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켈베 말입니다. 혹시 치아 보험은 들어 놓았는지 모르겠네요. 방금 전에도 이빨 몇 개가 튄 거 같은데.”
퍼어어어억!
또다시 울려 퍼진 경쾌한 타격음.
오늘 캥수의 펀치는 제대로 물이 올라 있었다.
나랑 수련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캥수가 확실히 실전 체질이긴 한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엄일호는 말이 없었다.
그저 표정만 썩어들어 가고 있을 뿐.
“여기서 그만할까요?”
엄일호에게 제안했다.
이미 승부는 나 있었다.
켈베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타월을 던질 마음이 없어 보였다.
도저히 인정을 못 하는 것이다.
레벨만 놓고 보면 켈베가 도저히 질 스펙은 아니었으니까.
난폭하기만 했던 켈베의 눈빛은 어느새 순한 양이 되어 있었고,
녀석은 그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맥없는 돌진만 반복할 뿐이었다.
퍼어어어억!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같았다.
성난 이빨로 맹렬히 돌진을 해도 모자랄 판에, 켈베는 이미 분노 조절 장애가 말끔히 치료된 상태였다.
캥수도 조금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끊어 치는 펀치에 힘을 살짝씩 빼는 느낌이었다.
이 자식이 아직 주인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투기장에서 싸우고 있는 캥수를 향해 의지를 불어넣었다.
“다음 공격 땐 그냥 끝내 버려.”
옆에 있던 엄일호가 내 말에 살짝 몸서리를 쳤다.
켈베는 이제 한계 상태.
캥수가 단 한 번만 제대로 힘을 실어 주먹을 날린다면 뒷일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캥!
내 명령이 떨어지자 캥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켈베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녀석의 애처로운 눈빛은 주인의 항복 선언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옆을 바라보니 엄일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졌습니다.”
결국 엄일호가 힘겹게 말을 뱉어 냈다.
“잘 생각했어요.”
여기서 엄일호가 켈베를 잃는다면 사실상 모래시계 방의 미션도 무의미해진다.
새롭게 펫을 분양받는다 해도 이미 고레벨이 된 켈베를 대체할 수는 없을 테니까.
켈베의 상태를 보아하니 꽤나 트라우마가 생긴 거 같은데 이걸 해결하는 것도 조련사의 몫.
건투를 빌 뿐이었다.
쉽지 않아 보이지만 말이다.
* * *
[로비로 복귀합니다.]
조련사의 자격까지 갱신하며 8층의 여정을 모두 끝마쳤다.
가장 궁금한 건 각기 흩어져 미션을 수행했던 동료들의 생사 여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붕대맨의 말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탑은 일종의 생태계. 몬스터의 개체 수에 비해 플레이어가 너무 많다고 했으며 8층에서 많은 인원들이 정리될 것이라 했다.
검투사처럼 플레이어가 수가 넘쳐나는 직업에 속하는 동료들은 8층의 미션을 통과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다 돌아오진 못한 거군요.”
열셋의 인원은 여덟으로 줄어 있었다.
김세용, 채이설, 서준호, 손서연, 고용우, 안세창, 송지은, 그리고 나까지.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내가 예상했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세용과 서준호, 안세창은 자신들의 직업 내에서 상급의 포지션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채이설과 고용우는 희귀 직업이니 어느 정도 안심을 했다.
손서연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내 예상이 유일하게 벗어난 것은 송지은의 생존이었다.
그녀는 채찍을 사용하는 근거리 딜러. 하지만 공격력은 좀 아쉬운 수준이라 살아남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성공적으로 8층의 미션을 수행한 것이다.
“기운들 냅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돌아오지 못한 절반의 동료들. 하지만 언제까지 충격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 곧 시작될 9층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될 테니까.
“이호영 씨.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서준호였다.
물어볼 것이 무엇인지는 예상하고 있다.
당연히 살성에 대한 것.
회귀 이후, 나는 텔레파시로 서준호에게 살성 한강혁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정보를 주었다.
그로선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호영 씨의 텔레파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긴 했는데, 도대체 살성이 뭡니까?”
살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손서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타인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살성은 베일에 가려진 존재여야만 하니까.
“……살성은.”
나는 손서연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어 갔다.
“탑의 난이도를 조절하는 자입니다.”
보인다.
손서연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는 것이.
아마 머릿속에선 과부하가 걸렸을 것이다.
내 정체는 무엇이며, 내가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손서연 자신의 정체는 들킨 것인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일 것이다.
그래, 일단은 무엇이 되었든 생각해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실책을 일으킬 테니까.
“탑의 난이도를 조절하다니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내가 가진 정보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합된 정보는 나의 뇌피셜을 거쳐 새로운 정보로 가공되어 동료들에게 전달되었다.
비록 출처는 없으나, 진실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이 탑의 최종 관리자가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우리를 실험실의 생쥐처럼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탑의 어디에선가 말이죠. 그 녀석은 우리가 단번에 죽어 버리는 것도, 또 너무 쉽게 생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거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레벨업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차츰차츰 성장할 수 있도록 안배되어 있는 것이죠.”
내 말이 시작되자 동료들은 숨을 죽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일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무언으로 동의의 뜻을 내비쳤다.
“탑의 층수가 높아질수록 우리들은 성장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몬스터들의 레벨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말했다시피 우리 플레이어들이 적절한 생존율을 보일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다면 살성의 역할은 뭡니까? 이호영 씨는 아까 살성이 난이도를 조절하는 존재라고 하셨는데요.”
“살성은 일반 몬스터들이 할 수 없는 역할을 맡습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은밀한 살인자라고나 할까요? 서준호 씨가 경험한 한강혁처럼 말이죠.”
나는 손서연을 바라보며 은밀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파문이 느껴진다.
“이호영 씨! 그런데 당신은 이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얻은 건가요?”
“그건 비밀입니다. 정보의 출처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앞에 살성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중요할 뿐!”
내 단호한 말투에 누구도 더는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그저 저 구석에서 손서연만 홀로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저 갑자기 이호영 씨에게 좀 서운해지려고 하네요.”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던 채이설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뭐가 말입니까?”
“텔레파시 말이에요. 서준호 씨한테만 보낸 거잖아요. 저도 텔레파시 수신자로 등록해 놓으셨으면서.”
“그건, 제가 우연한 기회에 검투사들 사이에 살성이 끼어 있다는 정보를 얻어서! 사실 이설 씨에겐 특별히 드릴 정보도 없었어요.”
“그래도 서준호 씨의 말을 들어 보면, 이호영 씨가 끊임없이 텔레파시로 격려해 주셨다고 하던데요.”
채이설은 정말로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서준호만 특별 대우를 해 줬다고 믿고 있는 모양.
“호영이 형! 듣고 보니 나도 막 서운해지려고 그러네!”
이번에는 김세용이었다.
“넌 또 뭔데?”
“다들 타지에 나가 외롭게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데, 형이 격려 한마디만 해 줘도 다들 힘이 날 거 아니야!”
“뭐라는 거야.”
“다들 처음으로 형의 그림자를 벗어나서 미션을 수행한 거잖아. 나도 마찬가지고. 형 없이 뭔가를 해 보는 게 처음이라 힘들어 뒈지는 줄 알았다고.”
미친놈. 분명 김세용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데,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이상하게 난감해졌다.
마치 내가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결국 분위기를 봉합한 것은 서준호였지만.
“이호영 씨는 앞으로 저만 편애하지 않는 것으로! 이럼 된 거죠?”
* * *
모두가 잠든 시간.
오직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손서연뿐이었다.
그걸 인식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손서연은 오늘 일로 생각이 많을 것이고,
나는 앞으로 다가올 9층이 걱정이었다.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이럴 땐 독이다.
결국 손서연은 몸을 일으키더니 누워 있던 내게 다가와 발로 툭 건드렸다.
“왜?”
“잠깐 얘기 좀 하지?”
생각보다 나를 빨리 찾아왔다.
하룻밤 정도는 더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
우리는 결국 로비의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손서연은 제 손만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기만 할 뿐,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역시, 아직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 분명했다.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 그게!”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네가 아까 전에 이야기한 살성! 그것에 대해 더 알고 싶다.”
갑자기 손서연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말을 내뱉었다.
“아, 살성? 난 또 뭐라고.”
좀 우습기도 했다.
손서연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생각해 낸 대화의 물꼬가 결국 이런 것이라니.
“말해.”
“왜지?”
“왜냐니? 그건 우리의 생존에 중요한 문제이니까…….”
“손서연, 넌 지금 솔직하지가 않아. 내게 무언가를 듣고 싶었다면 얘기를 그렇게 시작하면 안 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냐.”
“다들 자고 있어. 고해성사할 일이 있으면 오늘이 기회야.”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우리 동료들을 가리켰다.
그들의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보호 결계. 그것은 그들이 숙면을 취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잠에서 깨는 순간 그 결계도 함께 사라져 버릴 테니까.
“갑자기 고해성사라니. 미친놈.”
손서연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 가는 침 소리도 느껴진다.
결정타를 먹이기에는 지금이 적기다.
“살성 손서연.”
“뭐?”
손서연의 표정이 오랜만에 역동적으로 변했다.
곧바로 태연한 척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재밌다.
“살성에 대해 알고 싶다면서?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해 준 건데, 혹시 허위 정보인가?”
내 질문에 손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황상 그녀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질문 자체가 외통수. 그 어떤 대답을 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알고 있었냐고?”
“……그래. 어떻게 알고 있었지?”
결국엔 그녀도 시인을 했다.
여기서 발뺌해 봐야 의미 없다는 것을 그녀도 느낀 것이다.
“어떻게 알았냐면은…….”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넣어 주섬주섬 무언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물론 계획된 연기였다.
손서연이 고민했던 것만큼 나도 충분히 고민을 했다.
이 요망한 손서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벤토리에 들어갔던 손은 나올 때엔 총을 쥐고 있었다.
“나도 살성이니까.”
나는 손서연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믿고 안 믿고는 그녀의 몫.
이제 나의 메소드 연기가 펼쳐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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