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뭐야! 내가 잘못 셌나?”
“아니야. 서른다섯 명! 내가 세 봐도 똑같아!”
대기실에선 플레이어 몇 명이 수 세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숫자가 맞지 않았다.
붕대맨이 예고한 대로라면 최소 네 명은 이곳으로 귀환할 수 없어야 하니까.
“혹시 그 망할 붕대맨 놈이 괜히 겁준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 파티는 붕대맨 말만 믿고 서둘렀는데!”
사람들은 아우성이었다.
파티는 아홉, 자감 매머드는 여덟 마리라는 붕대맨의 말에 다들 피똥 싸게 경쟁했는데, 막상 돌아온 플레이어는 서른다섯이었다.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한 이미호에 대해선 걱정 한마디를 하지 않는다.
“젠장, 괜히 서둘렀어!”
“이럴 줄 알았으면 졸개 몬스터도 여유 있게 사냥하면서 레벨업이나 할걸!”
사람은 참 간사한 존재다.
분명 미션이 시작되기 전만 하더라도, 생명을 걸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아우성이었는데.
- 억울해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
갑자기 허공에서는 붕대맨이 나타났다.
물론 홀로그램 영상을 통해서.
- 그리고 경고 하나 하죠. 저를 한 번만 더 붕대맨이라고 불렀다가는 재미없을 겁니다!
붕대맨은 모습만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다 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하다.
여기엔 CCTV도 달려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 파티 하나 이상은 생존할 수 없을 거라 하지 않았나요?”
- 김태경 플레이어! 그래서 불만인 겁니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이?
“그…… 그런 건 아니지만!”
- 히든 피스를 발견한 파티가 있었습니다.
“히든 피스요?”
- 구석에 꽁꽁 감춰 놓았는데, 제한 시간 내에 그걸 발견하다니! 기대 이상입니다?
[관리자의 재량으로 추가 보상 1000골드가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붕대맨은 나를 바라보았다.
관리자 재량이라……
역시 저 붕대맨 녀석에게 잘 보여 놓길 잘했다.
나는 붕대맨을 향해 씨익 웃어 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주었다.
호감을 좀 더 심어 놓을 필요가 있다.
잠시 후 나는 탑의 총애를 받는 살성 한 명을 죽일 생각이니까.
- 그런데 말입니다!
저 붕대맨 녀석이 갑자기 그알 버전으로 무게를 잡는다.
- 너무 많은 플레이어가 살아남았어요. 이건 제 계획에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히든 피스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분명 플레이어들 사이에 몇몇 건의 PK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자감 매머드를 사냥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으니까.
- 참 곤란한 일이에요. 이 탑에 검투사들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지금 제안 하나를 하겠습니다.
“또 무슨 끔찍한 짓을 하려는 겁니까?”
- 무슨 끔찍한 짓이냐고요? 마침 잘됐네요. 안 그래도 핑곗거리가 필요했는데. 흐흐흐.
피융!
붕대맨의 말은 잠시 멈추었고, 홀로그램에서는 갑자기 광선 한 줄기가 발사되었다.
“어어억!”
경악스러운 일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졌다.
팔에 광선을 맞은 플레이어는 그대로 한쪽 팔을 잃고 말았다.
죄목은 감히 반문을 한 것.
갑자기 조성된 공포 분위기에 그 누구도 찍 소리도 낼 수 없었다.
- 사실, 아까 나를 붕대맨이라고 부른 게 내내 신경이 쓰였거든요. 제가 뒤끝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흐흐흐.
지금 이 순간 몇몇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붕대맨 언급만 해도 서넛은 되니까.
- 중간에 말이 끊어졌는데, 다시 제안 하나 하죠.
다행히 추가 보복은 없었다.
여전히 붕대맨 언급을 한 녀석들은 덜덜 떨고 있겠지만.
- 두 번째 미션에서 PK 하실 분 예약을 받습니다. 예약 후 PK 성공 시 특별 보상이 있어요. 단, 지금 예약하지 않고 PK를 하게 되면 아무리 많이 죽여도 얄짤 없어요.
미친놈.
진짜 미친놈이다.
“혹시 두 번째 미션 내용이 뭔지 미리 공개해 줍니까?”
누군가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꽤나 용기를 낸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붕대맨 언급을 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 공개 안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미션의 내용에 따라 PK를 예약할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요? 그런 기회주의적인 마인드!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건데 말입니다.
붕대맨의 대답에 분위기는 더욱 싸늘해졌다.
다들 눈치만 볼 뿐, 아직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저요.”
결국 스타트를 끊은 것은 바로 나.
사실 붕대맨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난 한강혁을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특별 보상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오호. 이호영 플레이어! 그런 자세 마음에 듭니다. 계속 내 맘에 드는 짓만 골라서 하는군요! 흐흐흐.
그 마음이 내가 살성을 죽인 이후에도 변함없어야 할 텐데.
다들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나를 쓰레기로 여길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회귀를 하는 순간 이곳의 세계는 리셋 될 테고, 나는 이 현장에 없었던 사람이 될 테니까.
- 이호영 플레이어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겁니까?
“저요!”
역시.
한강혁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 * *
드디어 시작된 두 번째 미션.
내 몸이 대기실을 빠져나간 순간, 세상엔 암전이 찾아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특별 미션이 시작됩니다.]
[누구를 죽이시겠습니까? 당신이 택한 플레이어는 즉시 이곳에 소환됩니다.]
뭐?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붕대맨이 우리들의 뒤통수를 친 것.
그 녀석은 미션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PK 예약을 받았던 것이다.
나와 한강혁이 신청을 한 뒤 두 명이 더 손을 들었으니, 최대 네 명이 죽은 채로 두 번째 미션이 시작된다.
“한강혁.”
나는 한강혁의 이름을 외쳤다.
내가 한강혁을 먼저 죽여 버린다면, PK에 의한 희생은 한 명 줄어들 것이다.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
이미 내 앞에는 한강혁이 서 있었다.
“오호! 이호영 씨도 나를 선택했단 말이죠? 재밌는데요?”
“동감이야.”
“그런데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내가 더 강하다는 걸.”
“그래, 알고 있어.”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현자의 상태창으로 서로의 전력을 비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대일의 대결일 때의 이야기.
[펫을 소환합니다.]
내 계산대로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내겐 든든한 아군이 있으니까.
그렇지, 캥수야?
캥!
캥수가 내 등 뒤에서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섀도 복싱을 하면서.
“이건 또 뭡니까? 펫을 소환하다니요?”
“살성이랑 싸우려면 이 정도 세팅은 해 줘야지.”
휙! 휙!
캥수는 계속 섀도 복싱을 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캥수의 앞발에 끼워진 붉은색 글러브는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캥수 전용 아이템으로 공격력을 무려 10퍼센트나 증가시켜 주는 상급 아이템.
“설마, 둘이 싸우면 나를 이길 거라 생각한 겁니까?”
한강혁이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나와 캥수를 번갈아 보았다.
이놈이 나와 캥수를 묶어서 무시하는 모양이다.
캥수야, 아무래도 본때를 보여 줘야 할 것 같다.
* * *
오러 블레이드.
한강혁의 스킬은 확실히 살벌했다.
내 불굴의 검이 유니크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한강혁의 검에 계속해서 밀렸다.
녀석이 펼쳐 내는 검격은 예리함을 넘어서 지극히 폭력적이었다.
콰아앙!
검과 검이 부딪히자 팔 전체가 저려 왔다.
몇 번이나 손에 쥔 불굴의 검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마냥 피할 순 없었다.
한강혁의 오러 블레이드를 파훼하기 위해선 직접 검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으니까.
캥!
그래도 캥수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되었다.
캥수의 주먹질에 시선을 빼앗긴 한강혁은 내게 연타를 넣을 수 없었다.
방금 전에도, 한강혁이 나를 계속 몰아붙였다면 난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이 캥거루 자식, 생각보다 성가신데요?”
한강혁은 숨을 고르면서도 여유를 내비쳤다.
“성가신 정도가 아닐 텐데?”
캥수의 움직임은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들.
내 조련술의 숙련도가 아직은 미숙했지만, 캥수는 일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내 눈에는 한강혁의 바닥이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파괴적이긴 하나 마력의 소모가 상당히 컸다.
놈도 지금처럼 계속 스킬을 난무하지는 못할 터.
“아니요. 그냥 딱 그 정돕니다.”
이렇게 떠는 허세가 바로 그 증거였다.
놈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휘이이익!
내 검과 캥수의 주먹이 합공을 펼쳐 냈다.
펫과 나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관계이기에 우리의 합격술은 단순히 일 더하기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맹렬한 공격에 한강혁은 다시 한번 검에 마력을 실어 오러 블레이드를 펼쳐 냈다.
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너무 깊숙이 공격에 들어갔다고 판단했으니까.
한강혁이 상상한 다음의 장면은 나와 캥수의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도 비장의 한 수는 있다.
<광역 방패가 펼쳐집니다.>
<2시간의 쿨 타임이 지난 후에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히든 피스를 클리어하며 받은 보상을 개시하는 순간이었다.
쿨 타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일회성 스킬이지만,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나와 캥수는 한강혁의 공격을 뚫어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퍼어어어억!
캥수의 주먹은 죽빵을,
스으으으윽!
내 불굴의 검은 한강혁의 옆구리를 베었다.
“허어업!”
한강혁이 처음으로 신음성을 내뱉었다.
뭐든지 가장 어려운 것은 처음.
그 이후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허어어어억!”
역시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다른 변수가 없다면 현자의 상태창이 보여 주는 숫자들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 *
살성을 죽이고자 마음먹었을 때 우려했던 바가 있었다.
혹시 이 탑이 나에게 페널티를 부과하지는 않을까 하는.
어찌 되었든 살성은 이 탑의 총애를 받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우려는 어느 정도 타당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었다.
[살성을 살해하였습니다.]
[탑의 시스템이 일부 변경됩니다.]
어?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의문을 풀어 줄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났다.
홀로그램 속의 모습으로.
- 설마설마했는데, 당신이 이길 줄이야!
“혹시 무슨 문제 있습니까?”
- 글쎄요, 문제라면 문제일 수도 있겠죠. 흐흐흐.
붕대맨이 흥미로운 웃음을 흘렸다.
다행인 것은 나에 대한 호감도가 여전해 보인다는 것.
“탑의 시스템이 변경되었다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만.”
- 네. 당신이 살성 한 명을 살해함으로써 탑 전체의 난이도가 패치되었어요. 물론 더 어려운 쪽으로요.
“아니, 왜 이런 일이…….”
- 당신이니까 특별히 이야기 해 드리죠.
역시.
붕대맨에게 잘 보여 두길 잘했다.
- 살성은 이 탑 시스템의 일정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요. 쉽게 표현하자면 탑 전체 난이도 총량의 일정 부분을 맡고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총량은 절대 불변이고요.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가 될 것 같다.
“한강혁이 담당하고 있었던 난이도가 탑 미션으로 옮겨 갔다는 의미입니까?”
- 빙고! 바로 이해했군요.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고작 나에게 죽은 한강혁이 탑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뭔가 좀…….
- 그리고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충 알 거 같아요. 살성 말입니다. 이 탑에서 꽤 중요한 캐릭터예요. 그냥 일반 플레이어들과는 결 자체가 달라요.
“그럼 제가 만약 살성 한 명을 더…….”
- 아, 질문은 거기까지만! 사실 지금 당신에게 이야기해 준 것도 엄청난 호의였다는 것만 알아 두길 바랍니다. 흐흐흐.
궁금한 게 더 있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현자의 상태창이 나중에 뭔가 더 알려 주기만을 바랄 뿐.
“아, 그런데 PK 성공하면 특별 보상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흐흐흐. 그게 말입니다…….
뭔가 있다.
심상치 않은 뭔가가.
- 4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