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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50화 (50/292)

50화

내가 클리어한 망자는 총 다섯.

같은 고아원 출신 친구 셋에, 대학교 동기 한 명, 회사 선배 한 명이었다.

어느 하나 떠나보내기 쉽지 않았으나, 여기서 시간을 끄는 것은 산 사람들의 생을 갉아 먹는 행위였기에 최대한 빠르게 끝냈다.

분명 나와 같은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동료들도 마찬가지일 터.

나의 뜻을 동료들에게 텔레파시로 보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가자, 캥수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분명 손서연은 나만큼 빠르게 미션을 끝냈을 테고, 이제 그녀와의 결판을 준비해야만 했다.

나는 미니맵을 켜고 이동할 동선을 체크했다.

손서연에게 향하는 길목에서는 채이설과 고용우를 거쳐 갈 수 있다.

마침 잘됐다.

그 둘은 이번 미션에서 가장 걱정이 되는 인물들이니까.

캥!

캥!

나는 캥수의 등에 올라타 9층의 평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넓은 무대에서 캥수의 효용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전투 보조뿐만 아니라 이동 수단이 될 수 있는 펫은 얼마 되지 않는다.

캥수는 사이즈와 스피드, 지구력 면에서 탈것으로 최상의 조건.

내 펫으로 캥수를 선택하길 잘했다.

그렇지 캥수야?

캥!

“그런데, 조금만 더 서둘러 줄래?”

캥!

내 능력치는 이 탑 전체의 플레이어 중 최상급이겠지만, 캥수만큼 빨리 달릴 수도 오래 달릴 수도 없다.

캥수의 능력은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게 해 준다.

미니맵 상에서 채이설과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캥수가 없었으면, 정말 단내가 풀풀 나도록 달릴 뻔했다.

* * *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 채이설의 뒷모습.

굳이 그녀의 표정을 보지 않더라도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위태위태해 보였다.

취이이익!

취이이익!

그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오크 전사.

결코 오크 한 마리 따위가 채이설의 상대는 될 수는 없다.

그녀 역시 다른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8층의 수련을 거치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으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은 채이설이었다.

덜덜.

검을 든 채이설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반격을 할 수 있는 찬스에서도 그녀는 주저하더니 결국 오크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아아악!”

오크 전사의 무지막지한 몽둥이가 채이설의 등허리를 강타했다.

곧바로 채이설은 치유 스킬을 사용하여 본인의 몸을 치유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게 없었다.

아마도 이런 양상은 내내 계속된 모양이니까.

현시점에서 오크가 공략하기 어려운 몬스터는 아니지만, 이런 식이라면 채이설도 위험해지게 된다.

오크의 옆에 서 있는 것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느 남성.

느껴지는 분위기론 남매는 절대 아니다.

아마도 옛, 혹은 현재의 연인이겠지.

“그만 끝내세요. 이설 씨.”

그제야 채이설은 내 존재를 인식했다.

내가 지척에 온 것도 모르고 있을 만큼 그녀의 멘탈은 무너진 상태였다.

“그럴 수 없어요!”

채이설이 힘겹게 목소리를 뱉어 냈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다.

“아뇨. 해야만 합니다.”

나는 의도적으로 냉정하면서도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괜히 지금 나까지 감정적이 되었다가는 채이설은 곧바로 무너져 버릴 테니까.

취이익!

취이이익!

이 순간에도 오크 녀석은 발광을 하며 채이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녀석이.

놈은 채이설이 반격하지 않는 걸 알고 더욱더 과감하게 공격해 왔다.

가랑비에도 옷은 젖는다.

예상은 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스으으윽!

내 불굴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오크의 한쪽 다리를 베어 냈다.

케에에에엑!!

즉시 오크가 괴로운 비명 소리를 뱉어 냈다.

“호영 씨!”

놀란 채이설이 소리쳤다.

이제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

“이설 씨에게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베세요. 이놈은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인 괴물이잖아요.”

결국 끝내야 하는 것은 채이설이다.

제삼자인 내가 그녀의 모든 망자들을 해결할 순 없다.

그래서도 안 되며 그럴 시간도 없다.

“……하지만!”

“이 오크를 죽이면 당신의 망자가 떠나 버리니까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편하게 갈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주세요.”

“…….”

“우리 동료들 중 누군가가 지체하여 단 한 명의 망자라도 남게 되면, 남은 여덟 플레이어들 모두가 죽습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럼, 즉시 하세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이곳 9층의 제한 시간은 6시간.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이렇게 지체되는 경우는 분명 생기고 만다.

이번 미션은 몬스터가 아닌 미련과의 싸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보내야만 하기에 지금까지의 어떤 미션보다도 잔인했다.

채이설이 긴 호흡을 내뱉었다.

이미 내게 다리가 잘려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오크는 온몸을 부들부들거리며 방망이로 자신의 몸뚱이를 방어하는 모습이었다.

취익!

“이설 씨가 해야 합니다.”

채이설은 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쑤우우욱!

채이설의 검이 오크의 머리통을 뚫어 버렸다.

깔끔하고 정확한 일격.

역시 할 때는 하는 여자다.

오크는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축 늘어졌다.

그 주변을 떠돌던 반투명한 망자의 형체는 점점 희미해졌다.

여전히 채이설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떠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만 보았다.

“이설 씨. ……잘했습니다.”

지금 그녀의 감정은 모태 솔로인 내가 완전하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 놓고는, 잘했다는 말만 해 주고 말았다

어쨌든 이제는 안심하고 내 목적지를 향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캥수야. 가자.”

캥!

그런데 캥수야, 너 뭐냐.

넌 왜 눈시울이 붉어진 건데?

설마 나도 못 해 본 걸 네가 해 본 거야?

캥!

* * *

손서연을 향하는 길목.

그곳에는 고용우도 있었다.

영리하고 야무진 성격이긴 하지만, 우리 중 유일한 미성년자였기에 이 녀석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작별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지만, 어린아이라면 더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을 터.

캥수를 재촉하여 서둘러 이곳에 도착했다.

헥헥거리는 모습을 보니 캥수에게 미안해진다.

“용우야.”

용우의 주변에는 동년배의 남자아이가 서성이고 있었다.

아마도 친구일 것이다.

이곳에 나타났을 정도면 꽤나 막역했을 사이.

“호영이 형!”

생각했던 것과 달리 고용우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녀석이 상대하고 있던 몬스터는 코볼트.

고용우는 여유 있게 코볼트의 공격을 피해 내며 나의 부름에 응답했다.

“혹시 첫 번째 망자인 거니?”

“아니요. 세 번째요.”

벌써?

어쩌면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 보다.

어린 나이지만 녀석은 내 생각보다 훨씬 잘해 내고 있었다.

“친한 친구니?”

“네. 중학교 때부터 함께했던 제 베스트.”

콰아악!

동시에 고용우는 망치로 코볼트의 뒷목을 가격했다.

코볼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쓰러졌다.

“너, 생각보다 냉정하구나?”

“이 친구가 제 입장이었어도 아마 똑같이 했을 거예요. 제가 망자더라도 제 친구가 이렇게 해 주길 바랐을 거고요.”

“그래도 코볼트를 완전히 죽이지는 않았는데?”

“6시간이나 주어졌잖아요. 저에게 주어진 시간을 꽉 채우면서 서서히 작별을 해 나갈 생각이에요.”

“그렇구나.”

“그리고 제 친구를 죽인 이 녀석을 쉽게 끝내선 안 되죠. 최대한 고통을 느끼도록 할 생각입니다. 아마 옆에서 보고 있는 제 친구도 흐뭇해할걸요?”

진짜 대단한 녀석이다.

어쩌면 이 탑의 진정한 유망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층을 클리어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기도 했고.

“그럼, 형은 이만 가 볼까? 네 작별에 방해될 거 같기도 하고.”

“네, 형은 벌써 다 끝내셨나 봐요? 몇 명의 망자나 보내 드린 건가요?”

“다섯.”

“역시 형은 대단하시네요.”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고용우의 모습을 보며 한시름 덜었다.

시간상 근처에 있는 김세용에게 들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냥 지나쳐도 좋을 것 같다.

은근히 여린 구석이 있는 녀석이지만, 분명 시간 내에 모두 클리어할 것이다.

세용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핵펀치를 날릴 수 있는 놈이니까.

* * *

손서연에게 향하기 전 다시 한번 미니맵을 점검했다.

다행히 아직 몬스터에게 당한 동료들은 없었다.

이곳 9층에 도전하는 플레이어치고, 이전 층의 몬스터에게 당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유일한 위험이라면, 본인의 멘탈이 붕괴되는 것.

일단은 잘들 해낼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캥!

나는 캥수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손서연은 9층 무대의 숨겨진 제단에 있었다.

그녀가 제단에서 어떤 결정을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나는 그곳을 손서연의 마지막 무대로 장식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공산이 크다.

[남은 시간: 1시간 26분 13초]

[현재 여섯 망자가 남아 있습니다.]

탑이 우리 모두에게 메시지를 보내 왔다.

일종의 독촉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정리하라는.

현시점에서 동료들은 대부분의 망자들을 보내 주었지만, 아직은 불안 요소가 존재했다.

어쩌면 망자들과 함께 죽음을 택하는 플레이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결국 우리 모두의 죽음이 될 것이다.

가장 안심이 되는 플레이어는 의외이지만 고용우.

김세용도 9층에선 만나보진 못했지만, 충분히 잘해 낼 것이다.

채이설 역시 큰 산을 넘으며, 다부진 모습을 보였으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다.

서준호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꾸역꾸역해 낼 것.

역시 가장 걱정이 되는 건 안세창과 송지은이다.

하필 이 두 사람은 5명으로 제한되어 있는 텔레파시 대상자로 등록해 두지 못하였다.

현시점에선 그냥 믿는 수밖에 없다.

캥! 캥!

결국 캥수의 희생에 힘입어, 난 제단이 있는 곳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상황.

손서연과 결전을 치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왔구나. 넌 역시 살성이 맞았어.”

“뭐야, 의심하고 있었던 거야?”

“의심이라기보다는,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 그동안 넌 너무 휴머니스트였으니까.”

휴머니스트라.

그동안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 9층을 통해서 나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다섯의 망자를 냉정하게 떠나보낸 내가 과연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손서연, 역시 넌 나보다 훨씬 빠르게 망자를 정리한 모양이군.”

“우리에게 9층의 메인 이벤트는 이곳이니까.”

손서연은 손가락으로 제단을 가리켰다.

참 대단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살성이 되어 감정이 무뎌졌다고는 하나, 분명히 이 녀석에게도 소중한 사람들은 있었을 텐데.

“10층에 대한 결정은 끝낸 거야?”

“넌?”

손서연이 내게 되물었다.

역시 날 계속 대살성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9층 미션이 시작되기 전, 그녀는 나의 결정을 참고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10층을 <피의 날>로 만들지 말지는 이 제단에서의 투표로 이루어지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살성들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10층이 피의 날로 결정된다면 여러 구역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피의 날> 미션이 진행된다.

“내가 먼저 물었어.”

물론 손서연의 대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대답이 나오든 내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 5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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