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오윤남은 묵묵히 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에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미래와 새롭게 겪을 미래를 섞어 그가 꼭 알아야만 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들을수록 놀라워.”
솔직히 내가 더 놀랍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인물과 이렇게 마주 보며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회귀자가 아닌데도 이런 걸 알고 있다고?”
“말했잖아. 난 회귀자보다 더한 놈이라고.”
“회귀자보다도 더한 놈이라…….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제아무리 예언가라 해도 모든 걸 알진 못하니까.”
이놈은 나를 예언가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등장인물의 한계일 뿐이다.
이 세상이 허구일지도 모를 거란 발상의 전환 자체를 절대 할 수 없으니까.
그냥 예언가라 믿도록 내버려 둬야겠다.
“내가 방금 전해 준 말, 다 믿을 수는 있겠냐?”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좀 더 살아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뭐?”
“개연성은 충분해 보이는군.”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솔직히 소설을 보면서 개연성 진짜 개판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주인공이라 그런지, 이 허구의 세상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남다르긴 하다.
그리고 내가 오윤남에게 모든 정보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은 남겨 두었다.
혹시 모를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서.
“고맙다.”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오늘 널 구해 준 것. 거기에 수천 년의 숙원을 풀어 줄 이야기까지 해 줬는데.”
“내가 만약 회귀의 저주를 풀게 되는 날이 온다면, 너에게 다 줄 수 있을 것 같다.”
“다? 뭘?”
“뭐든.”
와, 소름.
그런데 오윤남이 하는 말이 완전 허풍은 아니다.
지금은 아직 아카데미 생도 신분이지만, 곧 세계 제일의 부와 권력을 거머쥐게 되는 인물이니까.
그런데 어쩌냐.
난 내일모레면 이곳을 떠나게 된다.
세상 전부까지는 필요 없고 그냥 소소한 아이템 하나면 족하다.
“그런 공수표는 사양이야.”
“나의 미래를 알고 있다면 내 말이 공수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텐데?”
“그런 거 몰라. 난 현재가 중요한 사람이니까.”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수천 년을 살았으니 그 정도 눈치는 있을 거라 믿는다.
“그래. 언제나 현재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
오호라. 바로 반응이 오는 걸 보면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오윤남은 인벤토리에서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많이도 나온다.
내가 비록 아이템 감정사는 아니지만, 눈으로만 봐도 심상치 않다는 게 느껴졌다.
정말 아이템의 보고가 따로 없구나.
“이걸 날 주겠다고?”
“딱 하나만.”
오윤남은 내 안목을 보고 싶다는 듯이, 뒷짐을 지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됐으니 사양하는 척할 필요는 없다.
나는 천천히 오윤남이 풀어 놓은 아이템 더미를 관찰했다.
이 중에서 무얼 고른다?
소설에서 오윤남의 모든 기연들을 하나하나 다뤄 줬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초반부의 많은 부분은 생략되었고 이렇게 봐선 뭐가 가장 좋은지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음…….”
소설의 초반부 내용을 쥐어짜며 상기해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1회독 정도는 더 해 둘 걸 그랬다.
하필 재미가 없어서.
아참!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멍청한 놈. 이런 상황에선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니케의 반지.
내가 이걸 괜히 끼고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뽑기의 운 정도는 기대해 볼 수 있다.
“저거!”
나는 무심코 아무 곳에다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테이아의 갑주?”
“어.”
“역시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이 갑주의 옵션 정도는 알고 있을 테고.”
물론 모른다.
하지만 오윤남의 반응을 보니 잘 고른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테이아의 갑주>
- 등급: 레어
- 효과: 방어력 +25% 증가
역시.
생각한 대로 옵션이 좋았다.
상점창에서 비슷한 성능의 방어구를 구입하려면 10만 골드 정도는 주어야 하겠지.
득템을 제대로 했다.
무기에 방어구까지 레어 등급 템으로 맞춰 놓았으니 당분간 아이템으로 돈 나갈 일은 없겠다.
정말 은혜로운 주인공을 만났다.
* * *
아카데미에서의 셋째 날.
벌써 이곳의 생활에 적응해 버린 것 같다.
아니, 적응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망할 놈의 탑은 사람 살 곳이 못 되니까.
따지고 보면 이곳도 탑의 5층일 뿐이지만 여긴 뭔가 좀 다르다.
우리가 원래 살았던 곳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켜 아늑하면서도, 그래서 더 가혹한 곳이기도 했다.
“내일 던전 수업을 실시할 조 편성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다!”
어제 측정한 기록에 따라 조가 정해졌다.
총 12개의 조.
오윤남과 한 조가 될 확률은 12분의 1이지만 니케의 효과를 믿었다.
“4조! 조장 오윤남. 그 외 우지호, 신성범, 고용우, 이호영.”
역시.
이런 뽑기류에서 니케의 능력은 정말 사기적이다.
12분의 1이 아니라 1200분의 1이라 해도 오윤남과 한 조에 편성이 되었을 것 같다.
소설의 세계관을 벗어나서도 이 정도 능력을 발휘해 줄지가 갑자기 의문이다.
모든 조 편성 결과가 발표되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일 진행될 던전 실습.
소설의 전개대로라면 우리 조를 포함한 몇 개의 던전에서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
그 사고에서 전멸을 피하는 것은 오직 우리 조뿐.
나는 오윤남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너도 알고 있지?”
뜬금없는 물음에도 오윤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바로 이해한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 시점으로만 서술을 했기에 어느 조가 봉변을 당하게 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혹시 오윤남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매 회차마다 이 일을 겪었으니까.
“어느 조인지 알아?”
내 물음에 오윤남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4조, 9조, 12조.”
다행히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윤남도 초반부 회차 땐 이 던전 실습을 취소시키려 안간힘을 썼다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생도의 제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없다.
결국 오윤남은 매 회차 때마다 동료의 부고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가장 힘든 순간 중 하나이지.”
담담히 말하고는 있지만, 오윤남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4조는 우리 조인데, 9조랑 12조는?
나는 우리 동료들의 조 편성 결과를 다시 확인했다.
“이설 씨가 9조라고요?”
“네, 손서연과 함께요.”
채이설의 표정이 살짝 우울한 게 손서연과 한 조가 된 걸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하필 왜 9조에.
그래도 손서연과 같은 조가 된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다.
탑의 가호를 받는 살성이 고작 5층에서 죽을 리가 없으니까.
그 미친년은 충분히 소설의 스토리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채이설이 함께 생존할 수 있는지의 여부.
갑자기 오윤남이 겪었을 고뇌가 전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12조 또한 문제다.
“김세용, 네가 12조라고?”
“어! 내가 조장이잖아! 크크크.”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감투 하나 쓴 거로 좋아서 웃고 있다.
채이설보다는 이놈 쪽이 더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손서연이 속한 조보다는 전력이 훨씬 약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대로 뒀다가는 소설 스토리처럼 전멸할지도 모른다.
“크크크.”
좋다고 웃는 걸 보고 있으니 더 찡하기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건투를 빌 뿐이다.
* * *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신동훈 교수의 실기 수업이 계속되었다.
오늘의 주제는 회피 훈련.
“윤수현이 우리나라 최고의 헌터가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신동훈 교수의 질문에 생도들은 하나같이 대답했다.
“특유의 스피드 아닙니까?”
“그래, 스피드. 그런데 마냥 스피드만 빠른 것이 아니다. 고도로 훈련된 반사 신경! 윤수현이 던전 공략 끝나고 나왔을 때 옷 더러워진 거 한 번도 못 봤지?”
그것은 소설 속에서도 묘사된 부분이었다.
몬스터에게 어지간해서는 타격을 입지 않는 S급 헌터 특유의 회피 능력.
신동훈 교수는 본인이 직접 회피 시범을 보이겠다고 했다.
그는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어 올렸다.
“누가 자원해 보겠나? 만약 성공한다면, 학점에 반영하도록 하지.”
미션은 간단했다.
1분 내에 저 양동이의 물을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울렸다.
[서브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1. 조건: 신동훈 교수의 미션을 성공시키십시오.
2. 보상: 퍼펙트 실드 1회
3. 실패 시: 1000골드 감소
퍼펙트 실드?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었지만, 정보를 확인해 보니 진짜 엄청난 물건이었다.
그 어떤 공격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마법 아이템.
비록 1회로 제한된 소모성 아이템이지만, 여분의 목숨 하나를 얻는 셈이나 다름없다.
실패해도 고작 1000골드 감소.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소설에서 오윤남이 어떻게 성공시켰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관건은 녀석보다 먼저 자원하는 것이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나를 보는 신동훈 교수의 표정이 뭔가 시큰둥하다.
“자네 이름이 뭐였지?”
“이호영입니다.”
심지어 내 이름도 모르는 설정이다.
학점에 눈이 멀어 분수도 모르고 나대는 생도1 정도로 비쳤겠지.
“정말 해 볼 텐가?”
“네. 기회만 주신다면.”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지금 손서연의 표정을 보니까 실패하라고 고사라도 지낼 것 같은 포스다.
다음 순번에 도전하려는 거 같은데, 그러니깐 손을 빨리 들었어야지.
이게 다 민첩 스탯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다.
“그럼 한번 나와 보게.”
“네.”
오윤남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마치 성공을 예견하고 있는 듯한 표정.
살짝 부담이 된다.
오윤남이 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소설 속 오윤남의 전략은 아주 간단했다.
그는 매 회차마다 반복됐던 신동훈 교수의 회피 패턴을 알고 있었다.
공격에 들어가는 생도의 몸을 타고 역방향으로 빙그르 도는 장면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럼 공격 들어가겠습니다.”
“주저 말고 오게.”
분명 신동훈 교수는 내가 아직 범접조차 할 수 없는 고수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지원자가 오윤남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저 노교수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물 한 방울만 덜어내더라도 성공.
패턴을 알고 있는데 못 할 것도 없다.
휘이이익!
나는 신동훈 교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햇빛에 반사되는 노교수의 대머리가 내 눈을 방해한다.
눈은 부셨지만, 다음 행동에 대한 확신이 있다.
이런 건 대응이 아닌 예측의 영역.
그 예측이 정확한 것이라면 실패할 이유는 너무 빈약하다.
퍼어어억!
내 주먹이 노교수가 들고 있던 양동이를 쳤다.
“우와아아아!”
환호성이 들려왔다.
초반 러시로 얻어 낸 기대 이상의 결과.
튀어 오른 물은 신동훈 교수의 대머리를 살짝 적셔 주었다.
“이호영이 정말로 한 거야?”
“쟤 갑자기 왜 저래.”
[서브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퍼펙트 실드를 획득하였습니다.]
갑자기 내 인벤토리가 두둑해진 느낌이다.
이로써 여분의 목숨 하나를 얻은 셈.
이곳에서 나흘밖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퀘스트 싹쓸이할 자신도 있는데.
- 2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