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저도 몰라요.’라니.
손서연도 그렇고 이 한강혁이라는 놈도 그렇고 살성은 죄다 또라이들인 모양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한강혁이 언급한 살성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한강혁 외에는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사는 파티 구성으로 넘어가 있었다.
붕대맨이 우리에게 부여한 40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호영 씨, 우리 같은 파티인 거 맞죠?”
내게 넌지시 묻는 서준호의 눈빛이 살짝 불안해 보였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제야 서준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내가 거절할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보다.
“당연한 걸 뭘 굳이요.”
“지금 이호영 씨 표정이 워낙 심각해 보여서 말입니다.”
지금 내 관심사는 오직 한강혁.
이유를 알고 싶었다.
본인이 살성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살성에 대해서 물은 이유.
호기심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동료가 되는 것이다.
“한강혁 씨. 파티원들은 다 구했습니까?”
결국 내가 먼저 한강혁에게 다가갔다.
“아니요. 아직.”
“그럼 저희 어떻습니까?”
나는 등 뒤에 있는 서준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레벨인 나보다는 준수한 레벨의 서준호를 함께 어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강혁은 서준호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호영 씨. 당신은 재밌는 사람이군요.”
뭐냐. 뜬금없이.
게다가 초면에 이런 멘트를 하다니.
역시 또라이가 틀림없었다.
한강혁은 내 얼굴을 보며 계속 실실 웃었다.
“제 얼굴이 재밌나 봐요?”
“네. 아주 재밌어요.”
지금까지 밝혀진 살성의 권능은 타인의 살인 행적을 볼 수 있다는 것.
한강혁은 지금 내게서 그걸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로 내 얼굴이 웃긴 거라면 할 말 없지만.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한강혁은 별 고민 없이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마지막 파티원 한 명은 제가 구해 올 겁니다.”
“그러시죠.”
한강혁이 내건 조건을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파티원 구성은 어떻게 되든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잠시 후 한강혁이 데려온 것은 어린 여자 플레이어였다.
평범한 레벨에 평범한 스탯. 물론 살성도 아니었으며, 별다른 특이 사항도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강혁과 같은 구역의 출신도 아닌 정말로 평범한 여자1 정도의 포지션.
도대체 뭘까. 이 여자의 정체는.
한강혁은 나를 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딱 내 취향이거든요.”
살성 중엔 정상적인 놈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 * *
파티 구성으로 부여된 40분이 모두 지나자, 붕대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붕대맨 녀석은 긴 시간 동안 우리의 대화를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행색도 그렇고 딱 관음증 말기 환자가 따로 없다.
- 아주 재밌었어요. 파티 구성 전에 정보를 공유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역시 다 보고 듣고 있었다.
- 그런데 여러분이 모은 정보가 정말 다 사실일까요? 크크크. 그건 뭐 상상에 맡기도록 하고, 그럼 이제 1단계 미션이나 받으세요.
1. 미션: 자감 매머드 사냥
2. 제한 시간: 120분
미션이 공개되자 허공에는 대문만 한 포털이 열렸다.
붕대맨의 목소리는 한층 더 격앙되어 갔다.
- 파티는 총 아홉. 그런데 어쩌죠? 자감 매머드는 여덟 마리밖에 없는데. 크크크.
망할.
붕대맨의 말을 종합해 보면, 자격 갱신의 장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더 나쁜 소식은 1단계부터 자격 갱신을 못 하는 플레이어들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
“그럼 혹시 자감 매머드 사냥을 못 한 파티는 120분이 지나면 죽는 것입니까?”
누군가가 붕대맨에게 질문을 했다.
이는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아홉 파티 중 하나. 그 하나가 내가 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이 탑에서 백수 플레이어는 필요 없다고. 하지만 저는 1단계에선 아량을 베풀어 볼까 합니다. 미션 클리어 조건을 하나 더 만들어 드리죠.
붕대맨의 말이 끝나자 메시지의 두 번째 항목 밑에는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었다.
3. 번외 조건: 포털 내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면, 자감 매머드 사냥과 동일한 효과를 인정받음.
붕대맨 자식은 아량의 사전적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었다.
“우리더러 서로 살인을 저지르라는 겁니까?”
“차라리 자감 매머드를 한 마리 더 넣어 주면 간단하잖아요!”
- 이거 어린애들처럼 왜 이러실까? 지금 여러분들은 소꿉장난을 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순간 미친놈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탑 놈들은 왜 이렇게 사람을 서로 죽이지 못하게 해서 안달인 것인지.
- 이제부턴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한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
붕대맨의 말이 끝나자마자 플레이어들은 포털 속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정상적인 과정대로 시험이 진행된다면 검투사들 중에서 최소 넷은 죽는다.
물론 그게 우리 파티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포털을 통과합니다.]
내겐 미니맵 스킬이 있으니까.
[미니맵이 ON 상태로 전환됩니다.]
내 눈앞엔 포털 속 세상의 지도가 펼쳐졌다.
서른여섯의 붉은 색 점들과 수백의 푸른색 점. 그리고 여덟의 검은색 점이 지도 위에 구현되었다.
검은색 점이 바로 자감 매머드일 터.
이제부터 우리는 이 중 하나를 찍어서 이동하면 된다.
푸른색 점으로 표현되어 있는 졸개 몬스터들은 피해도 그만, 잡으면서 이동해도 그만이다.
“다들 동의하신다면 제가 길잡이가 되어 볼까 하는데.”
내가 나머지 셋에게 제안했다.
엄밀히는 두 명에게이다.
서준호는 무조건 동의할 테니까.
“이호영 씨는 상당히 주도적인 사람이네요? 당신 옆에 있는 서준호 씨가 레벨은 훨씬 더 높은데.”
한강혁이 나와 서준호를 번갈아 보며 씨익 웃었다.
지금 녀석은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살성의 눈으로 나의 살인 행적을 보았다면, 내가 보통이 아니란 건 알았을 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서준호는 서둘러 해명했다.
“그건, 당신들도 이호영 씨를 한번 겪고 나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호영 씨는 우리 구역에서 최고의 플레이어였으니까요!”
“호오! 이 정도면 검투사라기보다는 사이비 교주 느낌인데요? 크크크.”
솔직히, 방금 서준호의 멘트는 내가 들어도 좀 민망했다.
“오빠들! 혹시 서두를 생각 없어요? 지금 다른 파티들은 미션 수행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데 우리만 이게 뭐냐고요!”
한강혁이 데려온 이미호가 살짝 짜증을 냈다.
“좋아요. 일단 이호영 씨를 믿어 보죠. 우리 귀여운 숙녀를 더 이상 화나게 하는 건 곤란한 일이니까. 크크크.”
한강혁.
기회를 봐서 이놈과 독대를 좀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 *
생각보다 우리 파티의 조합은 괜찮았다.
모두 검투사였지만, 각각의 개성이 뚜렷했다.
서준호의 검은 간결했고,
이미호는 저돌적이었으며,
한강혁은 그냥 셌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서연을 기준으로 한강혁의 무위를 가늠하게 되었다.
손서연이 원거리에서 정교함을 가졌다면, 한강혁은 근거리에서 무척 패도적이었다.
예리하게 베어 버린다기보다 검으로 때려죽이는 느낌.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오러 블레이드.
한강혁의 검이 몬스터의 몸체에 닿기도 전에 이미 검기가 발출되어 폭발하는 식이었다.
꾸에에에엑!
졸개 몬스터로 출현 중인 붉은 오크들은 우리들의 검에 가볍게 썰려 나가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레벨업도 순조로웠다.
“오빠들 생각보다 잘하는데요?”
이미호는 이제야 파티 조합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현자의 상태창이 나에게 전송한 메시지가 있었다.
[정보: 북동쪽에서 히든 피스를 발견하였습니다. 결계 안에 자감 매머드 한 마리가 갇혀 있습니다.]
그 순간 미니맵의 상단에 황금색 점이 생겨났다.
자감 매머드의 수가 여덟에서 아홉으로 늘어나게 된 순간이었다.
어쩌면 1단계 미션에서 모두가 생존할 수 있다는 의미.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이 황금색 점이 히든 피스라는 것이다.
“북동쪽으로 경로를 살짝 바꿔 봅시다.”
“왜죠?”
내 제안에 한강혁이 반문하며 나섰다.
“그쪽이 더 느낌이 좋으니까.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제가 운이 많이 좋습니다. 기가 막힐 정도로요.”
“믿는 것이 고작 운이라니, 이호영 씨는 보기보다 막무가내군요.”
“그래서 반대할 계획인가요?”
“아니요. 군말 없이 따르죠. 크크크.”
이제 와서 결론을 내린 것이지만, 한강혁 이놈은 자감 매머드 사냥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좀만 헤맨다 싶으면 곧바로 살인을 시작할 것 같은 느낌.
이미호를 고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오빠들 자꾸 뭘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예요? 정해졌으면 빨리 좀 가요!”
얘는 별생각 없이 맹하다.
여차하면 한강혁의 단칼에 죽기 딱 좋을 정도로.
나는 미니맵을 통해 전체의 상황을 살폈다.
현재 플레이어들은 전원 생존 상태.
자감 매머드는 이미 네 마리가 죽었다.
확실히 8층까지 온 플레이어들 중에선 구멍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럼 서둘러 이동합시다.”
최대한 미션을 빨리 끝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왠지 모르겠지만 한강혁. 이놈이 갈수록 불안해진다.
* * *
[자감 매머드의 우두머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결국 북동쪽에서 마주한 히든 피스.
심지어 이 녀석은 우리가 찾는 몬스터의 우두머리였다.
다른 자감 매머드보다 훨씬 크고 강한 녀석일 것이다.
히든 피스인 만큼 사냥의 보상도 클 테고.
“문제는 이놈이 결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로군요.”
몬스터를 감싸고 있는 반구 형태의 결계.
손으로 두드려 강도를 가늠해 봤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론 내가 깨뜨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자의 상태창이 먹지도 못할 떡을 나에게 제시할 리는 없었다.
분명 이 결계를 깨뜨릴 방법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바로 현자님께서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보: 결계는 자감 매머드 5마리가 죽는 순간 자동적으로 열립니다.]
역시. 방법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다.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
현재 자감 매머드 4마리가 죽은 상태이니 이제 1마리만 남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강혁이다.
“이호영 씨. 이제 어떻게 할 셈이죠? 여기서 돌아가기엔 좀 늦은 거 같은데.”
“조금 기다려 봅시다. 이 결계, 조만간 열릴 거 같으니까.”
“그걸 당신이 어떻게 확신하죠?”
“말했잖아요. 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나는 다시 한번 미니맵으로 전체 상황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으으으으윽!
섬광이 번쩍였고 핏물이 튀었다.
한강혁이 예고도 없이 사고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터억!
등 뒤에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이미호는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강혁의 돌발 행동에 놀란 서준호가 소리쳤다.
하지만 한강혁에게 서준호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
그의 눈길은 오직 나를 향하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저 혼자만 먼저 1단계 미션을 통과해 버렸네요.”
“미친놈!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제가 인내심이 좀 부족해서 말이죠.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거든요.”
한강혁은 나를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살성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손서연을 통해서도 이미 경험했지만, 한강혁은 한 수 위의 느낌이었다.
“이호영 씨, 내가 이미 피 맛을 봐 버렸는데 어쩌죠?”
“무슨 의미지?”
“지금 미치도록 칼춤이 추고 싶단 말입니다.”
결국 한강혁은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칼춤? 좋지. 그런데 그 전에 할 이야기가 하나 있어.”
“갑자기요? 겁나서 수작 부리려는 거 같은데.”
한강혁은 씨익 웃으며 검에 오러를 실었다.
오러의 섬광이 영롱하게 반짝인다.
“살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하는데.”
나도 한강혁을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 4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