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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22화 (22/292)

22화

미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9분 54초.

우리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직 정지해 있었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나는 교실 곳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이 보인다.

소설 속 인물들이 주입된 기억들과 겹쳐지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

그리고 다들 동시에 외쳤다.

갑자기 동료들의 외양이 변해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로.

모두 10대 후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야!”

“설마 나도 변해 있는 거야?”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긴, 우리들 중엔 서른이 넘은 사람들도 있으니까.

아카데미 생도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보정이 된 것이다.

“김세용! 너…….”

녀석의 얼굴을 보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10대 후반의 얼굴이라니.

“왜? 그래도 이땐 좀 귀여웠지? 그런데 형은 완전 그대로네.”

귀엽다니, 도대체 양심은 어디로 가출한 거냐.

절대 밤길에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몇몇 플레이어들은 마치 자신의 흑역사를 들킨 것처럼 난처해하는 모습이었다.

여드름 난 얼굴에 삐쩍 마른 서준호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서준호 씨.”

“네…… 네?”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당황해 하는 모습이 재밌다.

평소 말하는 걸 보면 태생부터 초인싸인 줄 알았는데, 지금 모습으론 영 상상이 가지 않는다.

채이설은 화장기 없는 지금의 얼굴을 부끄러워했지만, 충분히 미인이었다.

오히려 젖살이 빠지지 않은 풋풋함이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있었으니,

“너…… 혹시 손서연이세요?”

바가지 머리에 뿔테 안경.

처음엔 못 알아볼 뻔했다.

“꺼져!”

“맞구나. 손서연.”

“갑자기 이딴 게 왜!”

콰직!

손서연은 짜증 나는 표정으로 안경을 부숴 버렸다.

지금은 감각 스탯이 상당히 높기에 안경 따윈 필요 없을 것이다.

안경만 벗었는데도 인상이 확 달라 보인다.

“도대체 몇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꺼지라고.”

“안 그래도 가려던 참이야.”

지금은 손서연의 흑역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교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오윤남.

SSS급 회귀자의 기연 싹쓸이의 주인공이다.

“흐음.”

오윤남은 여전히 정지된 모습으로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에 여유 넘치는 표정.

오윤남은 지금 이론 수업에서도 엄청난 주목을 받을 예정이었다.

무한 회귀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 이곳 세계관의 실질적 최고 석학이니까.

나와 열두 명의 동료들은 소설 속 엑스트라.

심지어 원래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이다.

우리는 소설의 초반부에 와 있었다.

이제야 공략집이 내게 이 소설을 추천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기연.”

이 세계관에는 주인공을 둘러싼 많은 기연들이 존재한다.

주인공 대신 내가 먹으라는 것이겠지.

나는 바로 현자의 상태창을 열람했다.

[공략집: 없음]

역시, 이런 거였다.

소설책 자체가 공략집. 심지어 세부 설정은 소설이 훨씬 자세하다.

굳이 무공서는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수련을 통해 검술의 이치나 심득을 깨닫는 것? 굳이 필요 없다.

그냥 거저먹는 것이 최고다.

* * *

미션이 시작되자, 이 세상은 마치 정지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주인공인 오윤남은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김길식 교수의 이론 수업을 경청하고 있었다.

아마 다 아는 내용일 것이다.

녀석의 이론적인 이해도는 교수보다 훨씬 더 뛰어날 테니까.

무한 회귀자가 괜히 사기인 것이 아니다.

“……이며, 순간적으로 마나를 증폭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척 지루한 수업이었다.

소설에서 괜히 김길식 교수의 수업을 수면제라 비유한 것이 아니다.

김세용은 벌써부터 졸고 있었다.

혹시 코라도 골까 봐 내가 다 걱정이 된다.

그에 반해 채이설.

그녀는 노트 필기까지 하고 있었다.

쓸데없이 성실한 모습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나는 입모양으로 옆줄에 앉은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몰입하지 마요.”

“괜찮아요!”

입모양으로 돌아온 대답.

채이설은 살며시 웃으며 노트 필기를 이어 갔다.

참나. 이걸 필기해서 어디다 쓰려고.

한편으론 재밌었다.

미션 시작과 동시에 동료들의 고교 시절의 단상을 볼 수 있었으니까.

지루한 수업의 후반부엔 언제나 그랬듯이 김길식 교수의 질문이 있었다.

“누가 한번 대답해 보겠나?”

생도들에게 맞춰 보라고 내는 문제가 아니다.

학자로서 가지는 알량한 우월감. 그가 주로 즐기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엑시온이라는 물질입니다. 현재 컬럼비아 대학에서 브라운 교수 팀이 연구를 진행 중인.”

“아니, 그걸 자네가 어떻게!”

내가 대답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김길식 교수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당연한 일이다.

아직 연구 결과는 발표도 되기 전이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알고 있냐고?

그냥 나는 이렇게 얼버무렸다.

“비밀입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오윤남을 바라보았다.

원래의 전개대로라면 발표를 하는 것은 이 녀석.

비밀이라고 얼버무리는 것도 오윤남이 주로 써먹는 방식이다.

우리들이 이곳에 머물 시간은 약 나흘.

이 주인공 녀석에게 앞으로 미안할 일이 좀 많을 것 같다.

* * *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손서연을 제외한 우리 열두 명은 한데 뭉쳐 아카데미 교정을 걷고 있었다.

“호영이 형. 아까 그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내 룸메이트 설정인 김세용.

녀석은 소설 속에서도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수업 시간에서 내 발표가 인상적이긴 했나 보다.

하긴, 우리가 살던 세상에서는 마나와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주입된 기억 속에 있던데?”

물론 거짓말이었다.

소설 속에 나왔던 단편적인 대사를 기억해서 대답한 것일 뿐. 나도 내가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뭐야! 혹시 형 캐릭만 좋은 거 아니야?”

“부러우면 탑한테 따지던가.”

어느덧 우리는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웬만한 고급 빌라는 뺨칠 정도로 화려한 외관.

이 건물은 아카데미 생도들이 누리는 특권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퀘스트>는 도대체 언제 생성되는 것일까요?”

서준호가 의문을 제기했다.

처음 제시된 메시지에 따르면 퀘스트는 나흘 동안 수시로 생성된다고 했지만, 여전히 깜깜무소식이었다.

사실 내가 예상하고 있는 퀘스트 생성 시점이 있긴 했다.

바로 지금쯤.

아카데미 캠퍼스 내에 조그마한 포털이 형성될 타이밍이다.

소설에 따르면 김길식 교수의 수업이 끝난 직후이니까.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역시!

소설의 전개대로라면 이 에피소드를 건너뛸 수가 없다.

오늘 예정된 기연은 주인공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니까.

물론 기연이 존재하는 곳은 균열 속 던전이라는 곳이다.

[미션]

1. 아카데미 B-37동 건물 측면에 형성된 던전을 클리어하십시오.

2. 제한 시간: 60분

3. 실패 시: 데스 미션

그런데 제한 시간이 고작 60분이라고?

소설에 따르면 오윤남은 최소한 4시간 이상을 던전에서 보낸다.

던전을 클리어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 보름달을 보았다고 했으니까.

“다들 서두릅시다!”

나는 동료들에게 외쳤다.

본래는 오윤남이 단독으로 입장해야 할 던전.

아무리 우리 열둘이 가세한다고 해도 제한 시간 60분은 빠듯할 것이 분명하다.

* * *

오크 소굴.

지금 우리가 공략해야 할 던전명이었다.

사실 생도들에겐 던전을 공략할 자격이 없다.

아직 정식 헌터가 아니니까.

결론적으로 지금 이곳은 생도들이 벌이는 탈선의 현장이었다.

“너희들이 여길 어떻게?”

오윤남은 우르르 몰려온 우리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 역시 균열에 입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포털의 입구에 머물러 있었다.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역시 균열이 형성되어 있더군.”

내 대답에 오윤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 우리가 짐덩어리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 던전은 아카데미 생도들이 공략하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니까.

“너희들은 움직이지 말고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를 걱정해서 하는 얘기겠지만, 그냥 여기에 머물러 있다가는 줄줄이 데스 미션 행이다.

60분 내에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지금부터 단내나게 뛰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

“오윤남! 네가 던전 부산물을 독식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뭐라고?”

“어차피 우린 공범이야. 그럼 난 바로 출발한다.”

나는 앞장서서 달려갔다.

이 던전은 섬멸형과 보스형이 결합된 복합 던전.

던전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오크들을 모두 섬멸시켜야만 보스룸이 나타난다.

우리 모두가 흩어져서 오크들을 사냥한다면 제한 시간 내에 미션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보스는 내가 죽어야만 한다.

거기서 나오는 아이템은 진짜 사기급이니까.

“일단은 잡몹들부터.”

[초급 검술 Lv.3가 발휘됩니다.]

나는 눈앞에 달려드는 오크를 향해 불굴의 검을 휘둘렀다.

소설 속 설정이라 그런지 몬스터들의 레벨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서걱!

서걱!

내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 괴물들의 무리 속에서는 내가 포식자라는 것을.

서걱!

꾸에에에엑-

오크의 모가지가 땅에 떨어지며 첫 사냥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아쉽다.

경험치 획득도 레벨업도 없다.

그저 생존을 위해서 싸워야 할 뿐이다.

동료들도 적절하게 흩어지며 사냥을 시작했다.

오윤남의 허탈한 눈빛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녀석 입장에선 그야말로 깽판.

저 혼자 조용히 던전을 클리어한 후 기연을 획득할 생각이었겠지만, 계획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너 어차피 무한 회귀자인데, 한 번쯤은 양보 좀 하자.

타아앙!

총성이 울렸다.

손서연도 드디어 사냥을 시작한 것.

사실 이 소설에서 총은 등장하지 않는다.

총뿐만이 아니라 모든 현대 화기는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설정이었던 것 같다.

물론 손서연이 발사하는 것은 마력탄이지만 말이다.

오윤남의 눈에 이 장면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궁금하긴 한데, 지금은 사냥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보스룸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그 자격을 얻으려면 던전 내의 실적을 쌓아야만 한다.

[초급 검술 Lv.3가 발휘됩니다.]

꾸에에엑!

벌써 두 마리째.

페이스는 나쁘지 않다.

나는 계속 절대 감각을 일으켜 오크들의 행방을 좇았다.

* * *

주인공은 역시 주인공이었다.

오윤남은 나보다 강했으며, 손서연의 총보다도 훨씬 사기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다.

휘이이익!

오윤남이 던진 창이 날아가 오크의 모가지에 박혔다.

그대로 절명.

내 불굴의 검은 레어급이지만 오윤남의 창은 무려 신화급이다.

궁니르.

저 창은 던지면 반드시 적의 몸에 명중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인과율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너무하네.”

오윤남의 사냥 성과는 압도적이었다.

창을 던지는 족족 어김없이 오크 한 마리씩 죽어 나갔다.

타아앙!

손서연이 쏘아 낸 총알.

하지만 의미 없는 총성이 되고 말았다.

궁니르는 총알보다 빨랐고, 더욱더 파괴적이었다.

두 사람의 사냥감이 겹칠 때면 어김없이 승자는 오윤남이었다.

손서연의 표정에서 짜증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보스룸에 도전할 자격을 얻는 자는 무조건 오윤남이 될 것이다.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크가 섬멸되었습니다.]

벌써?

제한 시간은 24분이 남아 있는 상황.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페이스로 사냥이 종료되었다.

우리의 등장이 오윤남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보스룸이 생성되었습니다.]

[보스에 도전할 자격은 오윤남이 획득하였습니다.]

대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끝나 버린 승부.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다.

내가 노린 것은 단순히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오윤남의 표정은 좀 심각해 보였다.

사냥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뭔가 이상해.

그 말이 내 귀에는 들렸다.

순간 머릿속에 형광등이 켜진 기분이다.

!!!!!

그래, 이상할 것이다.

오윤남은 무한 회귀자.

그의 기억 속에 우리 열두 명이 어떤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상황은 무척 이상할 것이다.

우리들은 평범한 아카데미 생도치고는 너무 강했으니까.

그런 우리가 그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지 않다면 너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나는 오윤남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 잠깐 조용히 얘기 좀 할까?”

나는 오윤남을 보며 씨익 웃었다.

놈은 결국 보스룸 도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생각이니까.

- 2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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