날?”
이건 좀 곤란한 일이었다.
비록 이 녀석이 호구 포스를 풍기고는 있으나, 천마지로에 참가하는 생도들 중에서는 최상위의 실력자이니까.
지난 단계에서 확인했듯이 내공은 최고 수준이었고.
“그래. 바로 너.”
내공을 제외한 다른 기본기가 살짝 부족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조무건은 내가 이기기에 많이 벅찬 상대였다.
“재밌는 승부가 되겠군.”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고민이 깊어졌다.
분명 천마지로의 세 번째 관문은 보법 활용이 강화된 결투 형식이 될 공산이 컸다.
녀석이 날 지목하겠다고 예고한 이상, 남은 나흘 동안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 * *
손서연에게 서적을 추천해 주고, 조무건 일행을 만난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내가 수련할 책을 고르지 못하였다.
나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별점. 하지만 조무건이 고른 별 네 개 이상은 아직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에 쫓겨 괜히 어설픈 걸 고를 이유는 없었다.
이곳 무림에서 얻은 지식은 향후 탑에서의 수련에 탄탄한 바탕이 될 터.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려 한 시진가량 눈이 빠지게 서고의 서적들을 스캔하고 났을 때, 드디어 내게 한 줄기 광명이 내려왔다.
‘이 별점 실화냐?’
내 눈앞에 펼쳐진 별의 개수는 무려 일곱 개.
별점 다섯 개를 기대하며 헤매었는데,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기연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무명보?’
하지만 놀랍게도 이 서책의 이름은 무명보였다.
신교에 존재하는 가장 쓰레기 내공심법이 무명심법이었는데, 이름만 놓고 본다면 무명보와 무명심법은 마치 세트처럼 느껴졌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별점 일곱 개의 서책이 이곳 3층에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상승 보법이 제목 그대로 무명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조무건이 별 일곱 개인 이 무명보를 놔두고 별 네 개인 사신보만 선택한 것만 봐도 이 서책의 존재를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쨌든 운이 좋았다.
모든 생도들이 서책 선택을 완료할 때까지 이 무명보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책장에서 무명보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 두껍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어쩌면 다 외워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현자의 상태창을 얻은 이후엔 정말로 머리가 좋아진 느낌이니까.
나는 빠르게 책장을 넘기며, 무명보의 구결과 원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서고에서는 수련을 할 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이론적 습득을 마친 후 연무장으로 나가 실습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쉽다!’
별 일곱 개의 비급에는 응당 존재해야만 할 난해함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머리가 좋아진 효과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서책의 난도는 그리 어렵진 않은 것 같다.
혹시 무심코 놓친 부분이 있거나,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신중하게 책장을 수차례 반복하며 넘겼다.
하지만 여전히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은 쉽다는 것.
일단은 연무장으로 나가 실습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 익힌 것과 실제 몸으로 확인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 *
연무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직 생도들이 실습을 진행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본인들이 선택한 서책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터. 지금 이 시간에 연무장에 나와 있는 내가 비정상이었다.
어쨌든 쾌적한 환경에서 수련을 할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 나는 서적에서 본 동작들을 하나하나 재현해 나갔다.
심법인 화명신공의 바탕 위에 무명보를 펼쳐 나가며, 무영추혼검을 구현했다.
마신서고에서 무명보를 탐독할 때, 머릿속으로는 막연하게 이 세 가지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
생각했던 것보다도 이 삼박자는 더 잘 맞아떨어져 갔다.
무명보는 화명신공과 무영추혼검 사이에서 그럴듯한 가교 역할이 되어 주었다.
확실히 느껴진다.
보법 하나가 추가된 것으로 나의 무영추혼검은 더욱 세련되어졌음을.
오늘 처음 시전하는 보법이지만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말도 안 되는 말이긴 한데, 이 보법, 왠지 금방 마스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누군가 있다.’
연무장 근처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수련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해도, 절대 감각 특성을 가진 내가 이제야 이걸 알아채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니까.
이렇게 나를 상대로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감출 수 있는 건 태무정 장로조차 할 수 없는 일.
이게 가능한 사람은 딱 한 명 알고 있다.
사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2차 소름이 폭발했다.
“너로구나!”
“에?”
돋았던 닭살은 곧바로 가라앉았다.
사부가 아니었으니까.
의문의 인물은 곧바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 녀석이 천마지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그놈이로군.”
육십 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
비록 사부는 아니지만 절세고수임은 분명했다.
‘장로급 이상의 인물!’
태무정 장로보다 확실하게 우위에 있는 인물은 신교 내에서도 얼마 없다.
교주인 사부를 빼고 나면 부교주, 그리고 좌우 호법 정도일 것이다.
나는 곧바로 예를 갖추었다.
“생도 이호영, 호법님께 인사 올립니다.”
이 자가 좌호법인지 우호법인지는 모르기에 호칭은 대충 뭉뚱그려 말하였다.
부교주는 아니다.
내게 주입된 정보에 따르면 부교주는 여자니까.
“네놈 출신이 교단에서도 먼 곳이라고 하던데, 용케 날 알아보는군. 좌호법 진천이다.”
역시 그랬다.
좌호법 진천이라 하면 천마신교 내에서 3인자의 인물.
“듣던 대로 꽤나 재미있는 검술을 펼치는군. 그건 그렇고, 이 시간에 너는 왜 마신서고가 아닌 연무장에 있는 것이냐?”
“서고에서 고른 보법서는 모두 읽었습니다. 그래서 연무장에 나와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직접 몸으로 실습해 보는 중이었습니다.”
“벌써 다 읽었다고?”
“그렇습니다.”
“역시 신기한 녀석이군. 무엇이냐? 네가 선택했던 보법서가?”
“무명보입니다.”
나는 대답을 하고 나서 진천의 말을 기다렸다.
진천이라면 분명 무명보에 대해 알고 있을 터.
이 보법서에 대해 무언가 언급을 해 줄지도 모를 거라 기대했다.
“무명보라고 했느냐?”
“네. 좌호법님.”
확실히 무명보는 좋은 보법으로는 보였다.
그렇다고 이게 별점 일곱 개일 정도인가? 라는 의문은 남았다.
어쩌면 진천은 내게 그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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