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포털을 통과하였습니다.]
통합된 3개의 던전 중 마지막 한 곳까지 와 버렸다.
이곳에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김세용.
처음엔 밉상인 녀석이었으나, 함께 고난을 겪으며 어느새 정이 들어 버렸다.
현실 세계였다면 나완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부류이지만, 이 빌어먹을 탑이란 공간은 그런 곳이었다.
“살아만 있어라.”
소설의 스토리에선 던전 폭주로 인해 12조의 생도들은 전원 전멸.
하지만 김세용은 쉽게 죽진 않았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김세용이 살아 있다면 녀석은 더 이상 생존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젠 내가 왔으니까.
걷다 보니 죽은 생도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시신은 끔찍할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묘한 감정이 솟구쳤다.
죽은 이 생도는 허구의 등장인물이지만, 생생하게 실존했던 다른 차원의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죽은 이를 향해 애도를 표했다.
아마 다른 생도들 역시 무사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나는 절대 감각을 일으켜 몬스터를 찾아내고자 했다.
분명 몬스터의 냄새는 이곳저곳에서 나는데, 내 시야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탁 트인 드넓은 평원이었음에도 말이다.
내 절대 감각이 틀렸을 리가 없다.
“분명 냄새가 나.”
심지어 나의 모든 감각은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몬스터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접근하고 있다며.
그렇다면 설마!
쿠와아앙!
발밑이었다.
지면의 미세한 흔들림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괴성과 함께 땅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뿔두더지]
녀석은 땅속을 기어 다니며 나에게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불굴의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몬스터의 낯선 등장 방식에 살짝 놀라긴 했지만, 대비는 충분히 하고 있었다.
휘익!
검 끝은 공중에서 짧은 호선을 그렸다.
튀어 오른 녀석의 몸이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뿔두더쥐는 공중에서 그대로 절명하며 땅으로 추락했다.
표독스럽게 벌린 입 속엔 날카로운 이빨들이 소름 끼치게 돋아나 있다.
비록 사이즈는 작지만, 생도들 수준에선 쉽게 상대할 순 없었을 것이다.
쿠와아앙!
또다시 뿔두더지가 땅 밑에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보아하니 개체 수가 적지 않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덤빈다면 꽤나 성가신 수준은 될 것 같다.
* * *
“이런 개새!”
김세용은 튀어 오른 뿔두더지를 향해 솥뚜껑 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오락실의 두더지 게임을 연상시키는 분노의 돌주먹이었다.
퍼어어억!
김세용의 펀치를 맞은 뿔두더지는 땅에 떨어진 뒤 몸을 부들부들 떨고는 죽어 버렸다.
그야말로 일격필살.
멀리서 봐도 김세용의 파워가 느껴진다.
녀석은 내가 접근하는 것도 모른 채 뿔두더쥐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분명 주변에 몇 마리가 더 있을 것이다.
뿔두더지는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는 듯했으니까.
쿠와아아앙!
역시. 곧바로 등장했다.
이번엔 김세용의 등 뒤에서 뿔두더지가 튀어 올랐다.
배후를 내준 상황이라 살짝 걱정도 됐지만, 김세용은 곧바로 몸을 돌리며 펀치를 뻗어 나갔다.
퍼어어어억!
김세용의 돌주먹이 또다시 폭발했다.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정확성도 뛰어나다.
어설픈 수준으로 연마된 무기는 주먹의 정확성을 결코 따라올 수 없다.
이 던전. 권법가인 김세용에게는 나름 해 볼 만한 곳이었다.
“세용아!”
주변이 정리되자 김세용을 불렀다.
“어? 형! 형이 왜 여기서 나와!”
“그 대사 나올 줄 알았다.”
김세용의 놀란 표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녀석의 걷어 올린 팔을 보니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 있다.
“형, 어떻게 된 거야!”
나는 결국 손서연에게 해 준 것처럼 던전 폭주와 던전 통합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김세용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게 분명했다.
확실히 이 녀석 지능캐는 절대 아니다.
“괜찮아. 살아남았으면 됐지.”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이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데?”
“보스를 죽여야지.”
이미 지난 두 개 던전의 보스는 사냥되었다.
이제 남은 곳은 여기 하나.
난 이곳에서 마지막 보스를 처리하며 공적 1위를 달성할 계획이었다.
오윤남으로선 이곳으로 오는 포털을 찾기가 쉽지 않을 테니 내가 무난하게 역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아아아앙!
그 순간 멀리서 들려온 손서연의 총성.
저 망할 것이 결국 이곳까지 따라와 버렸다.
그렇게 따라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빨리 보스부터 찾아야겠다.
* * *
[당신의 공적치는 여전히 2위입니다.]
1위 오윤남에 3위 손서연.
물론 이 순위는 나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었다.
지금 히든 미션을 수행 중인 것은 오직 나뿐이니까.
소설의 전개처럼 지금 오윤남은 첫 번째 던전에서 살육쇼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살살해 주면 좋겠지만, 그럴 거 같지는 않다. 그럴 이유도 없고.
결국 나의 마지막 보루는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다.
바로 내 앞에 나타난.
쿠와와와왕!
지면이 흔들리는 정도가 조무래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스가 괜히 보스가 아니다.
땅을 뚫고 튀어 오른 보스 몬스터의 크기는 거의 늑대 수준이었다.
이런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땅속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휘이이익!
녀석의 궤적을 계산한 후 검을 휘둘렀다.
계산은 완벽했다.
내 불굴의 검은 이 괴물 녀석의 머리를 향했다.
콰아아아악!
문제는 이 녀석이 이빨로 검을 물어 버렸다는 것.
믿을 수 없는 순발력이었다.
“호영이 형!”
옆에서 보고 있던 김세용이 소리쳤다.
“끼어들지 마!”
많은 공적을 쌓으려면 무조건 단독으로 잡아야만 했다.
김세용 수준으로는 상대하기 버겁기도 하고.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김세용은 못내 아쉬워했다.
“하아!”
녀석을 떼어 내기 위해 검을 공중에서 붕붕 돌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악력 또한 장난이 아니다.
웬만한 검이었다면 지금쯤 부러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타아아앙!
그리고 이 던전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 손서연도 이 녀석을 발견한 것이다.
다행이라면 첫발은 오발.
거리가 워낙 멀긴 했다.
“형! 저기! 손서연!”
“알아!”
타아아앙!
바로 이어진 두 발째 격발.
역시 오발이다.
하지만 조금씩 영점을 잡아 갈지도 모른다.
재수가 없긴 해도 손서연의 능력만큼은 인정한다.
타아아앙!
케에에엑!
결국 영점을 잡고야 말았다.
스쳐 맞긴 했어도 뿔두더지는 충분히 놀랐을 것이다.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며 검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여간 저 망할 손서연은 도움이 1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리가 워낙 멀기도 했고 스쳐 맞았기에 위력이 강하지 않았다는 것.
손서연이 더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이 녀석을 처리해야만 한다.
총이 대미지를 쌓아 갈수록 내 공적치는 줄어들 테니까.
“세용아.”
“어! 왜!”
“저놈 좀 패 봐.”
끼어들지 말라는 말을 곧바로 철회했다.
어차피 김세용이 저 뿔두더지를 진짜로 패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
그냥 나에게 찰나의 빈틈만 만들어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진작 그랬어야지!”
김세용은 기다렸다는 듯이 뿔두더지에게 달려들었다.
총에 맞아 성이 잔뜩 난 뿔두더지 역시 달려오는 김세용을 향해 돌진했다.
그야말로 야수와 야수의 격돌이었다.
타아아아앙!
또다시 이어진 총성.
하지만 뿔두더지의 움직임은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다.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 괴물을 맞추려면 다시 감을 잡아야 할 것이다.
휘이이익!
김세용의 주먹이 뿔두더지를 향해 바람을 갈랐다.
크아아아앙!
하지만 보스 뿔두더지가 그냥 당할 리가 없었다.
내 불굴의 검도 물어뜯는데, 하물며 김세용의 펀치는 말할 것도 없다.
뿔두더지는 괴물 같은 운동 능력으로 김세용의 펀치를 공중에서 피해 냈다.
타아아아앙!
계속해서 총성은 울려 대고 그야말로 난장판.
그리고 이 상황에 종말을 고한 것은 나의 일격이었다.
쑤우우우욱!
김세용이 만들어 준 빈틈을 타고 나의 검은 뿔두더지를 꿰뚫었다.
케에에에엑!
거친 단발마의 비명이 울렸다.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였습니다.]
[통합된 던전이 올 클리어되었습니다.]
결국 끝나 버렸다.
길고 길었던 5층의 여정이 막을 내리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가장 중요한 메시지 하나.
[당신의 최종 공적치는 1위입니다.]
[히든 미션의 보상을 지급합니다.]
* * *
이제 겨우 탑의 5층을 올랐을 뿐이지만, 이번 층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소설 속 세상이라니.
다른 동료들에게 털어놓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책의 내용은 절대 발설할 수 없다는 규칙을 지켜야만 했다.
로비로 돌아온 지는 좀 됐지만, 여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오윤남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 수고했다. 그리고 굿 럭.
그것은 내가 녀석에게 건넨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하지만 오윤남은 그 인사의 의미를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오윤남이 다음 날 아카데미에서 만나게 될 이호영은 더 이상 내가 아닐 테니까.
SSS급 회귀자의 기연 싹쓸이.
이 소설에서 오윤남은 무한 회귀의 비밀을 풀고자 했다.
나는 그 비밀을 알고 있었으나 결국 오윤남에게 결정적인 마지막 정보는 전하지 않았다.
요정들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
그들은 주인공이 남은 여정을 스스로 헤쳐 나가길 원했다.
암, 그 정도는 들어줘야지.
그 요정 놈들은 결국 히든 보상으로 엄청난 것을 안배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호영이 형! 형은 이번 5층 보상으로 뭘 얻은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김세용은 내 보상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어 녀석에게 보여 주었다.
“그게 뭔데?”
“이거? 스킬 업 아이템.”
나는 김세용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구슬엔 ‘Lv.3 → Lv.4’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와 씨! 그럼 형 이제 검술이 레벨 4로 되는 거야?”
사실 이게 보통 아이템은 아니었다.
스킬 레벨을 4로 올려 주는 아이템은 상점창에서는 팔지 않으니까.
“부러워?”
“진짜 형은 날로 먹는구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수련을 통해서만 스킬 레벨을 4로 올릴 수 있다.
5층 미션이 시작되기 전에 도서관에서 읽었던 그 무공서를 바탕으로 말이다.
“아 놔! 형 얘기 듣고 기분 상했어.”
김세용은 투덜대며 돌아섰다.
그러기에 남의 보상은 왜 물어보는 건지.
[초급 검술의 레벨이 4로 상승하였습니다.]
아이템을 꺼낸 김에 바로 사용했다.
단 하나의 레벨 차이지만 이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플레이어들에게 수련이라는 필수 과정을 부여했을 리가 없을 테니.
김세용의 말대로 날로 먹으려니 살짝 미안해졌지만, 세상은 어차피 공평함과는 거리가 먼 법이다.
그리고 진짜 불공평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구슬 하나를 더 꺼냈다.
[직업 슬롯 +1]
히든 미션을 통해 얻은 보상이었다.
이것을 사용하게 되면 나는 랜덤으로 직업 하나를 더 갖게 된다.
이제부턴 겸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웃음이 절로 나왔다.
랜덤이라는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나에겐 행운을 대폭 올려 주는 니케의 반지가 있으니까.
나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현자의 상태창을 통해 동료들의 직업이 내 눈에 들어온다.
검투사, 권법가, 창술가, 탐험가…….
솔직히 말하면 이 중에 끌리는 직업은 없다.
하지만 분명 내가 모르는 많은 직업들이 존재할 것이다.
근거 충만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좀 더 여흥을 즐기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결국 손에 쥐고 있는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구슬이 사르르 소멸되며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당신에게 새로운 직업을 부여하겠습니다.]
- 3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