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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24화 (24/292)

24화

“경고했을 텐데. 날 상대로 장난을 친 것이라면 재미없을 거라고.”

오윤남이 나를 향해 궁니르를 겨누었다.

소설을 통해 저 무기의 위력은 충분히 알고 있다.

궁니르가 저놈의 손을 떠나는 순간 이미 난 죽은 목숨.

신화급의 예리한 창날을 마주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밀려 왔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분명히 나다.

“원래 이렇게 성질이 급한 녀석이었나? 무한 회귀자라면 좀 더 성격이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오윤남의 입술이 살짝 떨린다.

소설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주인공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무한 회귀자. 녀석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미치도록 궁금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어떻게 하면 내가 회귀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오윤남이 회귀자임을 제 입으로 처음 인정하는 순간인 것이다.

“조급해하지 마. 이미 거대한 나비효과는 진행 중이니까.”

“나비효과?”

“그래, 너의 이번 회차 인생은 이전과는 많이 다를 거야.”

오윤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많은 부분이 달라지긴 했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 자체가 진행이 안 될 테니까.

일례로, 오윤남은 내일 자신에게 닥쳐올 위기를 모르고 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건 바로 퀘스트 생성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넌 이번 회차에서 회귀의 사슬을 끊어 낼 수도 있을 거야. 중요한 몇 가지만 지켜 낸다면.”

“그게 뭐지?”

오윤남은 이번 회차에서 그것을 스스로 찾아낼 공산이 크다.

니케의 반지를 내게 빼앗겼다는 변수가 있지만, 주요 지점들만 내가 짚어 준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건 내일 이 자리에서 알려 주지.”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궁니르의 창날이 내 목젖을 눌렀다.

반응할 겨를도 없었다.

이놈이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난 꼼짝없이 죽는다.

“이거 치우는 게 좋지 않을까? 수천 년을 기다렸는데 하루를 못 기다린다고?”

“대 봐. 개수작이 아니라는 증거.”

솔직히 지금이라도 다 이야기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일의 퀘스트가 어그러져 버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놈을 마지막 순간까지 이용하려면 마지막 패는 남겨 두어야만 했다.

“보고 싶지 않아? 너의 서른두 살의 겨울 말이야.”

내 말에 오윤남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것은 소설에서 녀석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오윤남이 회귀를 반복하는 시점은 서른두 살의 가을이니까.

그의 입에서 거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만약 개수작인 게 밝혀진다면 내일 넌 죽는다.”

내 목을 누르고 있던 궁니르가 회수되며 오윤남이 돌아섰다.

다행히 주인공에게 개죽음을 당하는 엑스트라의 운명은 아닌가 보다.

* * *

둘째 날.

나와 동료들은 의미도 없는 아카데미 수업에 출석 중이었다.

사실 출석 체크도, 아카데미 학점도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이틀 뒤면 우린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며, 여기에 남게 될 이호영은 나와는 상관없는 평행 차원의 다른 인물일 테니까.

김세용은 오늘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며,

채이설은 의미도 없는 노트 필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손서연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제 잃은 골드 때문일 것이다.

“억울하면 한 판 더?”

멀찍이에서도 손서연은 내 입 모양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죽여 버린다.”

그녀의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여기서 더 놀렸다가는 수업 중 총기 사건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리고 오윤남. 녀석은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다.

수업에도 집중하지 않고 하루 종일 이 모드였다.

게다가 나를 의식할 만도 한데, 오늘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수업, 마나 실기 시간까지도 말이다.

“예고한 대로 오늘부터는 개인 무기의 사용을 허락한다.”

신동훈 교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생도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부터 아카데미에도 진정한 템빨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생도들의 상당수는 금수저들.

정식 헌터가 아님에도 무기 세팅이 휘황찬란하기만 하다.

상대적으로 우리 동료들이 초라해져 버렸다.

개인 무기라고 해 봐야, 아카데미에서 지급하는 연습용 무기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기에.

신동훈 교수의 지시에 따라 모든 생도들은 네 줄로 정렬했다.

장르 소설 속에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그 장면이 나올 차례인 것이다.

펀치 기계를 쳐서 전투력 측정하기.

다른 점이 있다면 주먹이 아닌 무기로 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표적은 펀치 기계가 아닌 1미터 크기의 거대한 마나 크리스털이라는 점이었다.

“오늘 평가 점수는 이틀 뒤에 있을 던전 실습 조 편성에 반영할 예정이다. 자, 그럼 1번 생도부터.”

이곳 생도들의 실력이 궁금했는데, 마침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바로는 생도들보다는 우리 동료들 쪽의 실력이 우세했다.

오윤남같이 규격 외의 존재만 뺀다면 말이다.

파아앗!

충격을 받은 마나 크리스털이 빛을 발산하더니, 잠시 뒤 화면에는 숫자가 출력되었다.

“오오! 67!”

생도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저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1번부터 꽤 높은 점수가 나왔다는 반응이었다.

김세용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투덜댔다.

“무기 꼭 써야 하는 거야?”

김세용이 주먹을 매만졌다.

아마 저 크리스털을 맨손으로 칠 모양이다.

“그냥 칼 써, 인마. 낡은 장검 있잖아.”

“기다란 거 들고 다니는 건 질색이라서. 남자는 주먹이지.”

하긴 김세용 같은 권법가라면, 웬만한 무기보다는 주먹이 더 파괴력이 있을 것이다.

“61!”

“57!”

측정을 하는 생도들이 점점 늘어났지만, 아직 1번 생도의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67이 나름 좋은 성적이긴 한가 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동료들에게도 순서가 돌아왔다.

파아아앗!

검투사 서준호가 낡은 장검으로 크리스털을 때렸다.

비록 아이템은 비루하지만, 커다란 충격이 느껴진다.

분명 기록은 깨졌을 것이다.

“오오! 69!”

서준호가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생도들이 모두 서준호를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처럼 괜히 내 기분도 좋아졌다.

“형, 내가 가서 기록 또 깨고 올게.”

김세용이 팔을 빙빙 돌리며 걸어갔다.

역시 저놈은 돌주먹이 제격이다.

퍼어어억!

김세용의 솥뚜껑 주먹에 크리스털이 흔들린 것만 같았다.

방금 전 서준호 때보다 크리스털이 좀 더 강한 빛을 발산한다.

“미친!! 75야!!”

“무기도 없이!”

생도들이 경악했다.

김세용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런 여운도 잠시.

“비켜.”

손서연이 크리스털 앞에 섰다.

총구는 이미 표적을 향해 있었다.

신동훈 교수가 잠시 그녀를 멈춰 세웠다.

“31번 생도, 설마 그걸로 쏠 생각인가?”

“문제 있습니까?”

“자네의 주무기는 해머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말이야.”

“바꿨습니다.”

“헌터들이 총을 사용하지 않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세. 총기에 마나를 주입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진 않…….”

타아아앙!!

저런 싸가지.

하여간 탑에서 새는 바가지는 소설에서도 샌다.

신동훈 교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서연의 총구는 불을 뿜었다.

진동하는 총성에 생도들의 눈은 일시에 휘둥그레졌다.

크리스털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빛을 발산했다.

이번 건 차원이 다르다.

안 됐지만 김세용의 20초 천하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98!!”

“미친! 총으로 저런 파괴력을 낸다고?”

신동훈 교수도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아마도 이곳 세계관에선 총을 제대로 다루는 헌터가 없는 모양이다.

어쨌든 손서연은 김세용이 기록한 점수를 크게 넘어섰다.

파괴력만 따진다면 숫자 이상의 훨씬 더 큰 차이가 있겠지만.

“67!!”

“오오! 갑자기 점수들이 왜 이래!”

손서연과 비교하니 숫자가 많이 낮아졌지만, 안세창의 기록도 나쁘지 않았다.

역시 아카데미보단 우리 탑 동료들의 기량이 높은 게 사실이다.

딱 한 명.

오윤남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콰아아아!

오윤남의 창질 한 방에 마나 크리스털이 요동쳤다.

심지어 궁니르도 아닌 실습용으로 쓰는 낡은 창인데도 엄청난 파괴력이 전해졌다.

“112!”

“진짜 미쳤다! 요즘 오윤남 왜 저래!”

그야말로 압도적인 숫자.

게다가 녀석은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굳이 힘을 감추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드러내는 설정도 아니니까.

“형! 형이 뭔가 좀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 차례가 다가오자 김세용이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여기서 내 전력을 다 발휘할 순 없었다.

지금 조장급의 점수가 나와 버리면 이틀 뒤 던전 실습에서 오윤남과 같은 조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어제 너 업고 오느라 몸살 났다고, 자식아.”

그냥 적당히 치고 오면 된다.

조 편성은 니케의 반지가 해 줄 것이다.

* * *

[1시간 뒤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모두 대기하십시오.]

저녁 시간.

한창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또 한 번의 퀘스트를 예고하는 메시지 알림음이 있었다.

역시 내 짐작대로의 전개가 되는 것 같다.

“퀘스트?”

“아, 밥맛 떨어지게.”

말과는 다르게 김세용의 숟가락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야말로 음식을 흡입하는 수준으로.

사실 5층 미션을 진행하며 사람들이 가장 만족했던 점은 식욕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탑의 로비에서는 인간의 모든 욕구가 억제되어 생존에 대한 본능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엄밀히 보면 이곳 소설 속 세계도 탑의 일부이겠지만, 인간의 모든 욕구들이 생생히 살아났다.

나 역시 식도락을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이곳에 있는 동안은 많이 먹어 둘 생각이었다.

“이호영 씨. 이번엔 무슨 퀘스트일까요?”

갈수록 서준호도 나에게 의지하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적대적 스탠스는 철회된 지 오래다.

“글쎄요.”

동료들은 이곳이 소설 속 세계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책의 내용을 발설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기에, 함부로 무언가를 이야기해선 안 될 일.

“무슨 퀘스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이나 나갑시다. 대기하라고 했으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퀘스트가 생성될 장소와 최대한 가까이에 있을 필요가 있었다.

분명 이번에도 제한 시간이 있을 것이기에.

산책을 나가면서 슬슬 그 위치로 유도를 해 나갈 생각이다.

“좋습니다. 어차피 퀘스트 생각 때문에 입맛도 다 떨어졌군요.”

“나갑시다!”

소설 설정상으로 지금은 11월의 초겨울.

벌써부터 어두컴컴했으며 찬 바람이 부는 황량한 날씨였다.

하지만 이조차도 모두에겐 낭만으로 다가왔다.

사람 사는 세상. 언제 또 이런 일상을 누릴 수 있을지는 기약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다시 한번 탑이란 곳이 얼마나 빌어먹을 공간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좋군요.”

우리는 온몸으로 찬바람을 느끼며 정처 없이 걸었다.

낡은 표지판과 꺼져 버린 가로등,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들이 적당히 운치를 더해 주었다.

[퀘스트 생성 30분 전입니다.]

오늘 밤 오윤남에겐 위기가 찾아온다.

아마도 주인공을 구하라는 특명이 내려오겠지.

솔직히 조금은 걱정도 된다.

“몸 상태는 다들 괜찮으십니까?”

동료들에게 물었다.

일이 벌어지면 초장에 승부를 봐야 한다.

상대는 몬스터도 아니며, 우리보다 훨씬 경험 많은 자들.

길게 끌어서는 우리만 더 곤란해질 테니까.

“컨디션 최고입니다.”

“저도요!”

그럼 됐다.

가자, 주인공 구하러.

- 2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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