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5층 미션의 마지막 날.
이제 오늘만 지나면 이 소설 속의 세계를 떠나게 된다.
여긴 비록 허구의 세상이지만, 우리가 처한 탑의 세상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인 곳이었다.
우리의 본래 삶을 잠깐이라도 느낄 수 있었던 나흘의 시간. 어쩌면 탑이 우리에게 베푸는 마지막 아량일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차디찬 겨울이 시작되기 전 잠깐 찾아오는 인디안 써머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퀘스트가 만만할 거라 예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버스 탑승!”
“네!”
내 짐작이 맞다면 오늘이 나흘의 일정 중 메인에 해당할 것이다.
생도들은 조별로 배정된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던전 실습.
아카데미에서 매년 생도들이 거쳐 가야 할 필수 코스가 바로 오늘이었다.
내 버스 옆자리는 오윤남.
주인공이어서인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존재만으로도 옆에서 묘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내가 기를 쓰고 이 녀석과 같은 조로 들어온 것은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높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9조와 12조이다.
그들은 우리 4조처럼 사고가 일어나게 될 던전에 들어가게 된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인지 나도 모른다.
소설에서는 전혀 서술하지 않았으니까.
“우연이라고 생각해?”
오윤남에게 물었다.
아카데미에서 실습용으로 구입한 E급 던전 중 3개가 오늘 동시에 폭주를 일으킨다.
던전 폭주 현상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건 분명 이례적인 일.
우연일 리가 없다.
“글쎄. 그건 나도 매 회차마다 고민한 문제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밝힐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냥 넘어갔다?”
“내 능력 밖의 일이니까.”
이 소설의 작가가 누군지는 몰라도 엉망진창의 설정이었다.
이 부분을 그냥 대충 쓴 건지, 아니면 회수하려고 남겨 둔 떡밥을 완결까지 묻어 둔 건지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찝찝한 일. 현실이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소설을 이렇게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로 사용하고자 했다면, 무려 3곳에서나 던전 폭주가 일어날 필요가 없으니까.
“능력 밖의 일이라.”
소설의 공백으로 남아 있는 이 대목이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이 아닌 이곳 현실에선 어떻게 공백이 메워지며 개연성을 확보했는지 말이다.
“그런데 그게 중요해?”
오윤남이 내게 반문했다.
역시 또다시 드러나는 등장인물의 한계였다.
주인공은 목적의식 하나만을 향해 달려가도록 세팅된 존재일 테니까.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긴 하지.”
만약 가능하다면 이 부분을 파헤쳐 보고 싶었다.
헛짓거리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예상외의 소득이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아쉽다. 5층에선 공략집이 없다는 사실이.
달리는 버스의 차창 밖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제 곧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 그리워질 거 같아서.
* * *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각자, 던전 실습을 위해 배정받은 던전을 클리어하십시오.]
퀘스트가 이렇게 단순하다고?
이것은 내 예상 밖의 전개였다.
던전 실습 외에도 뭔가 더 있을 거라 생각했다.
12개의 조 중 던전 폭주가 일어나는 3개 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이 너무 무난하게 끝나 버릴 예정이니까.
그런데도 아무런 보정도 없이 소설 속의 전개를 그대로 따른다?
만약 그렇다면 탑이 우리에게 부여한 퀘스트치고는 너무 허술한 것이다.
“흐음.”
일단 나는 던전 속을 홀로 걸었다.
던전 실습 평가를 위해 차고 있던 액션캠은 꺼 두었다.
평가 결과 따윈 개나 줘 버려도 상관없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던전 클리어 이후에 일어날 던전 폭주 현상.
클리어 전까진 다른 생도들처럼 평범하게 사냥에 임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평범한 오크들만 나오고 있으니까.
그런데 딱 하나.
거슬리는 게 있다.
“계속 따라다닐 거야?”
뒤를 돌아보니 고용우가 순간 멈칫했다.
“역시 알고 계셨네요.”
“계속 뒤를 밟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우리 조에서 유일하게 탑에서 함께 온 동료.
그리고 우리 동료들 중 유일한 미성년자이다.
현재의 생도 차림에 전혀 위화감 느껴지지 않는.
“역시 형은 대단하네요.”
“대단할 것도 많다.”
내 말에 고용우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이 녀석과는 말을 길게 섞어 볼 기회가 없었다.
아직도 나를 좀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인다.
아마도 예전 데스 미션 때 나에게 한 표를 행사했기 때문이겠지.
다른 사람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는데,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다.
“종말이 오기 전에도 형은 대단했겠죠?”
“뭐?”
뜬금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종말이 오기 전이라…….
그냥 난 평범한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솔로였고, 많이 벌진 못했으며, 가족이 없었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평범은 아니었구나.
탑에서 나를 특별하게 만든 건 그냥 하나의 우연 때문이었다.
실버 고블린을 만나는 기연을 얻은 것.
그날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살아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문득 그 실버 고블린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놈은 뭘까. 그리고 혹시 이 탑 안에서 또 볼 기회는 있는가.
많은 생각들이 몰려들 무렵 고용우가 한마디를 건넸다.
“미안했어요. 그때는.”
이놈은 그동안 사과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린 녀석 같으니라고.
탑에서 살아남기에 유리한 성격은 아니다.
부여받은 직업 특성도 전투 쪽이랑은 거리가 멀기도 하고.
“미안해할 거 없다. 그리고 만약 비슷한 상황이 또 온다면 넌 같은 선택을 해야만 할 거야.”
“왜죠?”
“우리가 처한 상황은 결코 장난이 아니니까. 네가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너 자신의 생존이란 의미야.”
고용우는 내 말에 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 녀석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도리어 부럽기만 했다.
“그리고 형은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이었어. 오히려 네가 더 재밌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지.”
“제가요?”
“그래. 넌 탐험가잖아.”
고용우가 탑에서 부여받은 직업은 탐험가.
처음 이 아이의 상태창을 보았을 때 흥미롭게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쪽 동아리 활동을 하기도 했고요.”
“어쩐지 그랬었군.”
“고고학자가 꿈이었는데, 이렇게 탐험가가 되어 버렸네요.”
고용우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망할 놈의 탑이다.
이 어린 녀석의 순수한 열정이 탑 안에서는 도리어 독이 되어 버렸으니까.
고용우의 스킬은 <탐색>.
파티 규모라면 쓰임새가 있겠지만, 독자적으로 살아남으려면 역시 전투와 관련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그룹에서 살아남은 이들만 봐도 그렇다.
대부분 전투에 유리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
고용우만 아쉽게 됐다.
“지금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도 키워야 해.”
어리고 약하다는 이유로 전적으로 보호하는 건 길게 보면 못 할 짓이다.
내가 탑을 오르는 내내 돌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알고 있어요. 형한테 의지하려고 따라온 게 아닙니다. 제가 오늘 형을 졸졸 쫓은 이유는 두 가지예요.”
응?
생각했던 것보다 당찬 모습이다.
“하나는 예전 일에 대한 사과일 테고.”
“네. 또 다른 한 가지는…… 이 던전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요. 그걸 형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이상한 기운이라.
정말 그런 것이 있다면 내가 더 먼저 느껴야 정상이다.
제아무리 탐험가 직업에 <탐색> 스킬이 있다고 해도 기운을 감지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 감각>에 비할 수는 없으니까.
“그 기운이라는 게 혹시 몬스터가 뿜어내는 그런 것?”
“아니요. 뭔가 좀 달라요. 좀 더 가까이 접근해 보면 확실해질 거 같은데.”
“그럼, 일단 같이 가 보자.”
뭔진 모르겠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지금 오윤남은 잘하고 있으려나?
너무 빠르게 몬스터를 학살하지 말기를 부탁했다.
클리어 전까지 이 던전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싶었다.
어떤 연유로 세 던전에서 동시에 던전 폭주가 일어나는지 혹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고용우가 내게 이야기한 걸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 * *
취이이익!
“하아압!”
고용우의 전투 모습은 확실히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스탯이 그리 높지 않은데, 전투에 써먹을 만한 스킬도 없는 것이 너무 컸다.
<초급 검술 Lv.3이 발휘됩니다.>
꾸에에에엑!
내 불굴의 검에 오크의 목이 썰려 나갔다.
내가 뒤에서 고용우를 커버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번에도 위험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형!”
“항상 집중해!”
“옙!”
사실, 집중의 문제가 아니었다.
딴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낮은 스탯, 전투 스킬의 부재.
이런 것들이 치명적이다.
“용우아, 일단 다른 스탯보다는 민첩부터 좀 올려야겠다.”
김세용이 근력 성애자라면, 고용우는 체력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해 버렸다.
피통이 커지면 생존에 유리할 것이라 판단한 모양인데, 완전 잘못 짚었다.
비전투 계열이라 안 그래도 전투 센스가 낮은데, 회피 능력이 떨어지니 피통이 커 봐야 소용이 없다.
“네, 알겠어요! 형이 하는 이야기니까 무조건 맞겠죠?”
그렇다고 날 무슨 교주 취급은 하는 건 사양이고.
“그러니깐 골드 아끼지 말고 지금 써.”
상태창을 보니 1200골드를 쟁여 두고 있는데, 이 정도 수준에선 티끌 모아 티끌일 뿐이다.
“제가 골드 쟁여 두고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형은 딱 보면 알아.”
나는 한 번 더 재촉했다.
이렇게 티끌처럼 쌓아 두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결국 녀석은 1000골드를 모두 민첩에 투자했다.
그런데 남은 200골드는 어디다 쓰려고.
“다 썼어?”
“……네!”
“용우야, 그냥 다 털어 넣어. 딱 봐도 한 200 정도는 남긴 거 같은데.”
“헐, 소름!”
결국 고용우는 내 말대로 모든 골드를 민첩에 털어 넣었다.
여전히 부족한 스탯이지만, 차라리 이것이 생존 확률을 높여 줄 것이다.
“사실, 골드 모아서 무기라도 좀 사 볼까 했는데.”
“당분간 튜토리얼에서 받은 낡은 장검이나 써. 넌 무조건 스탯이 우선이야.”
“네.”
토 하나 달지 않고 바로 대답하는 건 마음에 들었다.
우리 둘은 고용우의 <탐색> 스킬을 따라 던전 깊숙한 곳까지 이동했다.
솔직히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고용우가 말하는 특이한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형! 드디어 다 온 거 같아요.”
“다 왔다고?”
“네!”
그러면서 고용우는 던전의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녀석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완벽하게 집중한 모습은 전투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여기서 뭔가 새어 나오는 거 같은데요?”
고용우가 벽면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가리켰다.
멀리서부터 지적한 특이한 기운을 의미하는 것일 터.
만약 사실이라면 소름 돋는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내 절대 감각은 여전히 그 무엇도 감지해 내고 있지 못하니까 말이다.
솔직히 외형상으로는 벽면의 다른 곳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느낌.
“비켜 봐, 용우야.”
하지만 고용우의 스킬이 괜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빌어먹을 게임 시스템이 아무 쓰임새도 없는 스킬을 만들어 놓진 않았을 터.
<초급 검술 Lv.3가 발휘됩니다.>
나는 고용우가 가리킨 벽면에 불굴의 검을 휘둘렀다.
타악!
그냥 딱딱한 벽의 감촉만이 검을 타고 팔 전체에 전해져 왔다.
물론 한번 해 보고 말 생각은 아니었다.
<초급 검술 Lv.3가 발휘됩니다.>
타악!
여전히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까보다 팔이 저려 오는 게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제 아주 살짝 의심이 되긴 한다.
이 소설 속의 세상도 설정 구멍이 존재하긴 하니까.
오늘 던전 폭주를 일으킬 3개의 던전만 해도 그렇다.
폭주를 일으킬 거면 주인공 것만 일으키지, 왜 굳이 서술도 하지 않을 나머지 2개를 일으켜서.
<초급 검술 Lv.3가 발휘됩니다.>
타악!
여전히 단단하기만 한 벽면.
그런데 그 단단한 벽면에서.
지직!
지지지직!
정체 모를 파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궁을 발견하였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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