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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45화 (45/292)

45화

대기실의 공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서른다섯의 검투사들이 바글바글 채웠던 대기실은 어느새 휑하게 변해 버렸다.

검투사의 자격 갱신 두 번째 미션이 끝나고 남은 인원은 이제 일곱.

사망률은 무려 팔 할이 넘어갔다.

아마 다른 곳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탑에 들어온 이후 역대급의 가혹함이 느껴졌다.

“이호영 씨!”

서준호가 나를 보며 반갑게 외쳤다.

다행히 그는 살아 있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뭉클한 전우애였다.

“역시 해냈군요. 서준호 씨.”

“이호영 씨가 가끔씩 보내 주는 텔레파시를 듣고 기운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저보다 더 가혹한 조건 아니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했죠?”

“당신은 예전 도서관 미션에서 무공서 대신 소설책을 선택한 적이 있으니까요. 참고할 무공서가 없었기에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번엔 힘들지 않을까 싶었어요.”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역시 그것이었다.

하긴 플레이어들이 참고할 무공서가 없었더라면 두 번째 미션을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 짧은 시간에 無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천재들만의 영역이니까.

“사실은…….”

나는 서준호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두 번째 미션에서 내가 받았던 특혜와 기막혔던 기연. 서준호는 그 이야기를 듣고 혀를 내둘렀다.

“뭐, 운이 좋았죠.”

“검술 스킬의 제약에서 벗어나다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부럽군요.”

“서준호 씨도 미션을 통과했으니 상당히 발전한 거 아닙니까?”

서준호의 정보를 보니 확실히 성장해 있었다.

그의 검술 스킬 레벨이 1이 올랐다.

순전히 수련만으로 스킬의 레벨을 향상시킨 것은 대단한 일이다.

- 살아남은 검투사 여러분들!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다시 홀로그램을 통해 등장한 붕대맨.

녀석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이제야 대기실이 쾌적해진 거 같군요. 사실 그동안 이 탑엔 검투사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것도 자격 미달인 검투사들 말입니다. 다들 제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까?

붕대맨의 질문에 다들 숙연해졌다.

생존의 기쁨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다른 플레이어들의 사망을 상기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기분 나쁜 말투와 음성으로.

- 이제 여러분들은 검투사의 자격 갱신까지 딱 한 단계만을 남겨 두고 있어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세 번째 미션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개인 면담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

“개인 면담이요? 누구랑 말입니까?”

- 누구겠습니까? 여기 여러분들을 케어해 줄 사람이 저밖에 더 있어요?

서준호의 질문에 붕대맨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케어라니. 저 붕대맨 자식이 케어의 뜻은 알고 사용하는 건가?

- 이제부터 여러분들을 한 명 한 명씩 제가 있는 곳으로 소환할 예정입니다. 기대되죠? 이렇게 홀로그램으로만 보던 저를 정말로 만나게 되다니.

* * *

내 면담 순서는 마지막이었다.

본래 기다리는 것은 질색이나, 왠지 그리 오래 기다릴 것 같지는 않았다.

붕대맨과 면담을 하러 소환된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금세 복귀해 버렸으니까.

내 순서 직전에 들어갔던 서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파이팅.”

“네?”

“붕대맨이 저보고 파이팅이라고 하던데요?”

“그게 끝입니까?”

“네.”

서준호가 굳이 면담 내용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언가 숨기기에는 면담 시간 자체가 너무 짧았다.

여타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름없이 말이다.

서준호와 더 이야기해 볼 것도 없이 나는 곧바로 소환되었다.

어두컴컴한 다섯 평 남짓의 공간.

그곳에 붕대맨이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신기한 건 이 붕대맨은 탑의 중간 관리자임에도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홀로그램으로 보는 것과 비교해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 이호영 씨. 이 면담 말입니다. 왜 하고 있는 줄 알아요?

앞뒤 싹 자르고 붕대맨은 뜬금없는 질문을 걸어왔다.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앞서 면담을 끝낸 플레이어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별 얘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 이호영 씨?

“네.”

- 파이팅!

미친놈. 서준호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작 이 한마디 하려고 사람 귀찮게.

“네. 파이팅. 그럼 이제 끝난 겁니까?”

- 아니요. 이호영 씨랑은 특별히 할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사실 이 면담을 급조한 것도 당신 때문이니까.

“……저 때문에요?”

- 네. 당신이 이 탑의 시스템에 너무 큰 변수를 만들어 버렸거든요. 살성 한강혁을 죽인 것 말입니다. 살성이 기본 능력치만 놓고 보면 초반에 절대 죽을 수가 없도록 세팅이 되어 있는데, 결국 죽어 버렸네요?

“그게 혹시 문제가 되는 겁니까?”

-당연히 문제가 되죠. 이 탑은 일종의 거대 생태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살성은 탑 생태계의 균형을 조절해 줄 존재이고요. 제 말이 좀 어렵습니까?

“네. 많이 어렵군요.”

어쨌든 탑의 입장에선 내가 사고를 친 거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럼 좀 더 쉽게 예를 들어 보죠. 8층에서 모든 플레이어들이 자격 갱신을 하고, 그 과정에서 대량으로 죽어 나간 것. 그것도 다 탑 생태계의 균형을 위한 겁니다. 이 탑의 몬스터에 비해 플레이어들의 수가 너무 많았으니까.

정말 미친놈들이다.

인간들을 이 탑에 제멋대로 밀어 넣어 놓고선 생태계의 균형에 맞지 않아 죽인 것이라니.

“……그럼 탑 생태계에서 살성의 역할은 도대체 뭡니까?”

이 면담은 뭔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궁금한 걸 물어볼 좋은 기회이긴 했다.

- 탑 난이도의 미세 조정 장치 같은 것이라 표현하면 좋겠군요. 그런데 당신이 탑의 주요 부속품을 너무 초반부에 없애 버렸단 말입니다.

“그럼 혹시 그것 때문에 제게 불이익이 생기는 것입니까?”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예정에 없던 면담까지 급조할 정도라면, 살성의 죽음이 크긴 큰가 보다.

그놈의 살성이 대체 뭐길래.

- 불이익은 없습니다.

다행이다.

하긴 불이익의 위험성이 있었더라면 현자의 상태창이 미리 경고를 주었을 것이다.

- 다만, 당신에게 제안할 것이 하나 있어요.

나는 묵묵히 붕대맨의 말을 들었다.

불이익이 없다고는 했지만, 아직 긴장을 놓기에는 일렀다.

지금 붕대맨의 말투는 사뭇 진지하기만 하니까.

- 살성 어떻습니까?

“네?”

- 당신이 한강혁을 죽여 버리는 바람에 공석이 생겨 버렸잖아요. 난 당신에게 그걸 제안하는 겁니다.

“아니, 지금 나더러 그 살인마의 역할을 대…….”

하지만 말을 맺기도 전에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회귀.

나는 검투사의 모든 미션을 통과하고 나면 회귀가 예정되어 있다.

8층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

물론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회귀를 하더라도 살성의 특성과 족쇄는 여전히 남아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 혹시 내 제안을 거부하려는 건가요? 그거 당신에겐 별로 좋지 않을 거 같은데 말입니다?

지금 붕대맨의 말투는 제안이 아닌 협박에 더욱 가까웠다.

그때 현자의 상태창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정보: 당신의 회귀 시점 이후에 죽은 모든 사람은 다시 살아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이런 메시지가 괜히 내게 전해졌을 리는 없다.

현자의 상태창은 내게 주요 쟁점을 환기시켜 준 것이다.

살성, 그리고 한강혁의 죽음.

곧바로 한 가지 결론이 만들어졌다.

‘내가 회귀한 세상에 살성 한강혁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 정말인가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부하려는 것으로 보였는데.

“관리자님께서 절 특별히 생각하여 이런 고급 정보까지 주시며 제안을 하신 건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죠.”

이것은 살성에 대한 내 호기심을 풀어 볼 좋은 기회이자 기연이었다.

- 좋습니다. 마음 바뀌기 전에 바로 시작을 해야겠군요. 흐흐흐.

붕대맨의 말이 끝나자 내 귀에는 곧바로 알림음이 울렸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네.”

절차는 아주 간단했다.

그나저나 내가 살성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알림음은 정신없이 이어졌다.

[살성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직업에 어울리는 적절한 고급 스킬을 부여하겠습니다.]

[당신의 직업은 검투사입니다.]

[당신의 검술 스킬에 ‘오러 블레이드’를 덧씌웁니다.]

내 검술 스킬?

그거 사부님이 떼어 버렸는데.

[검술 스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켜 ‘오러 블레이드’를 덧씌울 수 없습니다.]

검투사인 내게 검술 스킬이 없는 것은 오류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대안으로 당신에게 총과 저격 스킬을 지급합니다.]

순간 내 인벤토리에 묵직한 것이 생성되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총일 것이다.

진짜 미쳤다.

[지금부터는 능력치를 조정하겠습니다.]

[마력이 상승하였습니다.]

[체력이 상승하였습니다.]

[근력이 상승하였습니다.]

[민첩이 상승하였습니다.]

그렇게 나는 살성이 되었다.

아주 잠시 동안의 역할이겠지만.

* * *

세 가지의 변화가 있었다.

총이라는 아이템이 생겼고,

스탯 상승을 비롯한 살성 특유의 능력을 갖게 되었으며,

<피의 날>에 대한 정보창을 얻게 되었다.

내가 회귀를 하게 된다면 이 세 가지 모두가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억은 남는다.

그리고 이 기억은 향후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 자! 여러분들! 이제 면담이 모두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세 번째 미션을 시작해야겠죠?

나는 서준호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조금 묘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서준호는 내가 회귀를 하게 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회귀한 세상의 서준호와 동일인으로 보아야 하는 건지.

이런 종류의 모순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니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니요. 마지막 단계까지 잘해 봅시다.”

“물론이죠. 이호영 씨.”

나는 서준호를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세 번째 미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하다면 내가 이번 미션을 하드 캐리 하고 싶었다.

붕대맨은 이 탑엔 여전히 너무 많은 검투사가 있다고 말했으니까.

분명 마지막 미션도 쉽진 않을 것이다.

[미션 수행을 위해 장소를 이동하겠습니다.]

순간 암전이 찾아왔고, 나를 포함한 대기실의 일곱 검투사는 어디론가 빨려들어 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가 마주한 곳은 거대한 원형 경기장.

“뭐야, 이게!”

“미친! 이거 콜로세움 아닌가?”

관중석에서는 거대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환영인지, 아니면 실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만이 운집한 이 거대 경기장엔 광기 어린 울부짖음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검투사의 자격 갱신 마지막 단계입니다.]

[철사자를 섬멸하십시오.]

[살아남은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검투사의 역할을 이어 갈 수 있습니다.]

“철사자?”

콘셉트 하나는 확실했다.

검투사인 우리는 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게 될 철사자라는 몬스터를 잡아내야만 한다.

관중석의 분위기가 점점 더 고조되고 있는 것이 조만간 철사자들이 이곳에 들어올 예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고대 로마의 검투사가 된 기분이다.

관중들의 환호하는 모습에는 순간 역겨움이 밀려왔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이호영 씨! 그거 뭡니까?”

서준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그저 총구를 관중석을 향해 겨누었다.

저격의 스킬이 발휘되며 허공에는 과녁이 생성되었다.

타아앙!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자, 잠시 후 관중 한 명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타아아앙!

그리고 방향을 바꿔서 두 명째.

모든 관중이 입을 닥치게 하기엔 좀 더 많은 탄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상관없다.

살성이 되고 나니 마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한참은 더 쏠 수 있다.

타아아앙!

타아아앙!

“좀 닥치라고!”

타아아앙!

관중석 곳곳에선 사람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고 있었다.

- 4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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