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손서연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의 날을 성사시킬지 말지에 대한 투표권을 내게 유보하겠다는 뜻을 비치며.
“말했잖아. 나는 너의 미래 예지력을 믿어 보겠다고.”
미래 예지력이라니.
아주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그런 건 나에게 없어. 나에게 미래 예지가 있다면 지금 이렇게 아등바등 살 이유도 없겠지.”
“미래 예지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그럼 통찰력이라고 해 두지. 어쨌든 지금까지 너의 선택은 항상 옳았으니까. 그리고 너는 아마도…….”
그놈의 대살성이 뭐길래.
사실 손서연이 지금 이러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의 날은 탑에 존재하는 모든 살성들의 투표로 이루어진다.
지금 여기서 행사하는 한두 표 정도로는 대세를 바꾸기 어렵다는 의미.
하지만 손서연은 내 뜻과 내 한 표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토록 내 선택에 집착하는 이유. 이해하기가 어려워. 고작 한 표일 뿐인데.”
“고작 한 표가 아닐 수도 있다.”
“뭐?”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지.”
손서연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해 보였다.
물론 이 녀석이 가볍게 굴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지만 말이다.
“이유? 그런 말을 꺼낸 건 결국 내게 밝히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사실 고민을 했는데, 결국 너에게는 말해 주는 것이 좋겠군.”
역시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말해 봐. 뜸들이지 말고.”
“나는, 내가 행사하는 단 한 표로 전체의 의견을 뒤집을 수 있는 히든 피스를 알고 있다.”
“뭐?”
“너도 알다시피 모든 살성들은 한 가지씩의 고유 정보를 갖고 있지.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10층을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로 만들 수 있는 방법.”
손서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하는 말은 절대 농담이 아닐 것이다.
사실 8층에서 만난 한강혁에게도 그만의 고유 정보가 있었다.
지금 손서연이 말하는 내용처럼 파격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방법이 도대체 뭐야?”
“그 전에 너의 결정부터 들어 봐야겠어. 넌 어떻게 생각해? 10층을 피의 날로 보내길 원하는 건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만약 10층을 무난하게 넘길 수만 있다면 당분간 피의 날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손서연이 절묘한 타이밍에 밝힌 정보는 무조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녀석을 과연 믿어도 좋을지의 문제가 찝찝하긴 하지만.
“피의 날을 만들기엔, 솔직히 10층은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야.”
“역시.”
“왜?”
“너무 반전 없는 대답이라. 넌 왠지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았으니까.”
“이제 말해 봐. 너의 한 표로 전체의 의견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
손서연은 인벤토리에서 푸른색, 붉은색 수정체를 동시에 꺼냈다.
일종의 투표용지, 나 역시 살성이었을 당시 가지고 있던 것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어차피 피의 날이 되면 감수해야 할 위험.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해 봐.”
“10층을 피의 날로 만드는 걸 반대한다면 너도 알다시피 이 푸른 수정체를 제단에 던져야 하겠지.”
“그래, 그건 단 한 표의 역할.”
“……하지만!”
파아아앗!
손서연은 갑자기 푸른색 수정체를 터뜨렸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수정체는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이렇게 가루를 제단에 던지면, 재미난 일이 벌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손서연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그대로 실행했다.
그녀의 손을 떠난 푸른 먼지들은 뿌옇게 안개를 만들어 내며 제단을 향해 날아갔다.
스르르르.
[히든 피스가 실행되었습니다.]
[잠시 후 제단 위에 포털이 생성됩니다.]
[포털을 통과하여 미션을 클리어하면 당신의 뜻이 곧 모든 살성의 뜻이 됩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놀라운 광경은 그렇다 치고, 손서연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이런 거였어?”
“역시, 대살성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리가 없지.”
[포털이 생성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56분 43초]
[9층에는 현재 하나의 망자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구역에 바보는 없는 모양이군.”
이제 남은 망자는 단 하나.
아마도 고용우 쪽일 것이다.
녀석은 최대한 시간을 소모하면서 몬스터를 괴롭게 죽인다고 공언했으니까.
9층에 대한 모든 시름은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관건은 10층.
“아직 선택의 기회는 남아 있어. 이 포털을 들어가지 않는 선택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손서연이 마지막으로 내게 뜻을 물었다.
“이미 결정은 했어.”
“역시 번복은 없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지만, 이 탑이 불가능한 미션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겐 현자의 상태창도 있으며, 캥수도 있다.
“들어가서 해결하고 올게.”
“설마 혼자 가겠다는 거냐? 이 포털은 내가 만든 건데.”
“너도 가려고?”
“당연한 걸 뭘 물어.”
내 당초 계획은 이미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손서연의 뒤통수를 치며 생사결을 펼치고 있을 시간, 하지만 이야기는 예상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흑혈랑을 사냥하십시오.]
심산의 산기슭.
포털 속 세상에서는 우리를 압도하는 거대한 절경이 펼쳐졌다.
“흑혈랑…….”
“아마도 이 산의 주인이겠지.”
미니맵에 보이는 몬스터는 단 하나.
흑혈랑뿐이었다.
산의 규모는 거대했으나, 이미 녀석의 위치는 파악된 상황.
캥수가 있으니 이동 시간에 대한 부담도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서둘러야 해. 9층의 제한 시간이 50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이 거대한 산 속에서 우리가 서두른다고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 난 불가능한 미션으로 느껴지는데.”
“아니, 가능해. 흑혈랑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조우하는 것까지는 말이야.”
“그 자신감, 근거는 있는 거겠지?”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캥수야, 미안한데 두 명도 태울 수 있겠어?”
캥???
녀석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냥 평지도 아닌 산길을 두 명이나 태우고 뛰어다는 것은 아무리 캥수라 해도 부담일 것이다.
“미안하지만 무리 좀 해 줘. 대신 로비로 돌아가면, 세용이랑 스파링 세 번 시켜 줄게.”
캥!!!
역시 캥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스파링만 한 게 없다.
“타!”
“어떻게 타라는 거야?”
“어떻게긴. 내가 캥수한테 업히면, 넌 나한테 업혀야지.”
“뭐?”
“싫으면 뛰어서 따라오든가.”
“그런 개고생은 사절이다.”
결국 캥수, 나, 손서연 셋의 이중 어부바가 만들어졌다.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캥수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동기 부여는 충분하니까.
“가자, 캥수야.”
캥!
캥수는 우리 둘을 태우면서도 경쾌하게 달렸다.
기특하게도 녀석은 험지를 콩콩 뛰어다니며 흑혈랑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 나갔다.
“정말 어디인지 알고 가는 거냐?”
“왜? 불안해?”
“불안할 리가. 어차피 나는 상관없어. 원래는 10층을 피의 날로 만들려고 했었으니까.”
하긴, 손서연은 우리가 흑혈랑을 발견하지 못한 채 9층을 마무리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쪽을 바라고 있는지도.
“손서연, 물어볼 게 하나 있어.”
“뭔데.”
“이대로 미션을 수행해도 정말 괜찮겠어? 우리가 흑혈랑을 사냥해서 피의 날이 성사되지 않으면 PK를 못 채울 텐데.”
“어떻게든 되겠지. 살성의 권능이 좀 줄어든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물론 죽는 것은 아니지만, 권능의 약화는 탑을 오를수록 치명적이 될 것이다.
이는 내가 손서연의 지금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살성과 대살성의 관계가 분명 주종 관계는 아닐 터.
나도, 한강혁도 모르는 존재였던 대살성을 손서연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대살성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따르겠다는 태도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손서연을 죽일 생각이었기에 중요치 않은 문제였지만, 스토리가 이렇게 흘러간다면 그 문제는 또 달라진다.
캥!
잘 뛰어가던 캥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낭떠러지.
지름길로 오다 보니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작지 않은 폭의 절벽이었다.
물론 미니맵으로 파악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폭은 더욱 넓었다.
“길을 아는 사람처럼 자신 있게 네 펫을 운전하더니, 결국은 막다른 길이군.”
“꽉 잡아, 손서연.”
“뭐?”
“캥수야, 넘을 수 있겠지?”
캐캥?
“캥수야, 그러지 마. 할 수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캥!
“그래, 넌 할 수 있다고.”
캥수 녀석. 괜히 쇼를 했던 거다.
이놈의 능력은 주인인 내가 잘 알고 있다.
다다다다!
캥수는 주저 없이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다다!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가속이 붙은 캥수의 다리는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야! 너희들 미쳤어?!”
손서연이 소리를 질렀다.
이 정도면 거의 비명에 가까운 음성.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무표정할 것만 같던 손서연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다.
나는 내 등에 업힌 손서연을 두 팔로 압박했다.
혹시라도 공중 도약 시에 자세가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날 테니까.
다다다다다.
타악!
캥수의 경쾌한 발 구르기가 이어졌다.
역시 한 치의 실수도 없는 것이 내 펫답다.
휘이이이잉!
캥수의 도약과 함께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등 뒤에서 나를 압박하는 손서연의 힘은 더욱 더 강해졌다.
이 녀석도 겁을 먹긴 하는 모양이다.
* * *
흑혈랑과의 거리는 이제 상당히 가까워졌다.
녀석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니까.
지금쯤이면 그 녀석도 우리의 접근을 눈치채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캥수의 등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흑혈랑이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설마 설마 했는데.”
“뭘?”
“정말로 흑혈랑을 발견해 버린 것. 이건 무슨 능력이지?”
“내 권능.”
“역시.”
그냥 던져 본 말인데, 뭐가 또 역시냐.
그 순간 현자의 상태창이 내게 흑혈랑에 대한 정보를 보내 왔다.
[경고: 흑혈랑은 입에서 극독을 뱉어 내니 주의하십시오.]
[정보: 만약 흑혈랑 사냥에 성공한다면, 배를 갈라 내단을 섭취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경고 알림이 떴을 정도면 절대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그냥 독이 아닌 극독.
단 한 번의 공격이라도 허용하면 곤란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캥수야, 아무래도 넌 전투에서 빠지는 것이 좋겠다.”
캥?
캥수는 웬만한 플레이어 1인 이상의 몫은 하고도 남지만, 독을 뿜어 내는 고레벨 몬스터가 상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흑혈랑이 풍기고 있는 마력으로 미루어 보건대, 캥수의 수준으로 흑혈랑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내는 것은 무리. 독에 중독이라도 된다면 곧바로 전력 외가 되어 버린다.
“시키는 대로 해.”
캥!
“이호영, 무슨 생각이지?”
“나는 이제 바로 흑혈랑 쪽으로 접근할 생각이야. 내가 놈의 움직임을 잡아 두는 동안, 너는 가까이 접근해서 조준 사격을 하도록 해. 저 녀석이 침이라도 뱉으면 무조건 피하고.”
“침?”
“저놈이 내는 으르렁 소리를 잘 들어 봐. 입 안에서 독 같은 것이 끓어오르는 거 같지 않아?”
“갑자기 실없는 소리를.”
“난 경고했다. 그럼 이제 선빵부터 날리고 시작해야겠지?”
이미 흑혈랑은 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황소만 한 몸집을 가진 늑대형 몬스터.
손서연은 녀석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안 그래도 준비 중이니까, 방어 태세나 갖춰.”
타아아앙!
손서연의 총구는 지체 없이 마력을 뿜었다.
역시 싸움은 선빵이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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