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자시(子時)
밤 11시가 넘은 이 야심한 시각.
나는 태무정이 기거하는 장원에 와 있었다.
천마신교의 수뇌부라면 응당 으리으리한 집에 거주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의 가옥은 단출했다.
이 밤중에 낯선 노인네의 침소를 방문하게 되다니, 탑에 오고 난 뒤에 별의별 경험을 다 해 보는 것 같다.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문밖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네, 신교 제자 이호영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장로님.”
노인네가 귀 하나는 더럽게 밝다.
하긴, 이 정도의 절세고수라면 감각이 극성까지 발달해 있는 것이 정상이다.
어쩌면 나의 <절대 감각>에 거의 근접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사부는 나를 능가할 정도였으니까.
“편하게 앉거라.”
태무정의 침소는 상당히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홀아비답지 않게 깔끔한 성격이었다.
다른 장로들이 많은 첩들을 두고 있는 것과 다르게 그는 본부인을 여읜 후 꽤 오랫동안 혼자 지내 왔다고 하는데, 독거노인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오늘 밤 널 부른 이유. 혹시 짐작하고 있느냐?”
이렇게 물으니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든다.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겠지요.”
“가르침이라. 건방진 녀석! 설마 네놈이 내게 가르침을 받을 족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충분히 된다.
되고도 남는다.
다름 아닌 신교의 지존이 나의 사부이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오늘 장로님께서는 저의 내공 상태에 깊은 한숨을 쉬셨기에…….”
사실, 천마지로에 참여하고 있는 무사들 중 나의 내공 수위는 최하위였다.
탑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손서연보다 낮음은 물론이거니와, 채이설보다도 낮다.
체력, 근력, 민첩 같은 스탯과 달리 마력은 레벨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기에 최하 레벨인 나의 마력은 높을 수가 없었다.
플레이어가 아닌 찐무림인들과 비교하면 그 격차는 더욱 현격하고 말이다.
사실 그동안 마력의 부족함으로 인해 어려운 점은 없었다.
내가 구사해 온 초급 검술은 높은 수준의 마력을 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더구나. 구사하는 검술 수준에 비해 너의 내공은 너무 형편없었으니까. 심지어 네가 익힌 내공심법이…….”
“네, 무명심법입니다.”
태무정은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신교의 주요 종파 자제들은 어렸을 적부터 상승의 내공심법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각종 영약을 통해 이미 심후한 내공을 쌓은 상태이다. 겉보기에는 똑같이 천마지로에 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너와는 출발선이 많이 다르다.”
“알고 있습니다. 장로님.”
“무슨 연유로 네가 그런 쓰레기 같은 내공심법밖에 배우지 못했는지는 묻지 않으마. 다만,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은 너무 불리하기에 나는 약간의 보정을 주고자 한다. 그래서 내가 너를 오늘 부른 것이다.”
역시 짐작한 대로였다.
분명 나는 태무정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의 무의식이 내가 펼친 천마의 검술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감사의 표시가 약소하구나. 혹시 좀 더 감격스러운 표정은 짓지 못하느냐?”
갑자기 태무정의 캐릭터가 사부와 겹쳐 보인다.
천마신교의 수뇌부들의 종특인가?
이 부분은 이미 사부를 통해 단련되었기에 나는 비위를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맞춰 주었다.
“좋다. 그럼 이제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너의 대답에 따라 네가 받을 선물의 종류가 달라질 것이니라.”
“네, 장로님.”
태무정이 내게 다가왔다.
탁.
탁.
순식간에 혈도를 제압당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무림에서는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니, 정말 경이적인 기술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난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상황.
태무정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눈을 부릅뜨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 정도밖에는.
“자, 지금 넌 적에게 완벽하게 제압된 상태이며 그들은 네게 신교의 은밀한 비밀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건 무림맹의 나부랭이일 수도 있으며, 사마련의 쓰레기들일 수도 있겠지. 자결할 수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네가 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이냐?”
참으로 황당한 테스트였다.
정해진 답도 없기에, 최대한 태무정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혈도를 제압해야 하는 건가?
그 순간 현자의 상태창이 내게 정보를 보내왔다.
내용은 참으로 놀라웠다.
[정보: 당신은 절대 감각의 소유자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감각을 완전하게 제약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눈 코 입이 열려 있는 것처럼 당신의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온몸으로 기의 순환을 느끼며 막힌 곳을 찾아내십시오. 티끌만큼 살아 있는 감각만으로도 당신은 제압당한 혈도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된다.
지금 나의 혈도를 제압한 이는 천마신교의 절대고수.
내가 자력으로 풀어내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내 내공은 태무정이 표현한 대로 쓰레기일 뿐이니까.
그런데. 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네가 너의 주둥이까지는 제압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저의 대답은.”
“그래, 너의 대답은 무엇이냐?”
“저를 이렇게 만든 이를 당해 낼 순 없으니, 그냥 자결하겠습니다.”
“멍청한 대답이구나. 자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일렀거늘! 설마 혀라도 깨물 생각인 것이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총명한 녀석이라고 생각했거늘.”
태무정의 표정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가 물은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나의 기지를 시험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대답은, 내가 그에게 심어 놓은 좋은 첫인상을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다.
챙!
나는 내 옆에 내려놓은 불굴의 검을 집어 들었다.
“어?!”
지금 태무정의 놀란 표정.
사진으로 찍어 둘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일을 겪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온다면, 저는 이 검으로 제 심장을 찌르겠습니다.”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지금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태무정 같은 절세고수도 나 같은 나부랭이로 인해 감정의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저의 답변이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하는 놈이냐고 물었다!”
어쨌든, 이제는 해명해야 할 시간.
“제가 장로님께서 제압하신 혈도를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저만이 가진 특이 체질 때문입니다.”
“그런 체질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거늘!”
“지금 보고 계시질 않습니까?”
“헛소리!”
태무정이 다시 나의 혈도를 짚으며 제압을 시도했다.
그의 전광석화 같은 동작에는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다.
또다시 눈 뜨고 당해 버리는 수밖에.
물론 곧바로 풀어낼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한 번 해 보고 나니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보십시오! 장로님. 저는 또 이렇게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양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내가 절세고수가 된 느낌이었다.
* * *
“내가 준비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백년설삼,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화명신공. 너의 답변 여하에 따라 선택하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
화명신공이라는 말에 내 눈은 번쩍 커졌다.
그것은 신교에 존재하는 독문심법이 아닌 무공 중에선 최상위의 것이었으니까.
“그럼 제가 받게 될 것은…….”
타악!
태무정은 손에 들고 있던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엔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약초 하나가 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지만 이것이 태무정이 언급한 백년설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받거라.”
태무정은 내게 목함을 내밀었다.
백년설삼.
잘 복용한다면 오 년에서 십 년 정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영약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실망스러웠다.
화명신공에 대해 듣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내가 받게 될 것이 심법이 아닌 영약이라면 장기적으로는 무조건 손해일 수밖에 없다.
화명신공 정도의 상승심법이라면 수련 여하에 따라 단기간에도 십 년 이상의 내공을 쌓을 수 있을 테니까.
“왜? 실망한 눈빛이구나.”
“아닙니다. 장로님. 감사히 받겠습니다.”
양손으로 목함을 받으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내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제압당한 혈도를 너무 건방지게 풀었던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주워담을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
따지고 보면 백년설삼의 복용은 단기적으로 내공을 상당 부분 끌어올려 줄 좋은 보상이니까 말이다.
“자, 이 자리에서 바로 복용하도록 하거라. 내가 흡수를 돕는다면 능히 십 년의 내공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나는 백년설삼을 입에 넣고는 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벌써부터 단전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레벨업을 하여 마력이 증가될 때보다 훨씬 큰 변화임이 분명했다.
역시 영약이 괜히 영약이 아닌 모양.
스탯상으로 얼마나 마력이 늘어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꾸나.”
태무정은 등 뒤에 앉아 내 등 위에 손을 얹었다.
나의 운기조식을 보조하며 백년설삼의 흡수를 도우려는 것이다.
“지금부터 나의 지시에 따라 몸속의 기운을 순환시키도록 하여라.”
나는 호흡을 들이마시고 뱉으며 단전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를 온몸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태무정이 지시하는 방식이 무명심법의 구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과정이 진행되고 심화될수록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화명신공의 기초이니라.”
그 말에 순간 감정의 물결이 살짝 요동쳤다.
“어허! 아까운 영약을 날려 버릴 셈이냐?”
기연.
천마신교에서의 기연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 *
“놀랍구나.”
태무정은 나로 인해 세 번 놀랐다고 말했다.
나의 무영추혼검에 처음 놀랐고, 제압당한 혈도를 푸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으며, 화명신공을 이해하는 나의 자질에 경악했다고 한다.
사실, 무공에 대한 나의 자질은 사부도 익히 인정했던 바였다.
내가 천마의 후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왔던 내가 알고 보니 천하의 무공 기재였다니.
아마도 현자의 상태창이 주는 효과 때문일 것이다.
“어찌 너 같은 인재가 그동안 숨겨져 있었는지 의문이구나.”
“장로님께서 발견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 역시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니, 주머니 속의 송곳이 언제까지 드러나지 않을 순 없는 법이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태무정은 내가 지금껏 삼류 무공만을 배워 왔던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물론 이것은 반만 맞은 오해였다.
무영추혼검은 천마의 최종절기.
아직 내가 제대로 된 진가를 보여 주지 못했을 뿐, 사부의 말에 따르면 고금제일의 검술이다.
사부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날 알아보지도 못할 테고 만나 주지도 않겠지만.
“그런데 장로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지금 지존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이렇게 천마신교에 왔어도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어디에 있는지라도 알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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