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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44화 (44/292)

44화

퇴보했다고 생각했는데 퇴보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도 모르는 새에 유의미한 발전이 있었다.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네 녀석도 아직은 갈 길이 먼 모양이구나.”

사부는 대결에서 이긴 나에게 칭찬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뿌듯해할 것이다.

사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도 저, 강해졌습니다.”

“여전히 쓰레기일 뿐이다. 아직 무영추혼검의 묘리를 일각도 이해하지 못했으니.”

이해했다고 생각했을 땐,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깨달았는데 이젠 반대의 기분이 들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줄 알았는데, 이젠 뭔가 알 것도 같았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방금 전의 서른네 합뿐인 대결로 뭔가 깨달은 느낌이었다.

사부가 적절한 시기에 나에게 대결을 안배해 준 것이다.

“사부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아쉬울 뿐입니다.”

이건 사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이 결코 아니었다.

“남은 시간 죽을힘을 다하여 익히도록 해라.”

“……혹시 훗날, 제가 사부님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자유롭게 이곳에 올 수 있는 것입니까?”

무림에 살던 사부는 검의 극의를 깨우치고 등선을 하여 이 탑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무림과 탑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고도.

이 대목이 내가 기대하는 부분이었다.

만약 내가 사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면 사부처럼 탑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물론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나와 같은 경지? 꿈도 크구나.”

“사부는 천마이자 고금제일의 기재이니까요?”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이 탑의 게임 시스템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세상이다.

현재의 내 모습만 보아도 그렇다.

한낱 평범한 회사원이던 내가 지금의 경지에 오른 것부터가 기적 같은 일.

기적에 기적이 몇 번 더 더해진다면 사부와 같은 경지에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도 싶었다.

사부의 말대로라면 난 천마신교의 어떤 제자들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래서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무엇입니까?”

“그것 또한 말해 줄 수 없구나. 항상 그랬듯이 이 또한 탑과의 맹약 때문이다. 하지만 너에게 한 가지 분명하게 일러둘 것이 있다.”

“말씀해 주십시오.”

“무영추혼검의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면, 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내공이 필요하다. 이 탑에서는 마력이라고도 부르더구나. 그런데 네가 이 탑에서 그만큼의 마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본좌는 신교의 내공심법으로 대해 같은 내공을 축적하였으나, 너는 그럴 수가 없는 처지이니 아쉬울 뿐이구나.”

예전에도 사부는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 검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제약이 걸려 있어 아쉽다고.

만약 내가 내공심법을 익힌 무림인들처럼 중후한 마력을 가졌더라면, 무영추혼검을 익히는 일이 한층 수월해질 것이라고도 하였다.

“결국 저의 자질과 노력 외에도 마력이라는 변수가 있는 것이군요.”

“그런 셈이지. 이 탑에서 네가 마력을 늘릴 수 있는 방도는 레벨업과 탑의 보상뿐이라고 들었다. 수련을 통해선 늘릴 수 없는 점이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무림인인 사부의 입에서 레벨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게 좀 우습긴 했지만, 사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탑은 레벨업을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마력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마력을 보조해 주는 아이템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마력의 양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주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사실 나 같은 경우 그동안 마력의 중요성을 크게 실감한 일도 없었다.

초급 검술을 구사하는 검투사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마력의 소모량이 적은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무영추혼검은 스킬은 아니지만, 분명 상당량의 마력을 소모시키고 있다.

또한 사부의 말에 따르면 더 높은 수준의 무영추혼검을 구사할수록 마력의 소모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그럼에도 저에게 무영추혼검을 전수해 주셨다는 건, 그래도 이 탑에서 무언가 기대해 볼 만한 게 있단 의미 아닙니까?”

“그저 행운과 운명에 기댈 뿐이다.”

사부는 여전히 애매한 표현으로 확답을 피했다.

행운과 운명이라.

운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이란 단어는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이 탑에서 나보다 운이 좋은 플레이어는 없을 테니까.

“가르쳐 주지 않으시니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 행운과 운명.”

* * *

나는 도플갱어를 서른네 합 만에 제압한 그 날 이후 안정적인 성장세에 접어들게 되었다.

사부가 말하는 무영추혼검의 진정한 묘리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꾸준히 향상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나의 검술 수준을 굳이 계량화해 본다면 이제 초급 검술의 레벨 5에서 6 사이의 단계엔 진입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도의 성장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 여전히 전 쓰레기니까.”

두 번째 미션의 클리어 조건이 어느 정도의 검술 향상을 요구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 나 정도면 넉넉할 것이다.

단순히 수련만으로 스킬 레벨을 한 단계 이상 올리는 건 엄청난 성장.

하지만 사부는 단 한 순간도 내게 자만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다른 검투사들의 수련 성과도 문득 궁금해졌다.

나와는 달리 그들은 이 무(無)의 공간에서 혼자 수련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한계의 벽에 막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 혼자서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구역 출신 검투사인 서준호는 어떤 처지에 있을까.

- 서준호 씨…….

그냥 가끔씩 서준호에게 텔레파시 스킬로 나의 근황을 전했다.

일방향 통신 스킬이었기에 응답을 들을 순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참으로 괴상한 스킬이구나.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에게 음성을 보내는 것은 나조차도 불가능한 일이거늘.”

등선을 한 사부조차 할 수 없는 걸 지금 내가 하고 있었다.

이 탑의 신비함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하긴, 사부는 이 탑에 오고 나서야 본인의 경지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니까.

“그나저나 사부님. 이제 이곳에 머물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우리 둘은 잠시 말없이 모래시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몇 줌 되지 않는 모래들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저 정도의 양이면 물리적인 시간으로 한 시간 정도 남았을 것이다.

아쉽다.

이렇게 사부와 헤어지는 것이.

사실 이 탑에 온 이후 난 누군가에게 의지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반대의 입장이었다.

모두가 나의 말을 따랐고, 내게 조언을 받기를 바랐다.

사부는 내가 이 탑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가끔 자기 자랑이 과할 땐 듣고 있기가 괴로웠지만, 대부분의 시간 사부와 있을 땐 마음의 안식을 느꼈다.

마치 내가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대련을 해보겠느냐?”

“떠나는 이 마당에요?”

내가 도플갱어를 쉽게 제압한 이후로는 가끔씩 사부가 나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곤 했다.

사실 대련이라기보다는 사부의 참교육 시전에 가까웠다.

사부와 검을 섞고 나면 항상 나는 내 검술 수준이 쓰레기였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 하겠다는 것이냐?”

“합니다. 해요.”

마지막 순간을 사부와 검을 섞으며 보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일 테니까.

“항상 그랬듯이 눈과 귀의 기능을 정지시키마.”

사실 이것은 사부에게 아무런 핸디캡이 되지 못한다.

기의 흐름을 읽는 사부는 눈을 감고도 무엇이든 볼 수 있고, 귀를 막고도 움직임을 들을 수 있다.

자신이 선심을 쓰고 있다는 일종의 쇼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사부가 참 너무했다.

내 검이 사부의 옷깃이라도 스칠 확률은 개미가 호랑이를 물어 죽이는 것보다도 일어나기 힘든 일인데.

“오늘은 그 정도 제약으론 안 됩니다.”

“더 원하는 것이 있거든 이야기해 보거라.”

“마력을 저의 수준으로 맞춰 주십시오.”

“무슨 뜻이냐?”

“사부님은 본인의 마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딱 저만큼의 마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잠시 봉인해 주십시오.”

“어차피 널 상대할 땐 내 내공의 티끌만 사용할 뿐이다.”

“티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티끌이 되어 절 상대해 달란 말씀입니다.”

“결국, 나더러 잠시 쓰레기가 되어 달라는 것이구나.”

“천하의 천마가 마력 잠깐 봉인 당했다고 쓰레기가 될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부탁이었으나 차마 하지 않았다.

자부심 강한 사부가 들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냐, 동급 내공으로 제대로 참교육 한번 시켜 주마.”

결국 사부는 떠나는 마당에 제자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사부는 심호흡을 하며 본인의 내공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사부가 은은하게 풍기는 위압감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사부의 대해와도 같은 내공의 양은 정말로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제 되었느냐?”

어느새 사부는 볼품없는 노인네가 되어 있었다.

나의 절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이제 사부는 정말로 나와 똑같은 마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런 걸 가능하게 하는 사부의 능력이 정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시각과 청각도 여전히 봉인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사부는 나를 향해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저 나뭇가지에는 더 이상 높은 공력을 실을 수 없으니 내 불굴의 검과 부딪힌다면 그대로 부러질 것이다.

사부도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내공을 감추는 것과 완전하게 봉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

사부는 정말로 티끌 그 자체가 되어 나를 상대하는 것이다.

“오너라.”

“네. 사부님.”

* * *

[검투사의 자격갱신 두 번째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은 미션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사부와의 대결을 마치고 잠시 뒤 탑의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미션 클리어는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호영아.”

“네. 사부님.”

“네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천마의 제자라는 것. 그리고 또한 신교의 제자로서 무영추혼검을 익혔다는 것.”

“오냐.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느냐?”

“네. 제가 모신 사부님은 천하의 기재이자 무림의 고금제일인이었다는 것.”

“그래. 훌륭하구나.”

사부와의 만남은 기막힌 기연이었다.

나에게 이런 기연을 선사해 준 붕대맨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검술 스킬을 떼어 내고 무영추혼검을 익히며 게임 시스템의 한계 이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사부와의 마지막 대련은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사부는 제한된 마력을 가지고도 무영추혼검이 가진 가능성을 내게 보여 주었다.

사부는 티끌이 된 이후에도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강자였다.

예상했던 바였고, 그 예상이 빗나가지 않아 다행이다.

이제는 사부가 내게 제시해 준 청사진을 따라가면 될 뿐이다.

- 4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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