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한강혁의 입술이 살짝 씰룩인다.
“이호영 씨, 지금 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습니까?”
“그래. 살성. 그게 내가 너에게 접근한 이유니까.”
그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강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만약 내 말이 허언이었다면 바로 죽여 버릴 듯한 기세로.
개인의 강함과는 별개로 살성은 살성만의 살기가 있다.
절대 감각을 지닌 내게는 그런 기운이 바로 느껴진다.
“당신, 정말로 살성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요?”
“어.”
한강혁은 내 앞에 멈춰 섰다.
“꼭 그래야만 할 겁니다. 난 거짓말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거든요.”
존댓말로 저런 말을 하니 더 살벌한 느낌이 들었다.
터어억!
한강혁은 칼집을 땅에 꽂았다.
“우리의 대화가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내 검이 칼집에 그냥 꽂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협박을 하는 포스가 아주 제대로였다.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나는 결계 안에 갇혀 있는 자감 매머드를 가리켰다.
이 결계는 곧 사라질 예정.
방금 미니맵에서는 또 다른 자감 매머드 한 마리가 소멸했으니 이제 결계가 열릴 조건이 완성된 것이다.
스르르르.
그리고 내가 손가락을 내리자 결계는 절묘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거 뭐죠? 방금 어떻게 한 겁니까?”
내가 생각해도 방금 전의 나는 마법사 같았다. 어쩌면 한강혁도 그렇게 느꼈을 터.
하지만 착각은 자유이니 저걸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단은 저것부터 해결하지.”
“그러죠. 우리의 대화에 방해가 될 거 같으니까.”
우리는 바로 검을 고쳐 들고는 자감 매머드의 돌진에 대비했다.
저 육중한 사이즈를 온몸으로 받아 낸다면, 제아무리 초인이라 할지라도 무사하긴 어려울 것이다.
크오오오오!
역시 우두머리의 울음소리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좀 더 레벨이 낮았을 때 이 소리를 들었더라면, 온몸이 경직되는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나도 많이 컸다.
눈앞의 저 녀석은 그저 공략해야만 할 대상.
쿠오오오오오!
결계가 소멸되자 녀석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자감 몬스터를 사냥하였습니다.]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잔여 시간: 21분]
방금 전의 모습이 한강혁의 최고 전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사실이 확실해졌다.
나보다 강하다.
어쩌면 손서연보다도 더.
근접 상태에서 한강혁이 보여 준 패도적인 강함은 시스템 오류가 의심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이 탑이 살성을 얼마나 총애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물론 이곳에서 저놈을 죽이겠다는 내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
“저, 일부러 무리했어요. 이호영 씨와 빨리 대화하려고.”
여전히 그에게 서준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한강혁은 서준호를 없는 사람처럼 지나쳐 나에게로 다가왔다.
이 녀석은 도대체 살성에 대해 뭐가 그리 궁금한 것일까.
“참 급해. 우린 지금 히든 피스를 공략한 건데, 보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야?”
[랜덤 보상 구슬 3개가 지급되었습니다. 각각 1개씩 선택하십시오.]
털썩.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허공 위에서는 구슬 세 개가 나타나더니 땅에 떨어졌다.
오늘 타이밍들이 계속 절묘하다.
“이호영. 당신은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나? 그냥 평범한 플레이어.”
나는 자감 몬스터가 죽은 자리로 터벅터벅 걸어가 땅에 떨어진 구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서준호와 한강혁도 뒤이어 한 개씩을 주웠다.
한강혁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제안한다.
“동시에 확인해 볼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구슬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스탯 포인트 10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탯 포인트 10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랜덤 박스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탯 포인트 10을 획득한 한강혁과 서준호.
당연히 스킬 랜덤 박스를 획득한 것은 나였다.
“이호영 씨?”
그나저나 또다시 랜덤 아이템이라니, 선물 상자 속에 다른 상자가 들어 있는 기분이다.
물론 니케의 행운이 따르는 한 꽝이 걸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말했을 텐데.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그건 됐고, 이제 살성 얘기나 해 보죠.”
살성.
솔직히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한강혁으로부터 알아내야만 한다.
이제부터 나는 적당히 진실과 거짓을 섞어 볼 계획.
방금 전에 내가 보여 준 절묘한 우연들은 이 거짓들에 신뢰를 한 꺼풀 씌워 줄 것이다.
“확실히 밝혀 두자면, 난 살성이 아니야.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만.”
“왜 내가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하죠?”
“네가 살성의 눈으로 나의 살인 행적을 보았을 테니까.”
“호오!”
두 가지 면에서 놀랐을 것이다.
하나는 내가 본인을 살성으로 정확하게 지목했다는 점.
또 하나는 내가 살성의 눈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
이렇게 선빵을 날린 이유는 앞으로의 거짓들에 진실성을 더 보태기 위함이었다.
“이호영 씨, 그런데 당신은 살성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고 있는 거죠?”
“나한테 좀 재미난 능력이 있거든.”
나는 한강혁을 향해 최대한 묘한 표정의 웃음을 보여 주었다.
녀석도 나를 따라 한다.
“재밌군요.”
한강혁의 방금 질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어쩌면 한강혁의 말대로 살성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정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강혁이 찾고 있던 사람도 어쩌면 또 다른 살성이 아니었을까?
이것을 토대로 가설을 세워 보자.
살성은 저마다 각기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한강혁은 또 다른 살성을 찾고 있을 것이다.
즉흥적인 발상이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그럼 이제 넌지시 한 번 떠 봐야겠다.
“한강혁, 네가 살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은 무엇이지?”
퍼즐 조각.
일부러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다.
한강혁이 제멋대로 해석해서 끼워 맞출 수 있도록.
“이호영 씨? 당신이 가진 걸 먼저 꺼내 놓는 게 순서일 거 같은데.”
역시.
반응을 보니 내 가설이 확실해졌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내가 가져가야 한다.
“아니, 내가 먼저 물었어.”
급한 쪽은 한강혁이다.
애써 감추려 하고 있지만 놈은 지금 안달이 나 있다.
“크크크. 좋습니다. 이호영 씨. 당신은 과연 뭘 들고 있을지 궁금해서 미쳐 버리겠군요.”
“말 돌리지 말고, 네 것부터 얘기해 봐.”
일부러 재촉했다.
녀석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당신은 피의 날을 알고 있습니까?”
“살성이 폭주하는 날이라는 것 정도는.”
“역시 알고 있군요! 그 피의 날 말입니다. 그걸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알고 있어요.”
나는 피의 날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건 현자의 상태창이 언급해 준 정보의 파편뿐.
한강혁은 무척 그 날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모르나, 그저 그런 이벤트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은 든다.
“그 방법이 뭐지?”
“그 방법이란 게…… 탑의 9층에서 말입니다……. 음, 안 되겠어요. 여기까지만 하죠.”
한강혁이 갑자기 말을 끊으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알아선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어차피 우린 구역도 다른데.”
“피의 날은 구역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아, 이런! 내가 쓸데없이 말해 버렸군요. 크크크.”
녀석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미 있는 정보다.
“이호영 씨, 그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내놓아야 할 거 같은데.”
교활한 자식.
결국 가장 중요한 부분은 쏙 빼놓은 채 주사위만 나에게 넘겼다.
“살성의 왕을 알고 있다.”
“살성의 왕이라고요? 믿을 수가 없군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아니, 분명히 존재하는 거야. 내가 봤거든.”
“거짓말!”
그래, 분명 거짓말이다.
하지만 너에겐 진위를 확인할 능력도 없다.
“살성은 레벨, 스탯, 스킬, 아이템 모두에서 특혜를 받고 있지. 너의 전용 스킬 오러 블레이드도 그 특혜 중의 하나이고 말이야.”
“호오! 거기까지 알고 있습니까?”
물론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다.
“살성 중엔 총을 쓰는 플레이어가 있어. 그 사람이 살성의 왕이지.”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서준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손서연.
여기서 너를 좀 팔아야겠다.
“그게 누굽니까?”
“나도 여기까지만 하지. 네 말의 끝을 다 듣지 못했으니까.”
떡밥은 던져 놨으니, 이제 놈이 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승자는 나다.
상대의 정보를 더 궁금해하는 쪽이 지는 거니까.
* * *
8층의 테마인 자격 갱신의 1단계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대기실.
나를 포함하여 검투사들은 붕대맨의 재등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호영 씨, 아까 한강혁에게 말한 것, 다 사실입니까? 살성은 또 뭐고 손서연이 살성의 왕이라는 건 또 뭡니까!”
서준호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내가 감추고 있었던 정보와 한강혁에게 한 거짓말까지 더해져 서준호는 거의 멘붕 상황.
특히 한강혁이 우리에게 썰을 푼 <피의 날> 대목이 압권이었을 것이다.
나도 놀랐을 정도니까.
“서준호 씨. 미안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그냥 다.”
나는 서준호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나는 나만의 특별한 능력을 숨겨 왔고, 그건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 우리 동료들에게 제가 다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네. 다 말하세요. 그리고 서준호 씨에게 더 고백할 게 있어요.”
결국 나는 <현자의 상태창>의 존재에 대해서도 고백하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죽은 왕관 장인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속이 다 후련하다.
“마…… 말도 안 돼요. 당신이 우리들의 정보를 볼 수 있다고요?”
“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반응.
충격일 것이다.
“그런데 그걸 왜 지금 저에게 고백하는 겁니까? 계속 숨길 수도 있을 텐데.”
“어차피 저는 회귀할 예정이니까요.”
검투사의 자격 갱신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또 조련사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8층의 시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선 서준호 혼자 8층을 진행할 것이며, 방금 전 죽어 버린 이미호도 살아 있을 터.
평행 세계 같은 별개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현자의 상태창은 말했었다.
“그건 더 말도 안 돼요!”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현자의 상태창이 준 정보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지 못했을 테고.
“그리고 저는 8층의 두 번째 미션이 시작되면 한강혁부터 죽일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 될 것이다.
약간의 정의감과 내 거대한 호기심이 결합된 실험.
탑의 총애를 받으며, 이 게임 시스템의 주요 역할을 맡고 있는 살성이 초반부에 죽어 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어차피 이곳은 내가 회귀를 하는 동시에 나완 상관없는 세상. 실험의 부작용을 피하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물론 서준호는 나를 만류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가능해요. 내 계산대로라면.”
난 불확실한 도박은 절대 하지 않는다.
상대의 패를 이미 보고 있는데도 내가 질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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